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사 드려요! 모두 가뿐한 마음으로 새해 맞이하셨나요?
들불은 새해를 맞아 크고 작은 변화를 거쳤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소소한 변화를 경험하며 잠깐 앓기도 했어요. 덕분에 무려 한 달이나 들불레터를 쉬게 되었네요. 레터를 기다리셨을 구독자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2월부터는 다시 다양한 책 이야기로 꾸준히 찾아 뵙도록 할게요 😊
2월 들불레터는 신간과 키워드 책 소개, 여성 작가와 관련된 특집호로 전보다 자주 찾아 올 예정이에요. 이외에도 들불에서 준비 중인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소개하고, 구독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이벤트를 마련해보고자 하니 새로운 소식 놓치지 마세요! 💓
그럼 오늘의 들불레터도 힘차게 시작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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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은 엄마와의 관계를 ‘애증’이라는 단어로 묘사하곤 합니다. 그만큼 엄마와의 관계가 딸에게, 특히 페미니스트가 된 딸에게 어려운 독해로 느껴지기 때문인데요. ‘나처럼 살지 마라’고 말하는 엄마는 나를 만나기 전 어떤 삶을 살아 왔을까요? 또,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라는 딸의 말 속에는 어떤 마음이 숨어 있을까요? 평생을 고민해도 이 문제는 쉽게 규명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표제인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I never had a mother)’는 시인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썼던 문장입니다. 디킨슨은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고백으로써 일종의 선언을 합니다. “내 안의 여성적인 힘을 선포하고, 어머니의 시대를 넘어서고, 나를 낳은 여자의 분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 선언은 지금의 우리의 고민과도 분명 닿아 있습니다.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인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를 쓴 하재영 작가는 ‘엄마’라는 고유한 존재를 딸인 자신이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엄마를 이해하려는 시도에는 필연적으로 오독이 뒤따르며, 그 재현 역시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를 쓰는 작업을 실행하고자 합니다. 분명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작업이지만, 그럼에도 의미있게 실패하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말이죠.
"이 책은 엄마의 삶을 경청하고 해석하고 감응하려는 작업이었다. 많은 딸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옹호자를 자처하지만, 나에게는 그 중간 단계로써 해석이 필요했다. (...) 나의 해석은 한 사람 속으로 '들어감'이고 '물러남'이다.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엄마의 감정으로 느끼려고 그녀의 내적 논리와 존재 방식으로 '들어가려' 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하재영 지음 하재영 작가는 집과 여성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에서 엄마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과 동생에게는 방이 있었고, 아빠에게는 취미생활을 위한 방이 있었지만 엄마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없었죠. 엄마는 “집 전체가 다 내 방”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저자는 장소 그 자체가 되어버린 엄마의 처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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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일루즈는 성 과학이 등장하기 전, 여성의 몸이 남성의 몸을 모방한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이야기합니다. 여성의 생식기를 남성의 생식기가 안쪽으로 굽어 들어간 변종으로 보았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하죠. 애석하게도 이 문제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 과학의 등장 이후에도 우리가 ‘보편’이라고 부르는 신체는 언제나 ‘남성’을 기준으로 했으니까요. 이는 사회, 문화, 경제 등 전 영역에 걸쳐 적용되는 기준입니다. 남성을 나타내는 단어인 man이 ‘인류’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모습은 대체로 ‘남성’의 모습으로 대표되곤 합니다.
안드레아 롱 추의 책 ⟪피메일스⟫는 이런 이상한 기준은 우습다는 듯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은 여자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를 싫어한다.”
여기에서 안드레아 롱 추가 말하는 ‘여자’란 생물학적 성별이 아닙니다. 저자는 “여자”란 존재론적인 성격을 갖는 무언가이며, “여자됨은 인간의 해부학적 혹은 유전자적 특성이 아니라 보편적인 실존 조건”이라고 설명하죠.
이 책의 목차는 아주 흥미롭고 (예를 들면 <남자들이 똥 잘 먹는 여자를 훨씬 더 존경한다는 걸 누구나 알지> 같은) 그 내용은 무척 혼란스럽습니다. 본문에는 비꼬는 말, 농담, 과장과 비약이 가득하죠. 하지만 그 동안 남성이 여성을 비난해 온 구실들이나 우습지도 않은 여성혐오의 패턴들을 떠올려보면 ‘여자됨’이라는 것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은 당연히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더는 여성이기를 원치 않았다. 적어도 기존 사회에서 그 말이 뜻하는 바대로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젠더의 전적인 철폐를 주창하든 여자임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여성womanhood 범주를 제안하든 페미니스트들은 더는 여자이기를 원치 않았다. 온전한 인간 존재로 상상되는 여성을 지지한다는 것은 언제나 여자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바로 그만큼 여성혐오를 표출한다. 아니면 그냥 내가 내 감정을 투사하는 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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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실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알고 공부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반드시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는데요. 바로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된 이후 줄곧 여성을 ‘단일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해왔습니다. 젠더 뿐만 아니라 계급, 인종 등 다양한 입장을 고려해야만 ‘가부장제 타파’라는 공통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요. 여성을 단일한 존재로 규정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의 총체를 이해해야만 하고, 이에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은 바로 나의 위치를 인식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나’의 위치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위치를 안다는 건 단순히 ‘내가 몇 살이고,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문제들 혹은 보지 못하는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작업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작업은 무척 어렵고, 고되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벨 훅스는 이러한 어려움을 일찍이 인식한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래서 먼저 용기를 내 보기로 하죠. 자신의 경험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각자가 계급에서 겪은 모순적인 문제를 꺼내놓을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말이죠.
"모든 인종의 여성들 그리고 흑인 남성들이 급속도로 최극빈층으로 추락하고 있다. 침묵을 깬다는 것, 그러니까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고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살펴본다는 것은 부와 풍요로움을 모두가 함께 나눌 수 있고, 정의가 개인의 삶과 공공의 삶 모두에게 실현될 수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발걸음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모두 자기 자리에 그대로 갇혀서 우리의 계급이나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불가능해지기 전에, 바로 지금, 계급에 대해 말하고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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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오 콘텐츠 플랫폼 '오딕' : 이제 들불레터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어요!
지난 레터들이 메일함에 숙제처럼 쌓여 있다면, 오딕에 올라오는 오디오 레터를 들으며 가볍게 소화해보시는 건 어떤가요? 지난 레터들부터 차근차근 업데이트 중이니, 아직 읽지 못한 레터가 있다면 오딕에서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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