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들불입니다.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들불에서 새롭게 진행되는 프로그램들을 소개하고,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를 통해 '신여성'이라는 현상을 살펴 봅니다. 오늘 레터는 발행인의 건강상 이유로 평소보다 분량이 짧습니다. 이 점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건강 회복 후에 '케이팝 하는 여자들' 특집호로 다시 돌아올게요! 뒤숭숭한 계절, 모두 몸과 마음의 건강 잘 살피시길 바랍니다 💌
📚 들불의 새로운 소식들
- 본격 투쟁을 위한 슬픔의 근원 찾기
-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
- 들불 특별 강연: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착취, 무엇이 문제인가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김명임·김민숙·김연숙·문경연·박지영·손유경·이희경·전미경·허보윤 지음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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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 투쟁을 위한 슬픔의 근원 찾기 (feat. 아도르노)
들불에서 아도르노의 저작을 통해 자본주의 산업사회와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소외된 개별 실존으로서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좋은 시설을 갖춘 고액의 산후조리원에 몸을 누이는 일, ‘아름답고 완벽한 엄마’를 수행하기 위해 애쓰는 길, 보상 중심의 국가 정책 사이에서 떠도는 몸들… 그 사이에서 숭고한 결핍과 본질적 욕구를 바로 보기 위해 아도르노를 펼쳐 보려고 합니다.
출산 및 양육을 경험하신 분이나 앞으로 경험할 예정인 분, 미정이지만 간접 체험해보고 싶은 분, 이 문화를 둘러싼 모든 말들이 의심스러운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겠습니다.
* 일시: 9월 22일부터 4주간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오후 1시
* 방식: 온라인(줌)
* 이끔이: 김호경 (《플레이리스트: 음악 듣는 몸》, 《아무튼, 클래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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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 🎵
<케이팝 하는 여자들>은 케이팝 소비자의 대부분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케이팝 산업 및 문화에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여성의 발화와 이를 통한 영향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시작한 모임입니다.
2024년 9월, 들불에서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를 개최합니다. 케이팝을 향유하며 물음표로 남은 질문들의 해답을 함께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볼 예정입니다.
건강한 케이팝 문화를 위한 고민을 ‘케이팝 하는 여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 드립니다!
* 일시
◦ Week 1. 2024. 09. 21(토) 오후 1시 ~ 4시
◦ Week 2. 2024. 09. 28 (토) 오후 1시 ~ 4시
* 방식
온라인(줌)/오프라인(홍대 플랫폼P)
* 주최: 들불, 유유히
* 기획: 들불(구구), 케이팝 하는 여자들(유진)
* 디자인: 스튜디오 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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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불 특별 강연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착취, 무엇이 문제인가
들불에서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착취’ 문제와 관련하여 특별 강연을 준비했습니다. 딥페이크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에 따른 현재까지의 피해 상황은 물론, 고발, 수사와 관련한 사항을 당사자와 변호사의 목소리를 통해 이해해 봅니다. 또, 동료 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 일시: 9월 7일 토요일 오후 8~10시 (120분)
∗ 온라인 진행
* 모집 마감: 오늘(9/4, 수) 23:59:59
∗ 참가비: 5,000원부터 (참가비는 활동 지원을 위해 연사 세 분께 전액 지급됩니다)
∗ 강연자 - 원은지 (추척단불꽃, 반성착취 활동가) - 루마 (서울대 딥페이크 성착취 피해자) - 정명화 (공동법률사무소 이채 변호사, 서울대 딥페이크 성착취 사건 법률대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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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는 '신여성'을 키워드로 만들어진 잡지 《신여성》을 둘러싼 긴장과 갈등을 해부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제가 《신여성》을 알게 된 계기를 잠시 이야기 해볼게요. 저는 《신여성》을 나혜석의 그림으로 처음 알았는데요.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여성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잘 알려진 나혜석이 《신여성》에 만평을 실었더라고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신여성, 저것이 무엇인고〉(아래 이미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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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만난 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한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에서였는데요. 이 작품에서 도포를 입은 남성 둘은 바이올린 가방을 든 신여성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계집'의 건방짐에 혀를 차는 한편, '맵시가 동동'난다며 관심을 갈구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만평을 통해 보여지는 당대 남성의 이중적인 모습은 《신여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여성혐오적 잣대를 가진 남성 관습을 비판하는 과정이 아닌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태도로 드러났다는데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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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어떤 책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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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의 필진 대부분은 남성으로, 그들은 여성을 '계몽'하겠다는 미명 아래 잡지를 만들어 갔습니다. 나혜석과 같은 소수의 여성 필진이 '신여성'의 입장을 대변했지만 이는 미미한 수준에 그쳤죠. 남성 필진들은 관찰자로서 혹은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가진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집 '밖'으로 나온 여성들을 비난하고, 통제하고, 남성의 비호 아래 여성들이 '인재'로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남성 필진들은 그럴듯한 명분으로 그럴싸한 글들을 써 냈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글들에서 '신여성'을 향한 새로운 욕망과 어법, 삶의 양식이 삐쭉 튀어나왔습니다. 예컨대, 〈은파리〉라는 꼭지가 그렇습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흰 저고리에 저 얌전해 보이는 검은 치마를 보아라. 검은 구두에 흰 양말을 신은 종아리 장딴지까지 내려오니 그렇게 보기 흉하게 짧은 치마도 아니구나. (...) 허리가 또 동그스름하게 곡선을 그려가며 다소곳하게 촉- 늘어져 있는 것이 벌써 뒤에 가는 젊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데, 그 가늘고 어여쁜 종아리와 구두가 치마 끝을 얄근얄근 쳐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맵시야말로…." (p.83에서 재인용)
〈은파리〉는 《신여성》의 한 꼭지로, "가명의 필자가 세간의 인물을 미행하며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형식"을 차용합니다. '은파리'가 쫓아다니는 여성은 주로 외모를 치장하거나 불륜, 허영 등 사생활에서 특히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인물들입니다. 그는 〈은파리〉가 "미행과 목격"이라는 실증을 통해 쓰여진 글들임을 밝힘으로써 자신이 묘사하는 신여성의 이미지가 완전한 허구가 아님을 입증합니다. 세파를 분석하고 서술한다는 명분이 드러나는 대목이죠. 하지만 은파리의 관음증적 시선을 통해 독자는 여성을 '보여지는' 것으로, "시선과 감시의 대상"으로 의미화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은파리라는 가상의 존재를 앞세워 남성들은 그들의 욕망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피식민지 남성으로서 억압 받아온 쾌락을 은밀하게 해소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를 기획·집필한 저자들은 《신여성》이 보여주는 당대의 문화적 폐습과 '신여성'을 향한 시선을 토대로 '신여성'의 처지를 거꾸로 이해해보고자 시도합니다. 또, 신여성이라는 존재의 전후사정을 이해하고 그 맥락을 해석하는데 초점을 두어, 그들을 여성의 관점에서 헤아리고자 하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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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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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특히 인상 깊게 읽었던 챕터는 「문제적 기호, '여학생'」입니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챕터에서는 '여학생'을 타깃으로 쓰여진 《신여성》의 글들을 분석하는 한편, 그들을 계몽하고 '보호'하기 위한 규율적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핍니다. 또, 그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했는지 살펴봄으로써 당대 여학생에게 가해졌던 젠더 문법을 고찰하죠.
먼저, "식민지의 우중충한 현실"을 밝혀줄 '아름다운 천사'로서 여학생을 서술한 대목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당신의 사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당신은 이제 이팔청춘 '꽃 같은 너'. (...) 그러니까 당신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 당신들은 기적을 가진 천사. 그리고 당신의 사명은 아름다움이올시다. 살풍경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단장시킬 당신입니다. (...) 그러니까 힘을 다하여 아름다움을 발휘하도록 노력하십시오." (p.118)
이어 필진은 아름답고, 천사 같은 여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기생과 분리시키려고 애씁니다.
"이렇게 "기생의 거동이 여학생의 거동을 밟으며, 매음부의 정장이 여학생의 행색을 쫓는 폐단"이 생기면, "매음부 등 잡배들이 여학생 틈에 숨어들어 그 풍기를 문란케" 할 것임이 틀림없고, 그런 와중에 "여학생들이 통행 중에 모욕을 당하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될 것이 뻔하다는 전전긍긍이 이어졌다. 어떻게 여학생들을 이들 "잡"것들로부터 구해낼 것인가? 어떻게 여학생의 '순정'함을 보존할 것인가?" (p.119)
또, 여학생을 희롱하는 남성의 피해자 혹은 예정된 피해자로 위치시키고, 그들을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여학생이 유혹에 잘 빠지는 것은 그들이 유혹당하기 가장 쉬운 나이인 데다가 "아직 세상을 몰라 온갖 것을 아름답게만 보고 모든 것을 순결하게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P.121)
"이미 피해자이거나 미래의 피해자"인 여학생을 상정하는 태도는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닙니다. "'몸 단속'을 바로해야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남성의 논리는 여성의 움직임과 주체적 태도를 제한시키기에 효과적인 사회적 억압 중 하나로 작동해왔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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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를 읽어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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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작가가 이 책의 추천사에 썼듯 "한국의 신여성은 실재에 비해 과잉 재현된 일종의 현상"이었습니다. 여성이 근대적 주체로서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하자 남성들은 '모던'이라는 현상(혹은 관념)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던의 바탕에는 '평등'을 향한 열망과 흐름이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갖는 반발심은 여성에 대한 통치를 오랜 기간 수행해온 남성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신여성의 출현은 현대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무구한 여성혐오의 역사 속 중대한 장면으로, 사건으로 자리하는데요. 그러나 《신여성》에 서술된 그들의 모습은 '신여성'이라는 존재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무화시키는 데 일조합니다. 그렇기에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는 중요합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신여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이들이 처한 처지와 사정을 사회적 규율 안에서 다시 해석하는 건 곧 남성의 역사를 여성의 손으로 다시 쓰는 일을 의미할 테니까요. 이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계보를 가진 사람으로, 시대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체적 인간으로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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