"얇은 문틀 하나일 뿐이었는데 헤렌이 그걸 넘어가는 순간 투명인간처럼 사라져 버린 거야." (...) 그것은 헤렌의 마지막 마술이 되었다. 다시 등장해 인사를 하고 박수를 받아야 하는 타이밍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러분은 마술을 보신 적 있나요? 저는 어릴 때 딱 한 번 마술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날 가장 인상 깊었던 마술은 큰 상자 안에 들어간 마술사가 사라지는 마술이었습니다. 그 날의 장면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핀 조명 하나가 툭 떨어져있는 무대 위에 늠름한 얼굴을 한 마술사가 서 있습니다. 관객석에 앉은 관객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기억하려는듯 한참을 살피던 마술사는 상자의 문을 열고, 검고 텅 빈 상자 속을 꽤 오랜 시간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이윽고 그는 상자 안에 들어가고, 그림자처럼 서 있던 조수가 상자의 문을 잠급니다. 두꺼운 자물쇠와 쇠사슬을 이용해 상자를 칭칭 감은 조수는 여전히 그림자 같은 얼굴을 하고 상자 옆으로 물러납니다. 그리곤 짧은 암전. 다시 밝아진 무대엔 여전히 조수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상자의 문을 잠글 때 그랬던 것처럼 과감한 손길로 자물쇠와 쇠사슬을 풉니다. 그리곤 문을 활짝 열어 젖히는데, 세상에! 마술사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어디로 간 걸까요?
마술이 주는 충격은 있던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데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 그러니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존재가 계속 여기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거스르는 방식이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인 것 같아요. 어린 저는 마술사가 사라진 후 상자를 치우는 조수의 모습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저 상자를 치우면 그 마술사는 어떻게 돌아올 수 있느냐고 걱정하면서 말이죠.
오늘 제가 마술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이유는 조우리 작가의 책, 『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가 바로 이 '마술' 이야기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20세기 말 데이비드 카퍼필드와 더불어 이름을 날린 최고의 마술사", '헤렌 산토스'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는 무대 위에 설치된 평범한 문 너머로 사라졌고, 이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 준 아버지는 그가 '웜홀의 입구'를 통과하여 다른 곳으로 간 거라고 말하죠. '나'는 아버지가 해 준 '헤렌 산토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문'에 대해 생각합니다.
7월 19일, 이상하리만치 모든 일이 완벽하고 매끄럽게 굴러가던 휴가의 어느 날. '나'의 동생 '혜진'은 부모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문 너머로 사라져버립니다. '나'는 혜진이 사라지기 전까지 함께 있었지만, 휴대폰 게임에 몰입한 나머지 혜진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이후 혜진의 실종과 관련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아버지로 인해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게 된 '나'의 가족은 혜진을 잃어버린 슬픔에 잠길 시간도 없이 사람들의 관심에 짓눌려 힘든 나날을 보냅니다.
'나'는 혜진이 사라진 후 스누피 이야기를 자주 떠올립니다. 동화 작가였던 어머니가 들려준 '피너츠' 속 스누피는 갖은 모험을 겪고 나서도 언제나 지붕 위에 평화롭게 누워 하루를 돌아봅니다. 스누피의 존재는 나와 혜진에게 스펙터클과 안도감을 동시에 주었죠. '나'는 스누피처럼 혜진도 언젠가는 '자기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혜진은 잠깐 떠나있는 것 뿐이고, 혜진이 돌아오고 나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날의 일을 함께 회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어떤 얼토당토않은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심지어 세상이 끝나거나 전 우주가 통째로 사라져도 스누피가 반드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올 것임을 알았기에 안도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작품 속에는 '나'와 가족 말고도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이유로 상실을 경험하는 중이에요. 슬픔과 죄책감, 분노, 무기력, 후회를 품은 채 '비일상'을 살아가고 있죠. 그들 중 누군가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그것은 말하는 당사자나 상대방 모두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짊어진 슬픔이 아직 많아서 일상으로 옮기는 발걸음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런 일뿐이었다. 서로 끌어 안고 우는 일. 울고 난 후 식은 육개장을 나눠 먹는 일, 부은 눈에 얹을 물수건을 주고받는 일, 상대의 꽉 쥔 주먹 위에 나의 손바닥을 얹는 일. 그렇게나 별 볼 일 없는 일.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나'와 '나'의 친구 '수민'이 함께 돌보던 개가 죽고 난 후, 개를 잊지 않으려고 개에 대해 쓰는 장면입니다. "공을 무서워한다. 생선을 주면 씹다가 뱉는다. 개를 부르면 컹컹 짖는다. 오줌과 똥을 따로따로 싼다." 같이 지극히 사소한 특징들을 종이 가득 적던 수민은 페이지를 완성한 후 울음을 그칩니다. 아마 '개'에 대해 기억하고 적어보는 일이 수민에게는 중요한 애도의 방식이었겠죠. 저는 이런 수민의 모습을 보며, 일기장을 펼쳐보았습니다. 오늘도 어제만큼 슬프고, 어쩌면 내일도 오늘처럼 슬프겠지만 누군가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눌러 쓴 일기가 저만의 애도라고 여기면서, 찰랑거리는 슬픔을 느릿느릿 비워내고 그 자리를 이름들과 기억들로 채우기 위해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