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0일 발행된 첫 들불레터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S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그녀의 이름은>을 소개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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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0일 첫 레터를 보냈던 들불레터가 어느덧 100화를 맞았습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들불레터를 처음 시작하던 날의 마음을 복기하고자 일기장을 펼쳤어요. 첫 레터를 보내고 난 뒤 일기에는 그 날의 비장하고 두려운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2020년은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불리는 시기인 2015년,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지 5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또, 2020년은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이론, 실천의 방법론 등이 각기 다른 양상을 띠며 서로 부딪히던 해이기도 했는데요. 저는 2020년 5월의 그 날, 제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모두를 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두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봐야겠다. 그리고 그것(우리의 말과 행동들)이 옳든 그르든 잊지 말아야겠다. 이게 아마 내가 들불과 들불레터를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인 것 같다." 이날의 다짐을 꾸준히 실천하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문제들과는 끊임없이 불화했고, 어떤 이론이나 방법론에 고개를 갸웃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것만으로도 저는 제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들불레터 발행을 지속해오면서, '읽기'라는 행위에 대한 발행인으로서의 생각을 묻는 질문을 자주 받아 왔습니다. 저는 '읽기'라는 행위의 위상을 '땅바닥에 쳐박고 싶다'는 과격한 주장을 자주 해 왔는데요. 이 말은 읽는 행위에 가치가 없단 뜻은 아니고요. 우리가 '읽기'를 지나치게 '대단한 것'으로 여길 때, '읽기'는 일상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고상한 행위가 되어버릴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읽기가 하나의 자기계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는 요즘, 우리 모두가 생각해볼만한 지점입니다.
또, '읽는 방법'이란 게 고정되어 있을 때, 그러니까 몇 가지 방법이 '올바른 읽기'의 방식으로 제시될 때 나만의 방식으로 읽기를 해내지 못한다는 것에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요컨대 저는 소설을 만화처럼 읽는 사람입니다. 만화를 읽을 때, 사소한 물건, 인물, 말, 행동 모든 것이 거대한 서사 속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각 컷을 열심히 보게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때에도 저는 캐릭터의 언행, 저자의 의견 등 사소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집요하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다보면 아무리 슬프고 비극적인 소설도 깔깔대며 읽을 부분이 생기고, 웃긴 소설이라도 슬프게 읽게 되기도 합니다. 또, 어려운 주제의 철학 책도 웃고 울며 읽게 되기도 하고요.
유명한 작품일수록 해당 작품을 이해하는 가이드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읽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이 주장은 장르별로 접근이 다르지 않냐는 반박이 제기될 수 있는 주장일텐데요. 저는 사실 '장르'라는 구분도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의견은 나중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설령 그것이 완벽한 오독이더라도, 나에게 의미가 있다면 저는 일단 그것으로 읽기가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완결'을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콘텐츠를 만들고, 북클럽을 기획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완결을 맞고 책을 덮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이야기를 정해진 길에 맞춰 따라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읽기에 대한 또 다른 의견은, 읽기가 곧 기억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제가 한 지면을 통해 동시에 제시되는, 시간성의 경계가 모호한 대표적인 물건이 저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책을 읽고 있는 '나'의 현재가 책에서 제시하는 과거, 미래와 포개어질 때 우리는 우리가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또,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지금의 현재를, 평범하게 돌아올 내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도 갖게 되죠.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읽기는 제가 앞서 언급했던 '개인적이고 일시적인 완결'에서 멈추는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적인 고민과 함께 확장되는 읽기', 즉 '공동체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뻗어나가는 행위가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저는 '기억하는 일' 역시 바로 이러한 '공동체적 읽기'의 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들불레터를 구독해오신 구독자 분들께서도 이러한 믿음을 갖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읽기를 멈추지 않으셨던 거겠죠. '읽기'에는 꼭 책 읽기만 포함되는 게 아니니까, 여러분께서는 들불레터를 읽음으로써 저와 함께 기억을 (재)구성하고, 잊지 않기로 다짐하고, 공동체적 실천을 도모하는 분들입니다. 그리고 제게는 2,000명이 넘는 분들이 기억하는 일에 동참해주고 계시다는 사실이 들불레터를 계속 발행하게 만드는 동력인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들불레터 100화에서는 '기억하는 일'에 대해 짧게 다뤄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신간들은 온라인 서점과 여러 콘텐츠를 통해 충분히 소개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오랜만에 두 권의 구간을 중심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참사의 기억을 헤아려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읽기'와 '기억', '애도'가 만나는 지점을 따라가보며, '지금, 여기'의 문제인 한국 사회의 참사들을 다시금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 보겠습니다.
4년 여의 기간 동안 들불레터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 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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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 마리 지음, 김병구 옮김 (교유서가)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 사건들의 저장소에 보관되어 있던 '사실'을 꺼내어 오는 행위가 아니다. 기억의 재현은 불연속적인 장면들이 선별 혹은 배제되고 때론 억압·왜곡되는 과정의 역학관계를 수반한다." - 이소영(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추천사 중
요즘 정말 많은 콘텐츠가 생산·유통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억압과 폭력의 역사를 과거의 특정 시점 혹은 사건을 통해 재구성하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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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 마리의 『기억·서사』는 바로 이러한 콘텐츠들이 갖는 목표, "특정 사건의 기억을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정확히는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한 발 더 나아가 "'사건'의 기억을 타자와 진정으로 나누어 갖는 형태로 '사건'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이러한 서사가 가능하고 또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묻는 작품이죠.
저자는 먼저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 하나를 꺼내는 일로 서술을 시작합니다. 동네 슈퍼마켓에 진열되어 있는 서양배 주스를 발견하고 15년 전, 이집트 카이로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기억을 떠올린 저자는 하숙집에서 후식으로 나왔던 서양배의 모양과 그로 인해 느꼈던 감상을 떠올립니다. 그러다 아랍어로 서양배를 무어라 불렀던지 생각하게 되는데요. 하숙집 아주머니가 음식물의 이름을 아랍어로 외쳐주시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며 저자는 기억의 밑바닥까지 계속해서 더듬어봅니다. 그래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결국 떠올리길 포기하고 슈퍼에서 주스를 사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온 저자는 차갑게 식힌 주스를 한 모금 들이키는데요. 그때, 슈퍼에서는 떠올리지 않던 '코메에토라아(서양배)'라는 낱말이 돌연 떠오릅니다. 15년 전, 불과 몇 차례만 들었을 뿐인 그 단어가 일종의 감각처럼 몸 속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놀란 저자는 이 낱말 뒤로 떠오르는 카이로의 광경에 더욱 놀랍니다. "먼지와 한여름날 매섭게 내리쬐는 햇볕, 타하릴광장, 뒤섞여 울리는 자동차 경적소리, 사람들이 지르는 고함소리(...)"(p.27)를 생생하게 떠올리며 그는 홀로 카이로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고양감과 불안까지도 일순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자신이 겪은 '서양배 경험'을 통해 기억에 대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것이라는 사실(...) 기억―또는 기억이 매개하는 사건―은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에게 찾아온다. 여기에서 주체는 바로 '기억'이다. (...) '기억'이란 때때로 나에게는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의 신체에 습격해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건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다면 기억의 회귀란 근원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것이 된다." (p.29)
오카 마리는 '플래시백'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과거 일본군에게 끌려가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한 여성의 일화, '위안소'에서 탈출을 계획한 다른 여성이 붙잡혀 불에 태워지는 것을 본 이후로 그 여성은 불에 굽는 고기냄새를 맡으면 그 날의 사건이 떠오르기 때문에 불에 익힌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때, 그 여성이 '떠올린다'고 말한 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저자는 이를 "기억에 매개된 폭력적인 사건이 지금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 자기 자신이 그 당시 마음과 신체로 느꼈던 모든 감정, 감각과 함께 내팽개쳐진 채 그 폭력에 노출되는 경험"(p.30)인 '플래시백' 현상으로 해석합니다. 그 여성이 떠올리는 기억은 과거 친구가 죽음에 놓였던 고통스러운 사실뿐 아니라 "그녀 자신이 끊임없이 겪어야만 했던 폭력적인 사건 전체"가 5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생생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죠.
이때 오카 마리가 주목하는 것은 사건이 과연 '말'로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저자의 '서양배 경험', '위안부'에 끌려갔던 여성의 '고기냄새'와 기억의 연계성 등으로 미루어볼 때 사건이라는 게 단지 언어만을 통해 '사건'으로 구성되고 존재될 수 있느냐는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말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렇게 만능인 것일까. 무슨 일인가를 말하려 할 때―그리고 그것이 무언가 근원적인 경험일수록―우리가 먼저 느낄 수밖에 없는 사실은 오히려 언어가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건인지 자기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기성의 언어, 기성의 말로 잘라낼 때 무언가 어색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가. 사건이 우리가 가진 말의 윤곽에 꿰맞추어져 잘려나갈 때 우리는 말로 이야기된 사건이 사건 자체보다도 어딘가 축소되어버린 듯하고 어딘가 어긋난 듯한 느낌을 받은 적 없었는가." (p.32)
물론 과거의 일은 '경험'으로서 말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지점은 바로 "폭력이 만일 현재형으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 경우입니다. 우리가 폭력의 한가운데에 놓여있을 때,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사건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을 때 과연 그것이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건'이 되는가에 대한 문제인 셈이죠.
이제 저자는 소설, 영화, 르포르타주 등 다양한 서사를 통해 사회가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을 나누는지에 주목합니다. 또, 이러한 비평을 통해 '사건' 그 자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어 가질 수 있을지, 기억을 나누어 갖는 일에 대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죠. 앞서 저자는 언어화한 사건이 갖는 한계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언어화한 사건은 '사건의 잉여'를 만들기 때문에 기억을 표상할 수 없는 문제를 갖는다고 말했죠. 그럼에도 저자는 이러한 '불가능성'이 내포하는 '가능성'을 집요하게 고민함으로써 타자와 기억을 나누는 일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집단적 기억, 역사의 언설을 구성하는 이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 곧 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면 ‘사건’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린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린다. 그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존재는 타자의 기억 저편, ‘세계’의 외부로 밀려나 역사에서 잊힌다." (p.111)
오카 마리는 우리가 사건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증언이 힘든 피해자들을 대신해 증언하고 재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다만, 서사라는 것이 (언어의 한계 때문에) 완결성을 갖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사건의 잉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드러내보이는 방식으로 사건에 대해 말해야한다고 지적하죠. 오카 마리의 『기억·서사』는 우리에게 '윤리적으로 사건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나누는 일'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기억을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사건을 구성하는 개별성에 주목하는 일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언어화된 사건 속에 발생하는 '틈'들을 메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요. 그러기 위해서는 당사자와 주변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번에 시사IN에서 기획한 〈세월호 10년, 100명의 기억〉을 읽으며 이러한 생각을 보다 더 깊이있게 사유해보게 되었어요. 여러분도 시사IN의 이야기와 『기억·서사』를 읽으며, 기억을 나누어 갖기 위해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지점이 어디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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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앤 디디온 지음, 김재성 옮김 (뮤진트리)
이 책은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조앤 디디온의 회고록으로, 딸 퀸타나 루 던이 39세에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한 후의 상실감에 대해 집필한 작품입니다. 제가 이 책을 소개하게 된 계기는 문학동네 118호(2024.봄)에 실린 진은영의 글, 「이토록 보잘것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조앤 디디온은 딸이 태어난 뒤로는 한 번도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다. 수영장, 고압선, 싱크대 밑의 잿물, 약장의 아스피린, (...) 취재를 위해 어린 딸을 데리고 머물러야 했던 호텔의 빈 복도까지 모든 게 두려웠다. "두려움의 원천은 명백했다. 그 아이에게 닥칠 수 있는 위해였다." 딸을 갑작스러운 병으로 잃고 나서 디디온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지 묻는다. 그것은 "보호할 수 없는 것을 보호하겠노라 맹세하는 수수께끼"를 갖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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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인 '푸른 밤'은 "어떤 위도에 위치한 지대"에 하지를 전후한 기간에 찾아오는 "해질녘 어스름이 길고 푸르러지는" 몇 주간의 시간입니다. 디디온에 의하면 푸른 밤이 찾아오는 순간, 한기가 훅 끼치며 여름이 이미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요. 디디온은 '푸른 밤'이라는 시간적 환기를 통해 노화와 질환, 그리고 딸 퀸타나를 그리워하는 시간을 보여줍니다.
디디온은 퀸타나의 죽음을 '자신이 좋은 부모였는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목격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목격한 수많은 죽음들도 떠올려요. 이러한 죽음들 사이에서 디디온은 딸 퀸타나의 죽음에 초연해지고자 노력합니다. 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의연한 태도로 받아들이려 애쓰죠. 그러나 디디온은 번번이 딸의 죽음을, 자신이 경험한 상실을 '극복'하는데 실패합니다.
"몇 주 후면 그 아이가 죽은 지 5년이 된다. 이제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생각할 수는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의 이름을 듣고서 울지 않는다. 그러니 아직도 나는 그 아이가 곁에 필요하다. 그 아이의 존재 대신에 서재의 테이블 위에 놓인, 모두 그 아이가 내게 준, 책들을 들춰본다."
조앤 디디온은 한 해에 남편과 딸을 동시에 잃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난 뒤 쓴 작품이 얼마전 출간된 『상실』입니다.) 디디온은 두 차례의 집필 활동을 통해 기억하고, 애도하고, 상실에 익숙해지는 작업을 거칩니다. 그는 『푸른 밤』을 쓰는 동안 딸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하죠. 그래서 책을 다 쓰고 난 뒤 디디온은 '영원한 이별을 마주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오늘 한겨레 특집 기사 〈왜 '가만히 있으라'했는지 엄마는 10년 지나도 답을 듣지 못했다〉를 읽으며 저는 조앤 디디온의 글을 떠올렸습니다. 이 기사는 세월호참사가족인 김정해씨와 동행하며, 그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 기사인데요. 디디온처럼, 김정해씨 역시 아들에게 더 해주지 못했던 자신의 부모됨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래서 마음이 아팠고 한편으로는 왜 잘못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심하거나 자신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끊임없는 자기의심과 질문 속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하는건지 분통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조앤 디디온이나 김정해씨가 느낄, 부모가 가질 상실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들이 경험한 상실과 고통, 괴로움과 울분에 조금이나마 접속해볼 순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의 글과 말을 놓치지 않는,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말이죠.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계속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그 이야기를 밖으로 알리며 직간접적으로 그들과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는 것. 그러니까 '읽기'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인 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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