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들불레터에서는 이른바 '개천에서 용 난 사람들'에 관한 문학적 접근과 이론적 성찰을 담은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그리고 이와 관련한 한국의 여러 보고서를 함께 소개하였습니다. 또, 한국의 현실을 대법원 판결을 통해 발견하는 책, 『판결 너머 자유』를 다뤘습니다.
✊ 들불 캐비닛
-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샹탈 자케 (그린비)
- 한국에서 '계급횡단'은 가능할까?: 교육 불평등과 계층 세습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 『판결 너머 자유』, 김영란 (창비)
-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김영란 (창비)
- 『판결과 정의』, 김영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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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얼마 전 읽은 책에는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의 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연구보고서가 인용되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소득 계층별 출산율 분석과 정책적 함의'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로, 아이를 낳은 가구를 총 100가구로 가정한 후 이 중 저소득층은 9가구가 채 되지 않고, 그 중 약 55가구가 고소득층의 자녀라는 분석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저소득층(연소득 2,380만원 이하)은 아이 낳기를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 반면, 고소득층(연소득 6,348만원 이상)은 여전히 아이를 낳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계층 간 출산(출생) 양극화 문제는 여러 사회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은 본질을 놓친 채 표류하며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죠.
이제 총선이 코앞입니다. 정치인들은 불평등(지역 불평등, 교육 불평등 등), 양극화 완화에 관한 공약들을 여럿 내놓고 있습니다. 시민들도 이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며,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것을 희망하고 있고요. 그만큼 '불평등'이라는 키워드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가 되었는데요. 들불레터는 그 중에서도 특히 너무 시급하고 중요하지만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문제, '계급'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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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은 스피노자의 이론을 분석 도구로 삼아 계급횡단자의 자전적 소설과 자서전 속 이야기들에 접근하고 이에 대한 이론적 성찰을 이어간 작품입니다. '계급횡단자'라는 낯선 용어도 그렇지만, 스피노자의 철학이라니... 왠지 무척 어렵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실 이 책은 계급을 다룬 정말 재밌는 작품 중 하나예요.
저자인 샹탈 자케는 계급횡단자를 "부모의 계급을 재생산하지 않고(비-재생산) 출신 계급과는 다른 사회적 계급으로 이행한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저자가 고안해낸 신조어인데요.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개천에서 용 난 사람' 정도를 일컫는 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계급횡단자 중 대표적인 사례로 '아니 에르노'를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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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는 계급, 권력, 가부장제와 관련한 자전적 소설들을 여러 편 쓴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계층에서 상층 계급 출신의 선생님이 가르치는 금욕적인 세계로 이동한 과정을 담은 『부끄러움』, 노동자인 아버지의 삶을 목격한 기록을 담은 『남자의 자리』 등은 그에게 계급, 계층 이동이라는 문제가 어떠한 내면적 파장을 일으켰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이죠. 샹탈 자케는 이러한 작품들을 인용하며,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넘어간 사람이 도착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출신 환경의 익숙한 태도를 바꾸게 되는 어려운 과정을 그의 정신과 신체의 가소성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변형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논의를 전개합니다.
"화려한 사회적 신분 상승에 성공한 계급횡단자들은 흔히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그 찬탄 뒤에는 깊은 몰이해가 감춰져 있지만 말이다…. 그들은 매혹하고 꿈꾸게 만드는 존재다. 그들이 모든 예정조화와 섭리를 깨뜨리고 나타난,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 혹은 운명도 꺾지 못한 천재로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믿기 어려운 기적과도 같은 그들의 운명은 몽상에 빠져 볼 기회를 제공한다. 이처럼 그들의 예외적인 이력은 합리적인 설명의 틀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존재가 재능과 기회의 신화, 요컨대 능력주의(merite) 신화의 살아 있는 증거 자체이다. (…) 현상의 근원을 파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예외적인 운명들의 존재는 한편으로는 각자가 자신의 몫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강화함으로써 도덕주의를 정당화하는 알리바이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질서는 개개인의 자연적 능력들(merites)이 반영된 결과이며 게으름 혹은 우둔함을 정당하게 처벌한다는 믿음을 키운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의 알리바이로 줄곧 사용되어 왔다." (p.55-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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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계급횡단'은 가능할까? : 교육 불평등과 계층 세습
'계급횡단자'에 관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문득 한국의 사정이 궁금해졌습니다. 과거에는 사법시험 등을 통해 개천에서 용 났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발견되었던 것 같은데요. 최근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잘 들려오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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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데이터연구소는 2021년 4월 2일,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유효한지를 '학력 격차'라는 지표를 통해 분석한 자료를 내놓았습니다. 보고서는 성적 최상위 학생 4% 중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하위 25%에 속하는 비율이 2006년 7.5%에서 2018년 6.4%로 감소한다고 보고하였습니다. OECD 평균인 3.6%에 비해 약간 높긴 하지만, 2006년과 비교해 감소하는 추세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자녀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계층 이동성이 점차 제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니까요.
또,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연구도 주목할 만합니다. 2021년 11월 발간된 '조세 재정 브리프-대학 입학 성과에 나타난 교육 기회 불평등과 대입 전형에 대한 연구'에서 연구진은 개인이 타고난 환경요인이 개인의 성취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 보는데요. 연구 결과,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나 출신 등의 환경적 요인과 대학 입학 성과의 기회 불평등 간에는 유의미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가구의 소득 수준이 낮으면 서울에 위치한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할 확률이 최소 70%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편, '교육 불평등'과 관련한 담론이 유독 최상위권 학생들에 관한 내용만을 대표한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최성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엘리트 집단이 재생산되는 것은 분명 문제이지만, 최상위권 대학이 아닌 서울 외 지역에 위치한 대학이나 전문대에 진학하는 하위 80%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 역시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서사가 거의 없는 상황은 중하위 계층의 학생들에게 어떻게 좋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지에 관한 문제의식을 소거해버린다고 지적해요. 이때 그가 주목하는 문제는 단순한 계층 세습이 아니라 '다양성 약화'라는 문제입니다. 앞서 언급한 자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교육을 통한 계층 세습은 분명 문제입니다. 다만, 이 문제만을 '교육 불평등'의 주된 의제로 가져가게 되면, '분리' 현상에 대한 논의가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사회경제적 지위나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어울릴 때(예컨대 주거 분리나 학교 분리 등), 그들이 가진 동질성이 어떤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는지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러면서 라지 체티 미 하버드대 교수의 연구를 예로 드는데요. 이 연구에 따르면, 저소득층 아이들이 고소득층 아이들과 관계를 맺을 때 그렇지 못한 아이들에 비해 높은 사회경제적성취를 이룰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는 계층이 다른 사람들 간의 연결성과 상호작용이 소득 이동성, 더 나아가 평등에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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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너머 자유』 , 김영란 지음 (창비)
얼마 전, 더불어민주연합이 시민사회에 의해 비례대표* 후보로 추천된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을 '병역 기피'를 사유로 공천에서 배제하는 일이 발생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는 2004년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분류하는 징병 신체검사에 저항해 병역을 거부했고, 징역을 선고받아 복역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입니다. 이에 당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는 그를 양심수로 선정하고 석방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죠. 1년 후인 2005년,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8·15 특사로 사면되었고요. '양심적 병역 거부'와 관련하여 헌법재판소는 2018년,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 등의 대안을 두지 않은 병역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대체복무제가 '징벌'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헌법상 기본권 침해(그 중에서도 특히 '양심의 자유'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은 여전한 문제입니다.
오늘 소개할 『판결 너머 자유』는 우리에게 '김영란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김영란 전 대법관의 신간입니다. 그는 2004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 된 이후 6년간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소수자를 배려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해 노력해 '소수자의 대법관'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요. 이번 책에서 김영란 전 대법관은 롤스의 '정의론'이라는 이론적 틀을 바탕으로 소수자들과 관련한 케이스를 여럿 다룹니다. 그 중에서 오늘 들불레터가 다룰 내용은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의 컷오프(공천 배제)* 와 함께 이해해보면 좋은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입니다.
* 정치 토막 상식
1.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각 정당이 자신의 당 후보의 명부를 유권자에게 줍니다. 그러면 유권자들은 정당에 투표를 해요. 이때 정당이 얻은 득표 비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작은 정당의 후보 역시 국민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이 일치되기 때문에 유권자의 의사가 정확하게 반영된다는 점도 주요 장점 중 하나입니다.
2. 컷오프(공천 배제): 컷오프cutoff는 본래 골프 등 스포츠에서 사용되던 말입니다. 일정 수준의 성적이 되지 않은 선수를 탈락시켜 다음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칙인데요. 요즘에는 총선을 앞둔 각 당의 공천 심사에서 일정 수준 이하의 평가를 받은 사람을 배제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3. 더불어민주연합: 2024년 3월 3일 공식 창당한 22대 총선용 범야권 비례위성정당입니다. 더불어민주당과 진보당, 새진보연합이 모여 공동의 비례대표 후보 명부를 30번까지 작성하기로 협의하였습니다. 진보당과 새진보연합은 각각 3명을,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연합정치시민회의는 4명의 후보를 내며 민주당은 20명의 후보를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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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의 벽?
김영란 작가는 괄목할 성취를 거둔 여성 대법관이지만, 동시에 잘 알려진 다독가이기도 합니다. 2021년 창비에서 출간된 『시절의 독서』에 수록된 독서 목록만 봐도 알 수 있죠. 『판결 너머 자유』 역시 독서가로서의 그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프롤로그로 시작되는데요. 프롤로그에서 소개된 작품은 바로 소설가 이청준의 「소문의 벽」입니다. 이 작품은 1971년, 『문학과지성』이라는 문예 잡지를 통해 발표된 글로, 작가 본인이 잡지사의 사정으로 연재 중단을 경험하면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쓴 중편소설입니다.
「소문의 벽」은 액자식 구성의 작품으로, 서술자인 '나'가 소설가 박준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이때 박준이 쓴 총 세 편의 소설이 등장하는데요. 프롤로그에서 김영란 작가가 소개하는 작품은 박준이 쓴 세 번째 소설로, '전짓불 체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짓불은 손전등에서 비치는 불빛을 의미하는 단어인데요. 소설 속의 소설가 박준이 쓴 전짓불 체험은 6.25 전쟁 이후 3개월이 지난 무렵, 권력, 폭력 뒤에 숨은 전짓불에 관한 내용을 다룹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으로 도망칠 길을 잃은 인민군의 일부 낙오 병력은 늦은 밤, 경찰을 사칭하며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언제나 공포에 떨며 지내야 했는데요. 어느 날, 갑자기 창문이 열리면서 방 안 가득 눈도 뜨기 어려울 정도의 강한 손전등 불빛이 비춥니다. 너무 강한 빛 때문에 뒤에 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누구 편이냐'고 묻는 목소리만 들려 옵니다. 이후 소설 속 주인공은 전짓불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전짓불만 비추면 납작 엎드려 숨는 등의 행동을 보입니다.
「소문의 벽」은 삼선개헌 이후 표현의 자유를 억압 당하던 시기의 시대상을 담은 작품입니다. 김영란 작가는 이 작품을 언급하며 이렇게 묻습니다. "이 시대에는 과연 누가 전짓불을 들이대는 것일까" 하고요. '누구 편'인지 묻는 질문이 불시에 들이대어지며 상대방과 같은 편이 아니면 화를 면하기 어려운 시대, 우리는 과연 '전짓불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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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존 롤스의 책들. 왼쪽부터 『정의론』, 『정치적 자유주의』, 『공정으로서의 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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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
저자는 우리가 전짓불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이론적 틀로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거론합니다. 정치적 자유주의란, "합당한 다원주의 사회를 표방하는 입헌민주주의하에서 그에 들어맞는 제도나 원칙, 기준이나 법칙에 적용되는 정치관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롤스의 이론인데요. 그에 따르면, 근대 민주주의 사회란 통일된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이룬 공동체가 아닙니다. 시민 저마다가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미학적으로 심원하고 화해 불가능한 견해의 차이를 가지고 있죠. 이러한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다원적 다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그것이 정치철학의 역할이라고 롤스는 말한 것입니다.
저자는 다원주의가 '합당하게'(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법원에서 발견합니다. 법원은 공적 이성으로 구성된 유일한 정부 부서로, 법 해석을 통해 근본적인 정치적 질문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곳인데요. "법원이 실패하면, 법원은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서게"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원은 공적 이성의 표본으로서 바로 서기 위해 여러 고민을 거쳐야 하는데요. 저자는 법원이 실패하지 않으려면 법률해석에 한계가 있었는지, 공적 이성이 아닌 "비공적 이성"을 활용한 것은 아닌지, 중첩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사안에 대하여 더 고민해보지 않은 건 아닌지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봐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후 다루게 될 몇개의 판결들에 이러한 분석 틀을 적용하여 논의를 펼칩니다.
"다양한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깨닫는 것과 동시에 많은 사안에서 여론의 향방이 극단적인 대결로 치달아서 다양한 목소리의 설 자리는 좁아지는 그런 모순적 상황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 합당한 다원주의 사회란 획일적인 하나의 신념체계만을 인정하는 사회가 아닌 '상반되지만 합당한' 신념체계들이 공존하는 사회를 말한다." - 프롤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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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스의 '기본적 자유'
저자는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롤스의 '기본적 자유'들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롤스가 말한 정의의 두 원칙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롤스는 정의를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라고 규정합니다. 이때 공정성이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올바름, 평등보다 더 좁고 구체적인 개념으로, 롤스는 이러한 '공정성으로서의 정의'에 두 가지 원칙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중 제 1원칙인 평등의 원칙은 더 큰 선(善)을 위해 소수의 자유를 뺏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하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이 보장하는 개인의 기본적 자유로는 선거권과 같은 정치적 자유를 비롯해 양심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이 있습니다.
제 2원칙은 바로 차등의 원칙입니다. 차등의 원칙은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는데요. 첫 번째 조건은 '최소 수혜자 우선성의 원칙'입니다. 이 조건은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허용하되 그 불평등이 최소 수혜 성원들의 최대이익이 되어야만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조건은 '기회 균등의 원칙'인데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기회가 모두에게 개방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야만 공정하다는 내용입니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원칙(평등의 원칙, 차등의 원칙) 중 우선하는 것은 바로 평등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평등의 원칙이 보장하는 기본적 자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자유만 떠올려봐도 그렇죠. 이러한 자유들은 무엇이 우선하여 보장할 것인가를 두고 끊임없이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의 해결을 위해 롤스는 제도적 규칙들이 조율되어 "일관된 자유 체계"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자유의 우선성' 개념을 언급합니다.
자유의 우선성이란 "하나의 기본적 자유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다른 기본적 자유들을 위해서만 제한되거나 거부될 수 있다"는 롤스의 개념입니다. 이때 발생하는 문제는, 과연 어떠한 자유가 어떠한 자유에 대해 제한 또는 거부될 수 있을지를 규정하는 국가의 자유 체계일 것입니다. 김영란은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이나 결정에서 나타난 '기본적 자유들의 우선성'을 살피는 일이 곧 한국 사회에서 확립된 자유 체계에 대한 이해로 이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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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판결 너머 자유』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2018년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다룹니다. 이 사건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현역병입영 통지서를 받고도 종교적 양심을 근거로 입영하지 않은 피고인의 사정이 '병역법 제88조 제1항'의 내용("현역입영 또는 소집 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일이나 소집일부터 다음 각 호의 기간이 지나도 입영하지 아니하거나 소집에 응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는지가 주요 쟁점인 케이스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헌법 제19조의 양심의 자유와 헌법 제39조의 국방의 의무가 충돌하기 때문에 이를 조정해야하는데, 그 조정에 있어 '정당한 사유'라는 법리 해석이 관건이 되는 케이스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법원은 다수의견 8 : 별개의견 1 : 반대의견 4로, 9명이 무죄, 4명이 유죄 결론을 지지했는데요.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다수의견: "피고인의 병역거부는 절박하고 구체적인 양심에 따른 것이며 피고인의 가족이 모두 병역법 위반으로 수감된 사정과 그가 배우자와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도 병역을 거부하게 된 사정을 고려했을 때 피고인에게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별개의견: "국방의 의무는 개인의 양심의 자유보다 우선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에서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한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를 허용하더라도 안보상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니 현역입영을 강제하기보다 다른 처분을 마련하는 것이 좋다."
👩⚖️ 반대의견: "양심표명의 자유는 양심실현의 자유의 일종으로서 상대적 자유에 해당하여 다른 헌법적 법익보다 우선한다고 볼 수 없고,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한 경우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다. 병역의무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국가안보와 국토방위의 헌법적 법익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라는 헌법적 가치도 제대로 보장될 수 없다."
이때, 반대의견에 대해서 병역법의 개정을 기다려야 한다는 흥미로운 보충의견이 제기됩니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 반대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아직 대체복무제에 관한 입법이 되지 않은 단계에서 위헌상태인 병역법의 해석을 통한 대체복무 없는 병역거부의 문제로 보고 이 사건을 해결할 것이 아니라, 개선 입법이 이루어진 후 대체복무와 함께 병역거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정한 양심 여부를 국가가 심사하여 판단한다는 자체가 양심의 자유 침해라고 덧붙였다."(p.155)
이처럼 병역 거부의 문제에 있어 '양심의 자유' 문제는 그 가치를 우선해야할 지 여부부터 진정성을 국가가 인정해주는 것이 맞느냐는 문제까지 광범위하게 논의되어 왔습니다. 저자는 다시 롤스의 이론을 가지고 옵니다. 롤스는 기본적 자유를 위한 두가지 도덕적 능력을 제시합니다. 그 중 첫째가 '합당할 수 있는 능력'이고, 둘째가 '합리적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중 두 번째 능력인 '합리적일 수 있는 능력'은 "각 당사자들이 개인적으로 증진시키고자 하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능력"으로, "스스로의 선을 구상하고 수정하고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관 수립의 능력"입니다. (p.142)
저자는 롤스가 말한 기본적 자유의 조건대로, 양심의 자유 역시 "시민들이 스스로의 선관을 형성하고 수정하며 합리적으로 추구할 수 있도록"하는 자유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국방의 의무와 충돌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인정하되, 국방의 의무를 준수할 대안이 있는지, '반대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처럼 국가가 이를 심사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면 그것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남는다고 덧붙입니다.
앞서 언급한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의 '병역기피'를 이유로 한 컷오프는 이미 양심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고, 대체복무 제도를 승인한 법원의 결정과 달리 양심적 병역거부가 개인의 권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018년,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 없는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여전히 국가는 양심의 진정성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대체복무제'를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 대한 징벌로 적용하고 있고요. 한국의 군대는 안보를 이유로 여러가지 기본적 자유들을 제한하고 있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등 군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역시 오랜 시간 침해받고 있지만, 이에 대한 국가의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죠.
『판결 너머 자유』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을 비롯해 군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사건 등 소수자의 입장에서 판결을 해석하고, 이들을 위해 우리가 세워야 할 정의의 원칙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데요. 합당하지만 상반된 신념들은 과연 공존할 수 있을까요? 응당 통제와 제한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사안들은 과연 공정한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 결정되고 있는 걸까요? 『판결 너머 자유』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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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읽으면 좋은 김영란의 '판결'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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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는 김영란 전 대법관이 재직 당시에 참여했던 주요 판결들을 정리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앞서 다뤘던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은 물론, 호주제 폐지와 관련된 사건, 새만금, 4대강 등 대규모 국책사업과 환경의 가치가 실익을 다툴 때의 논점, 출퇴근 재해에 대한 사회적 합의 등 우리의 일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의미와 파장을 가진 문제들을 두루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판결들은 모두 저자 자신이 다수 또는 소수의견의 편에서 참여했던 것들인데요. 저자는 실무자였던 당시의 상황과 논의를 회고하고, 법 해석이 하나의 가치로 편향, 관철되는 상황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던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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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과 정의》는 김영란 전 대법관이 대법관 퇴임 후에 전원합의체 판결들을 되짚어보며 쓴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성희롱 교수의 해임결정취소소송부터 가습기살균제 사건, 강원랜드 사건, 인혁당 손해배상 사건 등 사법부의 판결이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가진 사건들과 만날 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중요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사법부가 어떠한 선택을 해야하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합니다. 이 책은 김영란 전 대법관이 '정의로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로, 판결이라는 사법부의 '선택'이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할 때, 우리가 놓치게 되는 정의가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함께 되짚어 볼 수 있습니다. 또, 시민으로서 우리가 사회 전반의 통념을 변화시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할 수 있을지, 우리의 행동에 대한 질문도 던지고 있어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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