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고) 들불 X 생각의힘 특집호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수전 니먼 (생각의힘)
▪️ 들어가며: '워크'란 무엇인가
▪️ 정체성 정치 비판: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난 가장 끔찍한 일로 규정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가?"
- 『정체성 정치와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 정진희
- 『오인된 정체성』, 아사드 하이더
- 『정체성과 폭력』, 아마르티아 센
▪️ 부족주의: 공통의 정체성으로 모인 자들이 은폐하는 건 무엇일까?
- 『정치적 부족주의』, 에이미 추아
- 『부족의 시대』, 미셸 마페졸리
- 『부족국가 대한민국』, 강준만
▪️ 보편주의: "모든 특수성을 갖춤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보편성"
▪️ 나가며: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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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들불입니다. 김영사와 함께한 『자궁 이야기』 특집호에 이어 세 번째 특집호로 돌아왔습니다. 이번 특집호에서는 수전 니먼의 책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를 중심으로, 책에서 논의하는 몇 가지 키워드와 함께 읽으면 좋은 도서들을 큐레이션해보려고 합니다. 총선 이후 '진보'의 현재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거대 양당 구도가 더욱 강화되고 진보정당들이 무너지면서 한국의 진보가 답보 혹은 후퇴 상태라는 불길한 분석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에 '좌파' 진영에서는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수전 니먼은 '좌파' 진영에 도발적이지만 지금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지며 진보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는 논쟁적인 작품입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정체성 정치'가 유효한 운동의 전략으로 채택되어 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수전 니먼이 '정체성 정치'를 '부족주의'라는 틀로 규정하며 비판하는 지점에서 독자와 부딪히는, 유의미한 긴장이 발생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그렇기 때문에 토론에 적합한 책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함께 읽는 독자 간에도 동의, 비판이 지점이 분명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이 책의 모든 관점에 동의하지 않고, 또 함께 소개해드리는 도서의 내용에도 일부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급진적인 저자의 주장을 통해 우리가 가진 정치적·인지적 편향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들불레터 읽어보시고, 이 책이 전하는 통쾌함과 묘한 반발심 모두를 경험해보세요. 그리고 각자의 마음에 피어 오른 불씨를 토대로 동료들과 토론을 시작해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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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성 정치 비판: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난 가장 끔찍한 일로 규정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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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워크'란 무엇인가
'워크'(woke)라는 단어는 "깨어 있으라stay woke"라는 노래 구절에서 등장한 '깨어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가수 레드 벨리Leadbelly의 노래 〈스코츠보로 소년들Scottsboro Boys〉에 처음 등장한 단어죠. 수전 니먼에 의하면, '워크'는 "불의에 맞서 깨어 있고, 차별의 여러 증후를 언제나 감시할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워크는 "남용과 오용의 용어로 완전히 바뀌어버렸"는데요. 저자는 '워크'를 사용하는 방식이 이처럼 변화한 것에 대해 우려와 공포를 드러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워크'의 변질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 저자가 제시한 세 가지 사례를 소개해볼게요.
1️⃣ 젊은 흑인 시인 아만다 고먼Amanda Gorman은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신의 시를 읽은 일로 국제적으로 크게 알려지게 됩니다. 이후 여러 출판사들이 그의 저작을 번역·출간하기 위해 저작권 계약을 맺게 됐죠. 이 과정에서 고먼은 네덜란드어본의 번역자로 "네덜란드의 논바이너리 백인 작가"를 추천합니다. 그가 부커상을 수상한 작가였고, 고먼은 그의 경력을 추앙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네덜란드의 한 흑인 패션 블로거가 "고먼의 작품은 흑인 여성만이 번역해야 한다"는 글을 올렸고, 이에 백인 작가가 일을 그만두게 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일은 유럽 전역에서 큰 이슈가 되어 카탈루냐어본, 스웨덴어본, 덴마크어본, 독일어본의 번역자를 구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2️⃣ 독일의 한 출판사가 신간 서적 홍보를 위해 "이 책은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해줄 것입니다."라는 문구를 기재했습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썼다"는 이유로 공격을 했고, 출판사는 광고를 내려야만 했습니다.
3️⃣ 다수의 워크주의자들이 이스라엘 국민에 대한 하마스의 학살을 "점령에 대한 저항",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평가한 일이 있었습니다. "점령자들"로 지목된 이들 중 다수의 이스라엘인이 가자 지구의 이웃을 돕고, 평화를 일구고자 노력해온 사람들이었는데도, '이스라엘'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살해 당해 마땅하다는 듯 말이죠.
사실 위와 같은 사례들은 한국에서도 익숙하게 목격됩니다. 또, 혐오주의자들이 유사한 사례들을 들어 '과도한 PC주의'가 문제라며 강한 비판을 가하는데 이용한 논리이기도 하고요. 저는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책에 담긴 논리가 이 책의 문제의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혐오주의자 혹은 우파에 의해 진영 논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려스러웠어요.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리버럴과 좌파 쪽에서 먼저 워크의 과도한 행태를 명확히 문제 삼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의 정치적 입지 자체가 계속해서 모호한 채로 남게 된다. (...) 그들의 침묵이 계속된다면, 정치적 지향성이 분명치 않은 이들 모두가 결국에는 우파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p.18) 저자의 주장을 듣고 나니, 그가 '워크'를 비판하는 구체적인 근거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지는데요. 그가 '워크'의 어떤 부분을 비판했는지, 이제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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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성 정치 비판: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난 가장 끔찍한 일로 규정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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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니먼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의 2장 「보편주의와 부족주의」에서 오늘날 '정체성', '고통', '피해자성'을 토대로 결속된 '부족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하며, "차이를 인정하면서 또 그것을 통해 배우게 되는 보편성"을 가진 '보편주의'의 길로 나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부족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체성 정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부족주의'가 '정체성 정치'와 구분되는 지점은 어디일까요? 또, 이와 반대되는 '보편주의'는 어떠한 정치적 관점을 취하는 입장일까요? 여러 저서들을 경유하여 수전 니먼의 주장을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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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니먼은 부족주의를 설명하기에 앞서 '정체성 정치'에 관해 먼저 이야기합니다. 정체성 정치란, 집단 정체성(인종, 젠더 등)을 기반으로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사상을 의미합니다. 『정체성 정치와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을 쓴 저자 정진희는 "차별에 맞서 특정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뭉치자고 호소하는 것"을 정체성 정치의 기본 형태로 보고, "서구에서는 1970년대 말 이후, 한국에서는 1990년대 이후 여러 차별 반대 운동에서 유력"해졌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 좌파 대부분이 정체성 정치를 이래저래 받아들였다"고 분석합니다. 『정치적 부족주의』의 저자 에이미 추아는 더 나아가 "미국 정치는 늘 정체성 정치"였다고 평하는데요. 이를 토대로 생각해본다면 '정체성 정치'는 좌파가 채택해온 오랜 흐름으로 보입니다.
수전 니먼은 우리 모두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진다고 이야기하며, 철학자 콰메 앤서니 아피아의 말을 인용합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인종, 성별, 계급, 국적, 종교, 지역 따위를 언급하는 법이 없었다."(p.41에서 재인용)
위 인용구는 지금 우리가 가진 여러 정체성 중 어떤 정체성이 "늘" 그리고 "더욱 본질적"인지에 대한 질문을 남깁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자신을 소개할 때 내세우는 정체성, 그것만으로 '나'를 전부 포괄할 수 없다는 점, 정체성이란 '이동'하는 특성을 가진다는 점 등을 짚어냅니다.
수전 니먼이 인용한 역사가 벤자민 자카리아의 말은 더욱 직관적입니다.
"예전에는 특정한 본질로 사람들을 규정하는 행위가 모욕적이며, 어리석고, 반자유주의적이며, 반진보적인 행동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남들이 내게 그렇게 할 때만 문제가 될 뿐이다. 자신을 스스로 하나의 본질로 규정하고 또 하나의 정형화된 스테레오타입으로 규정하는 행동은 용납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력을 강화하는 행동으로 여겨지고 있다." (p.43에서 재인용)
수전 니먼은 '정체성 정치'가 "우리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깎아내고" 단 두 가지(인종, 젠더)로 만족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말은 요컨대 흑인 여성 한 명을 권력의 자리에 앉히는 것만이 사회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과 같은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그저 권력 구조에 참여하는 개인의 인종 및 젠더 다양성만 증진시킨다면 오히려 더욱 강력한 억압 시스템이 나타날 뿐이다. (...) 캐나다의 코미디언 라이언 롱은 (...) 길가에 나가 다양한 행인을 붙잡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해외 심문 하청업자들(CIA 고문 기술자를 부르는 용어)의 구성에 있어서도 인종과 젠더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까요?"" (p.44-45)
수전 니먼의 비판과 유사한 입장은 한국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정체성 정치와 남녀 대립적 페미니즘』을 쓴 정진희는 정체성 정치가 가지는 배타성에 주목하면서, "차별의 위계를 설정하며 도덕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운동을 더욱 분열시키는 경향"을 가지는 기존 정체성 정치의 부정적 효과를 짚습니다.
또, 정체성을 주제로 한 여섯 차례의 강의 내용을 실은 아마르티아 센의 『정체성과 폭력』에서도 이러한 정체성 정치의 문제를 짚어 냅니다. 그는 하나의 정체성에 근거해 자신과 타인을 바라볼 때 다양성, 다원성을 가진 존재가 끔찍하게 축소되고 만다고 지적합니다. 이어 그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갈등이 "선택 불가능한 독보적인 정체성"이라는 "환영과 허상"을 통해 유지된다고 주장하죠.
"인간의 정체성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단일의 것이라는 주장은 단지 암시적이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존재를 축소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더욱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하나의 분류 범주만 부각됨으로써 생겨나는 편 가르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식의 비현실적인 주장은 그 방안이 절대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저항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격렬한 분열의 선, 단 하나의 굳어진 선에 반대해 작동하며 서로를 넘나드는 정체성의 다원성에 이 혼란한 세상에서 화합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이다." (p.53, 『정체성과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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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니먼이 생각하는 정체성 정치의 또 다른 문제점은, "역사의 주체를 희생자에 둔다"는 데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지금의 정체성 정치는 피해자성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는 피해자성이 하나의 지위를 보장하는 특성 혹은 당연하게 인정을 요구할 수 있는 화폐와 같은 권리가 된 데 우려를 표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제 지위 상승이나 인정을 위해 '누가 더 피해를 입었는가'를 놓고 "피해자 배틀"을 다투고, 고통을 겪는 일 자체를 "미덕으로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던 작가 장 아메리의 『정신의 한계에서At the Mind's Limits』를 들어 뒷받침합니다. 장 아메리는 독일 나치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 건립에 반대하며, "희생자라는 것 자체는 명예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수전 니먼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무시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려 하는 사회적 변화는 '도덕적 진보'의 신호탄을 쏜 분명한 성취이지만, 피해자가 '인정'을 요구한다는 말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지식을 '지혜'라고 한다면,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아무 지혜도 얻지 못했다. (...)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우슈비츠에서 우리가 더 나아지고, 더 사람다워지고, 윤리적으로 더 성숙해진 게 있다는 말은 온통 거짓말이다. 비인간화된 사람이 온갖 행동과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관찰하게 되면, 오히려 인간이 존엄성을 갖고 태어난 존재라는 생각만 뿌리부터 의심스러워진다."(p.50에서 재인용)
수전 니먼은 이어 철학자 올루페이 타이워의 주장을 인용합니다.
"고통은 그 연원이 억압이든 다른 것이든 형편없는 스승이다. 사람은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편파적이고, 근시안적이며, 오직 자기에만 몰두하는 존재가 된다. 고통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하는 정치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 억압은 사람을 깨우쳐주는 예비 학교와 같은 것이 아니다."(p.51에서 재인용)
피해자가 '인정'을 요구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오인된 정체성』을 쓴 파키스탄계 미국인인 아사드 하이더 역시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초기의 정체성 정치가 "혁명적인 정치적 실천을 이론화"한데 비해, 현대의 정체성 정치는 "인정에 대한 개인의 요구에 근거하며, 그 개인의 정체성을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 정치가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강화하고,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대항하는 집단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인정을 획득하는 것으로 환원"하는 문제를 가진다고 지적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오히려 비판하고자 했던 바로 그 규범들을 강화하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수전 니먼은 '고통', '피해자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정치적 권위의 필연적인 원천으로 승격시키는 '무력감의 경험'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세상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어떤 일을 했는가"라고 주장합니다. 아메리의 주장을 들어 "희생자가 되는 것이 미덕이 아님"을 이야기하며 저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일어난 가장 끔찍한 일로 규정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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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족주의: 공통의 정체성으로 모인 자들이 은폐하는 건 무엇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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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니먼은 정체성 정치가 제기하는 여러 문제들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제 그 용어가 오염되어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때 저자는 '부족주의'라는 단어로 세계의 현재를 이해해보자고 제안해요. 그는 부족주의를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자기들 종족과 나머지 모든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인간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란 상태가 야기되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 정의합니다. 그는 부족주의가 정체성 정치가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 즉 '야만성'을 포함하고 있다며 이 말이 보다 더 정확하다고 주장합니다.
'부족주의'에 대해서는 미셸 마페졸리의 『부족의 시대』, 에이미 추아의 책 『정치적 부족주의』를 통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할게요. 『부족의 시대』는 1988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의 작품으로, 전 세계적으로 읽힌 그의 대표작입니다. 마페졸리는 포스트모던 대중사회를 '부족'이라는 개념틀로 바라봅니다. 그는 개인이 중요한 단위였던 근대에서 개인이 소집단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부족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합니다. 수전 니먼이 부족주의에 부정적 입장을 취한 반면, 마페졸리는 “다양한 형태의 대중 속에는 사회 분석가들이 습관적으로 표명하는 동일성의 명령과 예측에서 벗어나는 수많은 소집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부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지금-여기'의 대중적 관점에 주목합니다. 또, 수전 니먼이 부족주의의 야만성을 강력하게 비판했다면, 마페졸리는 야만이 "인간의 온기를 유발하는 계기"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근대적 보편주의, 계몽주의의 보편주의, 승리를 구가하는 서양의 보편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보편주의란 사실상 특수한 자민족중심주의의 일반화일 뿐이다. 세계의 조그마한 지역의 가치들이 모두에게 유효한 모델처럼 확대 적용된 것이다. 부족주의는 경험적으로 어떤 장소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이 소속감은 모든 사회적 삶의 본질적 토대이다." (p.20, 『부족의 시대』)
이에 반해 에이미 추아는 자신의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으며, 이는 소속뿐 아니라 배제 본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지적합니다. 이때 그가 '배제'의 사례로 드는 게 바로 미국 월스트리트를 휩쓸었던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입니다. 그는 이 운동이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기획, 조직되었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말하며 농촌 지역의 한 학생의 말을 인용합니다.
"내가 보기에, 저항 운동이라는 건 거의 대부분 엘리트 계층의 지위 상징인 것 같다. (...) 엘리트 계층이 가난한 우리를 대신해 저항에 나서준다고 할 때, 우리가 보기에는 도움이 안 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또 하나의 '밈meme'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도 자존심이 있고, 그들의 자아 고결성을 입증하는 데 소품으로 쓰이고 싶지 않다."(『정치적 부족주의』 중)
에이미 추아가 보기에 '점령하라' 운동이 부족 정체성을 가진 미국 엘리트 계층 간 '동일시'에만 집중한 결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 형성되고 있던 "반기득권 정체성"을 놓쳤다고 분석합니다. '반기득권 정체성'은 저소득층 미국인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트럼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수준에 이르게 만들었죠. 그가 보기에 부족 정치는 '집단 표식'을 필요로 하는데, 엘리트 계층은 이러한 표식에 있어 미학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엘리트들이 보기에 '애국심'은 전혀 미학적이지 않은, 조잡하고 촌스러운 취향이며 이러한 관점은 트럼프가 대선 때 사용한 구호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한심스럽게 보는 시선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시한 애국적인 구호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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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니먼 역시 진보주의자들이 정체성 정치를 지지하고, 부족적 이해관계에 부합할 것을 운동의 주요 목표로 삼은 것이 트럼프 당선이라는 결과를 낳은 주범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관점이 놓치고 있는 지점을 포착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이하 BLM 운동)" 운동을 언급합니다.
초기 BLM 운동은 백인 시위자가 54퍼센트에 달할 정도로 참여자 인종 구성도 다양했고, 그 혁명의 밑바닥에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선언이 깔려 있는 보편주의적 시위였습니다. 그러나 인종주의 우파뿐 아니라 반세기 전 민권운동 조직이었던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가 그랬듯 "백인 성원"을 축출하는 데 무게를 실으며, BLM 운동을 '정체성 정치'의 한 사례로 만들어버립니다. 이후 BLM 운동은 초기의 보편주의적 성격을 거의 잃어 버립니다.
"2020년 가을이 되면, 보편주의적 입장에서 BLM 운동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거의 사라져버린다. 어떤 이들은 이 운동이 모두의 공통된 이상을 대표하는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아예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백인 동맹자들은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뿐, 그게 다라는 것이었다. (...)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를 외쳤던 백인들의 경우 과연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길거리로 쏟아져 나올 만한 무슨 자기이익이 있었던 것일까? 이는 동맹이 아니라 보편적 정의에 대한 신념과 책임감이었다." (p.72-73)
수전 니먼은 이어 사상가 세키-오투와 프란츠 파농의 주장을 인용합니다. 이들은 부족주의에 반대하고 보편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자들인데요. 그들의 주장을 일부 소개해보겠습니다.
"'인종'은 우리 인지의 지평을 가로막고, 인간 존재와 사회적 존재에 대한 다른 근본적인 질문에 쏟아야 할 관심을 호도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종이 아닌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야 한다. 인종주의 문화의 지배가 하나의 세계 체제로서 이루어진 이 세상을 지금이라도 끝장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 할 질문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세키-오투, p.105~106에서 재인용)
"(...) 파농이 보편주의를 전투적으로 옹호했던 이유는 그가 서구가 자신들 것이라고 우기는 개인주의 사상을 지지했던 이유와 동일하다고 한다. 인종주의 시스템이라는 것은 인간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인 동시에 개인의 인격적 개성도 부인하는 것이므로, 인종주의 시스템을 해체할 것을 자신의 신조로 삼은 파농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p.108)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요? 강준만은 2021년에 펴낸 『부족국가 대한민국』에서 이른바 '진보' 정권에서 기승을 부렸던 부족주의를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는 '선한 권력'으로 포장된 부족주의가 어떻게 진보 정권의 위선과 무능을 가렸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는 에이미 추아가 “부족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집단이 헌신하는 목표에 유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어서 현실을 대대적으로 왜곡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며, 한국에서 성행 중인 '진보 부족주의'가 자기 부족에 대한 유불리만을 따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한국의 정치적 부족주의를 "내로남불1)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정치적 이념"으로 정의합니다. 그리고 '패거리(부족)'의 이익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족주의가 '유체이탈'의 모습으로 행해지고 있음에 유감을 표하죠.
1)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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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주의: "모든 특수성을 갖춤을 통해 더욱 풍요로워지는 보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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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니먼은 인종적, 젠더적 범주와 같은 '부족적 특성'이 아닌 보편을 추구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노예제, 식민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논리"가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라는 질문에서 구체화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비인간화로 내몰린 자들이 자신도 인간이라고 호소하는 것이 억압에 대응하기 위한 보편적 형식이라고 덧붙이죠. 또, 저자는 '문화적 전유'에 있어 보편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는데요. 그는 문화적 전유를 금지하는 주장에 "문화적 순수성 따위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이는 어떤 사물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문화에다가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 자체도 문제"라고 항변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문화적 전유'는 '문화적 도용'이라 불리며 큰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K-POP 산업에서 문화적 전유의 방식을 자주 지적해왔어요.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에 힌두교 신 가네샤 상이 바닥에 놓여 있었던 것, 유아가 솔로 앨범에서 에스닉 복장을 입고 있던 것 등 논란이 크게 일었죠. 위 사례는 문화권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수전 니먼의 주장을 일대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전 니먼의 주장대로 다른 구성원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서 '문화적 전유'를 시도한다면, '문화적 전유'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시작될 지도 모릅니다.
"문화를 부족의 소유로 이해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워크의 주장은 독일 음악은 오로지 아리아족만이 연주해야 한다는 나치의 주장 혹은 이른바 서양 문화라는 것을 다른 문명에 의한 파괴 위협에 맞서 지켜내야 한다는 사무엘 헌팅턴의 주장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문화적 전유를 검열하고 막는 것은 문화가 가진 힘을 파괴하는 것이다." (p.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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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들불레터에서 소개한 내용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수전 니먼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이 책의 출발점이기도 한) '계몽주의'(18세기 말, 프랑스를 기점으로 유럽 전역에 유행했던 문화적, 철학적, 문학적, 지적 사조)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해소하기 위해 20세기의 두 거장 미셸 푸코와 카를 슈미트를 비판합니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진보에 대한 개념을 축소하고 훼손한" 장본인인데요. 이때 등장하는 문제의식이 '워크'를 구성하는 '이론'에 대한 것입니다.
니먼은 '워크'가 모호하고 이해가 어려운 '이론Thoery'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실천적 담론에서 밀려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들이 '워크'를 구성함으로써 일종의 '우월성'을 갖게 되었다고 덧붙여요.
"영어에서는 이론theory이라는 말이 이렇게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모호한 개념이지만,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 때문에 유행의 최첨단을 선도하는 것이 되었고 급기야 새로운 패션 라인이 출시될 때도 사용되는 실정이다. (...) 주디스 버틀러나 호미 바바의 난해한 책들을 해독하느라 몇 년씩 고생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제 우리는 모두 이 이론의 거대한 영향력 안에 놓이게 되었다. 이 이론의 여러 전제가 우리 문화 전체에 깊숙이 파고든 상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전제들은 마치 증명할 필요도 없는 자명한 진리인 양 이야기되고는 하므로, 우리는 이 이론의 영향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p.25)
그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 두 거장이 중심이 된 '워크'를 비판하고, '이론'이 워크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되짚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분량상 생략하게 되었는데요. 푸코, 슈미트는 여러 작품들에서 빈번하게 인용되는 사상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비판이 궁금하신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자세한 내용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에서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수전 니먼은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일관성있게 밀고 나가며 좌파의 자리를 차지한 '변질된' 워크를 비판합니다. 그는 좌파의 길이 진보에 대한 가능성을 믿고 희망을 가지는 것, 계속해서 정의를 탐색하며 확장해나가는 실천이라고 말하는데요. 좌절하는 기색 없이 진보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그의 힘 있는 주장에서 저도 여러모로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또, 익숙하게 바라보던 정치의 풍경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고요. 이 책은 특히 독서모임에서 읽으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들어가는 글에서 말씀드렸듯, 정치적 당파성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는 지점들이 있거든요. 여러분도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를 통해 좌파의 철학적 이상을 살펴보고, 그의 급진적인 관점에서 토론할 거리를 찾아 동료, 친구들과 토론을 시작해보세요. 우리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사회가 다시 흔들리기 시작할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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