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구입니다. 어느덧 겨울이 가까워오고 있어요. 이제 올 한 해를 보내줄 준비를 슬슬 해야겠지요. 연말이 다가오면 유독 쓸쓸해지는 것 같아요. 아마도 한 해를 '보낸다'는 표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어떤 표현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을 오래 누르기도 하는데요. 오늘은 이렇게 우리를 누르는 말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누를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외면하고 숨겨 온 언어들을 다시 드러내보이는 책들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서로 감춰온 언어들을 드러내고 부둥켜 안는 따스한 겨울이 되길 바라며, 오늘의 들불레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덧. 레터 하단에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 도서 증정 이벤트'를 마련하였으니, 책 받아가세요! 💗
👏 들불의 PICK
- 『제로의 책』, 강현석, 김영옥, 김영주, 고아침, 손희정, 송수연, 안팎, 어라우드랩, 예술육아소셜클럽, 윤상은, 이규동, 채효정, 최명애, 최승준, 헤더 데이비스 지음
👓 번역으로 읽는 여성서사 : 엄일녀 편
- 『로즈의 아홉 가지 인생』, 도나 프레이타스 지음, 엄일녀 옮김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 전은영, 김소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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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제로'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와 (-)가 만나는 지점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고, '제로웨이스트'와 같은 단어, 김사과 작가의 『0 영 ZERO 零』 같은 작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태초의 순간, 이야기가 시작되는 빈 토양 같은 것이 떠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소개할 『제로의 책』은 제가 여러분에게 물었듯 서로에게 '제로'가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책의 출발점이 되었던 프로젝트 《제로의 예술》에 기획과 디자이너로 참여했던 어라우드랩 김보은, 김소은은 "제로가 원래 빈자리를 세기 위해 만들어낸 기호"였다는 말로 '제로'의 개념적 정의를 소개하고, 제로를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인 것", "'무엇'인가 비어있다는 특성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재정의합니다.
그리고 《제로의 예술》을 진행하면서 제로가 '전체를 위해 어떤 것도 소거하지(감추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며, 디자이너로서 '제로'를 위해 뭘 해야 할 지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오죠. 이윽고 그들은 "0이라는 빈 자리를 다양한 시선과 이야기들이 채워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디자인의 시각화와 생산에 있어 자신들의 역할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이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로의 책』의 필진들은 특정한 이야기들만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이야기들을 사회가 정한 '표준'의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제로'의 상태에서, 오랜 시간 밀어두었던 이야기를 시작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러려면 어라우드랩의 두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먼저 '제로'가 무엇인지 각자의 방식으로 정의해봐야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이야기를 드러내고, 재조립하고, 확장할 수 있으니까요. 영역 바깥의 이야기를 영역 안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선 이 자리에서 저마다의 '제로'를 시작하는 방식으로 말이에요.
🏷️ 구구의 PICK
제게 특히 오래 남은 글은 안팎*의 「필패하는 말과 토대 없는 믿음」이었어요. 저자는 서울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소도시에 정착하게 되면서, "접점 없는 타인들의 시간표에 둘러싸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도시는 편의점도, 식당도, 카페도 모두 일찍 닫는, 일과의 구분이 선명한 '표준의 삶'을 위해 밤이 허용되지 않는 동네거든요. 이 곳에서 저자는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무언가를 하지 않은 채로 말이죠. 이 때 저자는 틀 바깥에 살고 있다는 감각을 분명하게 느낍니다. 우리에게 특정한 시간표만이 인정되듯, 규칙적인 시간표가 필요 없는 저자의 삶을 설명할 사회적 언어가 부재한 탓입니다. 저자는 이를 '언어의 실패'라고 말하는데요.
저자는 이렇게 "필패하는 말"들을 통해 '예술'을 다시금 발견합니다. '아름답고 고상하기' 때문에 쉽게 타락하고 오용되는 예술이 아닌, "언제나 시기상조인 상태로 무대에 오르는 예술"(p.162), "장애인의, 여성의, 성소수자의 삶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지 않고 그것을 그 자체 고유한 존재로서 무대에, 광장에, 거리에 올리"고, "스스로 법칙을 수립한다는 의미 그대로의 자율을 실천"(p.163)하기 위해 "패배하기를 의지하는"(p.161) 예술을 말이죠.
"이 필패의 말은 바깥에 머물기를 고집하지만 그 바깥은 내부의 한가운데에 출현한다. 내부의 언어에, 심문에 한 마디 한 마디 답하기를 숫제 중단하고 겁 없이 자기만의 언어로 뜬금없이 말한다." (p.163)
저는 예술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도 그랬죠. 이 글이 제게 남긴 것은 예술의 정의보단 내가 '안'과 '밖'으로 규정했던 것들, 안팎의 기준이 되는 것 혹은 그 기준들이 만드는 위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토대일 거예요. 이 글을 읽고 저는 제가 곧 실패를 감행하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뜬금없이 자기만의 언어로 말하게 될" 폭발적이고 피할 수 없는 실패를 말입니다.
* 안팎 : 안팎과 박종주, 두 개의 이름으로 글을 쓰거나 번역한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시각 이미지를 만드는 페미니스트 '프로젝트 노뉴워크(No New Work)'의 동료들 곁에서 주로 퀴어, 재현, 정치 등을 생각하고 있다.
* 안팎의 다른 글 읽기 : <'나중에'의 나라에서 지금 축제하기>, 워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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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번역가
엄 일 녀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하고 출판 기획과 잡지 편집을 겸하다가 지금은 전업 번역가로 일하고 있음. 『나이트 워치』, 『비바, 제인』, 『섬에 있는 서점』, 『여자는 총을 들고 기다린다』, 『고저스』, 『거짓말 규칙』, 『레이디 캅 소동을 일으키다』, 『미스 콥 한밤중에 자백을 듣다』, 『비극숙제』, 『샬럿 스트리트』, 『너를 다시 만나면』, 『이웃집 여자』, 『착한 도둑』, 『미스터 세바스찬과 검둥이 마술사』, 『안 그러면 아비규환』, 『여름, 비지테이션 거리에서』, 『함정』, 『사라진 수녀』 등을 번역함. 『리틀 스트레인저』로 제10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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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의 아홉 가지 인생』 (도나 프레이타스 저, 엄일녀 옮김)
우리들 누구나 인생에서 최소 한 번쯤은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 이 작품은 바로 그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다룹니다. 결국 단순하게 ‘한다’ 혹은 ‘안 한다’ 둘 중의 하나로 내려지는 결과값에 비해 고민 과정에서 헤아려야 할 조건들은 무수히 많고 또 저마다 다양하겠지요. 저는 일찍이 여러 상황적 요인들과 개인적 가치관에서 비롯하여 딩크로 살기로 마음먹었지만, 최근에는 다시금 그 고민과 결정이 마음속에서 조금씩 떠올랐다가 잠잠해졌다가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과 이 작품 속 로즈 나폴리타노 선생의 이야기에 더욱 공감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일종의 아홉 가지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여 로즈의 결정에 따른 아홉 가지 인생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형식입니다. 시작점은 내내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고 살아온 로즈가 언젠가부터 아이를 원한다고 주장하는 남편 루크와의 갈등을 맞닥뜨리는 지점입니다. 그때 로즈가 가기로 한 방향에 따라 아홉 가지의 다르고도 비슷하기도 한 인생이 펼쳐지는데요. 그 방향에는 남편의 뜻을 수용하고 기꺼이 임신을 시도하는 것부터 그다지 원하지는 않았지만 운명에 맡겼다가 임신이 되어버린 경우,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지킴에 따라 다른 것을 포기하는 삶까지 다양한 경로가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생각했던 ‘한다’와 ‘안 한다’라는 두 가지 결정 사이에도 서로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즈의 삶을 추적해가는 재미가 큰 이 작품에서 스포일러는 큰 방해가 될 것 같아 시원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저는 로즈의 아홉 가지 삶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이 독자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에 대한 결정은 오롯이 당사자인 본인이 숙고하고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제가 이 글을 쓰면서 계속 ‘선택’이 아닌 ‘결정’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최근 친구들과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새로운 해석을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는 결정조차 일종의 선택권을 박탈당한 결과일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특히 그 결정이 사회문화적, 환경적, 그리고 그 외 다수의 요인 때문에 사실상 출산이라는 선택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말이에요. 저와 또 다른 제 친구 한 명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것이 그나마 페미니즘이 이 사회를 발전시킨 덕분에 우리가 가질 수 있게 된 선택권인 줄로만 생각했거든요. 물론 이 의견도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저는 임신과 출산 문제를 고민할 때 아직 제 개인의 의사까지는 깊게 들여다보지 못한 것 같아요. 거기까지 도달하기 전에 이미 아이를 낳고 키우기에 좋은 여건이 도무지 마련되지 않을 것 같다는 어두운 미래에 대한 생각이 지배적이거든요. 이번 레터에서는 왜인지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요. 아무래도 이 작품이 우리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책이 흥미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메리 읽고 씀.
👀 함께 보면 좋은 책
최근에 우연히 발견하여 이 작품과 이어서 읽어보려고 하는 책 한 권을 함께 소개합니다.
- 『아이 없는 부부와 고양이』 (무레 요코 저, 이소담 옮김)
그리고 올해 노벨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를 포함한 9인 작가가 집필한 ‘엄마 됨’과 페미니즘에 대한 단편소설집도 함께 소개합니다.
- 『이등 시민』 (틸리 올슨, 그레이스 페일리, 로젤린 브라운, 부치 에메체타, 린다 쇼어, 마거릿 애트우드, 토니 모리슨, 아니 에르노, 모이라 데이비 저, 김하현 옮김)
🐚 메리 :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번역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한 달에 한 번 번역 덕분에 읽을 수 있는 여성 서사를 소개합니다. 여성 서사가 모두의 것이 되는 날을 바랍니다.
* <번역으로 읽는 여성서사>는 12월까지 방학을 가집니다. 내년에 다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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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출판사 동녘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 받아 작성한 원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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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
전은영, 김소라 지음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은 몇 개의 수식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계신가요? 저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대강 어림 잡아봐도 대여섯가지는 되는 것 같은데요. 나이가 들수록 '나'를 수식하는 말들은 늘어가고, 그 무게는 점차 무거워지는 걸 느낍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제게 무겁게 느껴지는 수식은 바로 '페미니스트' 그리고 '직장인'(또는 '직업인')입니다. 신념을 지키면서 내 살 길을 도모해야 하는 삶은 생각보다 험난하고, 이미 다 겪었다고 생각할 때쯤 또 새로운 사건이 등장해 저를 고민하게 만들곤 하니까요.
우리 이름에 걸쳐진 여러 타이틀들이 그렇듯, '페미니스트'와 '직장인'은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고, 이러한 분리불가능성 때문에 아주 많은 내적·외적 문제들이 생겨나곤 합니다. 이렇게 겪는 문제들 중에는 '여성-페미니스트-직장인' 중 어떤 타이틀에 방점을 찍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고, 생존을 위해 '직장인' 타이틀을 내세우면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각이 옅어진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도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는 페미니스트 직장인이 겪어야 하는 여러 문제들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살피고 이해해보고자 노력하는 책입니다. '여성 페미니스트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경험들로 구성된 이 책은, 타협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결정들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인 동시에 일터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용기 있는 메갈들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일터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고 있을, 나와는 같으면서 다른 페미니스트들을 떠올리며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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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장엔 죄다 여잔데 최종 면접 가면 남자가 왜 그렇게 많은 거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종종 '페미(페미니스트) 아닌 여자들도 취준(취업 준비) 시작하면 페미 된다'는 이야기가 돌곤 합니다. 이처럼 취준은 페미니즘에 관심 없던 여자들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는 중요한 변곡점입니다.
저자 전은영은 이러한 변곡점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자 취준생들을 인터뷰하고, 노동시장 진입을 준비하는 여성 구직자들이 느낀 성차별 경험을 담은 보고서를 쓰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취준 과정 속 성차별 실태를 설명하고자 노력합니다. 이 보고서에서 특히 강조된 개념은 '정황적 차별'로, '여성 구직자가 구직의 모든 단계에서 경험하는 명시적이지 않은 차별'을 가리킵니다.
서류 전형에서 어찌저찌 '정황적 차별'을 이겨내더라도, 여성은 면접에서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차별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결혼과 육아와 관련한 '역할'에 대한 질문들이 그렇습니다. 일례로 저자는 자신이 취준생이던 시절, 함께 언론사 면접을 보던 어떤 여성 지원자가 받은 질문("결혼 후 중요한 취재원과의 약속이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냐")을 떠올립니다. '착한 엄마'라는 정체성은 이제 우리에게 의무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여겨지지만, 중년 남성 면접관에게는 여전히 육아가 직장과 견주어야 할 일생일대의 선택처럼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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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리부트 시절의 '각성'을 거쳐 취업시장의 차별을 체감하고 되새긴 여성들은, 직장에서 마주하는 불쾌하고 참담한 경험들 뒤에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금 더 빨리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빨리 깨달은 여성들의 고민과 선택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 p.26-27,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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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꾸(다이어리 꾸미기)', '뇌꾸(공부, 뇌 꾸미기)' 말고 '신분 꾸미기'!
커리어 우먼의 이미지를 한 번 떠올려봅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단정하게 다듬은 눈썹에 과하지 않은 향수 냄새, 깔끔한 자켓에 잘 다린 블라우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구두 등 대체로 '사회적 여성성'을 적당히 수행한 모습을 떠올릴 겁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일차적으로 사회가 강요한 것이지만, 이차적으로 여성 스스로가 학습하고 내면화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왜 여성들은 이러한 이미지를 학습하고 체화하게 된 걸까요?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페미니스트라는 걸 온몸으로 드러낼 때 예상되는 불이익과 꾸밈에 대한 누군가의 압박과 강요를 피하기 위한 행동이기도 하고, 자신의 모습을 설명하는 데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행동이기도, 무시 당하기 싫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저자 김소라는 이렇게 복잡한 마음을 '신분 꾸미기'로 설명합니다. 다꾸, 뇌꾸, 통꾸(통장 꾸미기)처럼 나라는 존재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감추기 위해 꾸미는 것을 택했다고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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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스스로가 급격하게 보수화되는 걸 실감했다. (...) 회사에 머리를 밀고 노브라로 출근한다면?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 취직 이후에는 내게 닥칠지도 모르는 불이익의 무게가 훨씬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표정, 말투, 옷매무새까지 신경쓰며 얌전하고 무해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튀고 싶지 않아서, 책잡히기 싫어서, 피곤해서...... 누군가 직접적인 압박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행동하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 p.38-39,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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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 여자 욕은 안 하려고 했는데"
많은 여자들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나서 가장 힘들 때가 다른 여자가 미워질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른바 '여적여'라는 프레임에 우리는 '연대'라는 단어로 대항해왔습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연대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다양한 상황과 사람을 겪으며 몸소 느끼게 되죠. 이 과정에서 느끼는 여자를 향한 미움은 페미니스트라면 절대로 품어서는 안되는 잘못된 감정처럼 여겨지고, 결국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저자 전은영은 "어느 날엔 여자 동료를 미워하고, 다음 날이 되어선 그들을 미워하는 나 자신을 다시 미워하는 쳇바퀴를 돌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이러한 미움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여자'라는 접두어를 포스트잇이라고 생각하는 전략을 취합니다. 이 전략은 같은 여성이기 때문에 특별히 대해야 한다는 마음보다 한 명의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일'에 대한 태도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여성'이라는 성별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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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내가 회사에서 알게 된 여자들은 나와 아주 다른 사람들이라는 게 보였다. 취미나 관심사도 다양했고, 사안에 대한 가치판단을 할 때 생각과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 나와 비슷하게 살아 온 또래 여자가 모두 페미니스트일 수는 없었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같은 회사에서 일하게 됏을 뿐인 사람들을 운명인 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 p.50,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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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는 페미니스트 직장인이 겪는 여러 상황을 펼쳐 놓고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이 질문들은 때로 논쟁적으로 여겨지는 문제들이기도 합니다. '탈코'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고, '여자를 미워하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내용에는 깊이 공감하다가도, 어떤 내용에는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상상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직장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모습의 배경에 분명한 원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페미니스트 직장인인 우리는 어떤 선택에 대해 끔찍한 자기혐오에 빠지곤 합니다. 우리의 신념은 변함없이 우리 안에 머물고 있는데도, 마치 어떤 결정에 대해서는 신념 전부를 저버린 양 자책하게 되죠.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는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내보인 다음, 신념과 생존 사이에서 갈등하며 자책을 일삼는 여성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타협이 아니라 살아 남기 위한 용기 있는 전략'임을 주지시키는 책입니다. 그리고 나의 선택에도 마땅한 이유가 있었듯 다른 여자들의 선택 역시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고 말하죠. 그들도 분명 어떠한 이유에 의해 지금의 선택에 이르게 된 것일테니까요.
페미니스트 직장인으로서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의 이름 앞에 어떤 수식을 갖다 붙이든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단 걸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를 통해 확인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또, 책이 던지는 질문들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해보면서, 여러 타이틀 속에서 나의 중심을 지키는 방법과 내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나의 수식어는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보시길 제안하고 싶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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