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들불입니다. 이번 레터에서는 9월 21일, 28일에 진행하는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에 담긴 인종, 계급과 관련한 여러 층위를 살펴 보았습니다.
🎵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 패트리샤 박 지음, 신혜연 옮김 (서사원)
|
|
|
9월 21일, 28일 2주간 매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가 열립니다. 이번 행사는 총 여섯 개의 세션에서 아홉 명의 연사가 이야기를 나눠줄 예정인데요. 오늘은 왜 들불에서 '케이팝' 행사를 기획하게 되었는지 소개하고, 몇 개의 세션에서 나누게 될 이야기를 미리 살펴보려고 합니다. |
|
|
들불에서 '케이팝 하는 여자들'을 주최하게 된 계기 |
|
|
들불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문제를 발견하고, 들리지 않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업을 이어 왔습니다. 경계에 놓인 사람들을 조명하는 일을 분야를 막론하고 지속하고자 노력해왔죠. 그 중에는 여성이 다수를 구성하고 있음에도 여성을 향한 대우가 형편없거나 (결정권자가 남성이기 때문에) 이들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는 곳(교육계, 미술계 등)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들불에서 구체적인 논의를 이어보지 못한 영역이 있는데요. 바로 음악계, 그 중에서도 특히 '케이팝'입니다.
2024년은 유독 케이팝 씬이 다사다난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케이팝 산업 내 위치한 여성 팬의 목소리는 '소비자'로서 자리하는 것 외에 영향력이 미미하게 작용하고 있는 중이었죠. 이는 팬들이 케이팝 문화에 대한 담론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 중심의 '비즈니스'로만 국한된 케이팝이 그들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거부해왔기 때문이었는데요. 들불은 이에 여성 팬의 목소리에 확성기를 대고, 이들이 품어 온 문제의식을 건강한 케이팝 문화를 만드는데 적용하고자 '케이팝 하는 여자들' 모임을 만든 박유진 디자이너에게 연락했고 이후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행사에서 다루는 여섯 개의 키워드(노동, 퀴어, 스트레스, 사랑, 페미니즘, 지속가능한 덕질)는 현재의 케이팝 지형을 설명해주는 단서이자 지금 대한민국이 놓인 상황을 돌아보게 만드는 중요한 주제들입니다. 케이팝이 이 나라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단 걸 생각한다면, 이번 행사는 반성이 부족한 케이팝 산업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한국 사회의 오랜 폐습을 고쳐나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 |
|
|
🔍 노동 (9/21, 토) "노동 착취 없는 케이팝과 팬덤 문화는 가능할까?" (〈콘텐츠로그〉 발행인 서해인 & 한겨레신문 기자 박다해) |
|
|
9월 21일 진행하는 행사의 첫번째 키워드는 바로 '노동'입니다. 두 이끔이는 해당 세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완벽한 무대를 준비하는 '본업존잘' 아이돌은 본업으로만 수익을 낼 수 없어 과로하게 되고, 내 아이돌의 '커리어 하이'를 위해 팬들은 보상 없이 밤낮으로 달립니다. 아이돌과 팬, 우리는 어떻게 일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른바 '육각형인간'(외모, 성격, 학력, 자산, 직업, 집안을 갖춘 완벽한 인간)이 트렌드로 떠오른 지금, 케이팝 역시 이러한 트렌드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일-존잘러가 되기 위한 아이돌의 노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죠. 출퇴근을 하는 순간에조차 아름다운 외모와 온화한 미소를 갖출 것을 요청 받고, 새벽 시간에는 챌린지 릴스를 찍으며 잠깐 쉴 틈조차 갖질 못합니다. 또, 외국 국적의 멤버의 경우 꾸준히 한국어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아이돌의 일거수일투족은 전부 잘개 쪼개진 '노동'이지만, 왜인지 그들은 '노동자'로서 쉬이 위치 지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사람들이 그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그들이 매순간 '잘' 해내기를 요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자유주의의 개인화와 자기계발 담론이 문제적이라는 문제의식이 활발히 공유되고 있는 지금, 아이돌에게는 왜 유독 가혹한 잣대가 적용되는 걸까요? 본 세션에서는 '콘텐츠로그' 발행인인 서해인 작가와 한겨레신문 박다해 기자가 본업존잘과 커리어 하이라는 세부 키워드를 주제로 케이팝의 노동 문제에 대해 다루고, 이와 관련해 제기되고 있는 여러 물음에 답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
|
|
🔍 사랑 (9/28, 토) "자본주의 바깥에서 사랑하기, 가능할까?" (《너라는 이름의 숲》 저자 아밀 & 《환상통》 저자 이희주) |
|
|
아이돌의 노동 문제와 더불어 '팬의 노동', 그리고 '자본주의'가 케이팝 문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면 좋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아밀, 이희주 작가 두 분이 세션을 구성해주셨는데요. '사랑' 세션에서 다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 발맞춰 진화하는 케이팝 산업에서, 팬은 덕질에 점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비자 정체성을 벗어나 덕질할 수는 없을까요? 노동하듯 덕질하지 않고도 사랑을 증명할 방법은 없을까요? 자본주의 바깥에서의 대안적인 사랑의 방법을 모색합니다."
본 세션의 출발점은 '수발자본주의'였습니다. 수발자본주의는 유리관 작가의 『교정의 요정』에 등장하는 단어인데요. 유리관 작가에 따르면, "이른바 돌봄선언의 악몽 같은(=현실의) 버전"인 수발자본주의는 "자본이 세계의 지배적인 동인인 한 90퍼센트 인간의 삶은 그저 위쪽 10퍼센트 정도 인간의 수발을 들기 위한 것으로 격하"된다는 뜻을 가집니다.
유리관 작가가 '수발자본주의'라는 '악몽'을 가정한 것처럼, 케이팝이 아이돌과 팬 서로가 서로를 '수발'하는 방식으로 편성되어 있다고 가정해보면 어떨까요? 영통팬사인회 등을 통해 아이돌은 팬을 수발하고, 팬은 많은 돈을 팬사인회를 위해 '태우'며 자본을 통해 아이돌을 '수발'하는 방식의 시스템이라고 이해해보자는 겁니다. 아이돌과 팬 간의 상호작용을 수발자본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하다보면 종국엔 이런 질문만이 남습니다. "자본주의 바깥에서 (소비자가 아닌 채) 아이돌을 사랑하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질문 말이죠.
본 세션에서는 두 이끔이의 개인적인 경험에 특히 주목할 예정입니다. 두 이끔이가 남/여돌을 향한 대안적인 사랑의 방법을 모색한 경로를 따라가며, 이를 통해 '돈'이 아닌 사랑을 상상해보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예정이에요. 두 이끔이는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자본주의 바깥에서 사랑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
|
|
🔍 페미니즘 (9/28, 토) "페미니즘과 함께 다시 만난 세계를 상상하기"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발행인 일석) |
|
|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통해 본 행사의 키워드들을 계속해서 다뤄온 이끔이 일석 님의 '페미니즘' 세션도 있습니다. 본 세션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눠볼 예정입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걸그룹이 케이팝 씬의 주류로 자리 잡고, 그들을 사랑하는 여자들 또한 많아졌지만, 이 산업은 여전히 우리를 고민하게 합니다. 페미니스트로서 케이팝 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나누며, 우리가 '다시 만난 세계'를 상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페미니스트의 덕질은 '죄책감'이라는 키워드로 지금까지 제법 활발하게 논의되어 왔습니다. '외모'를 지나치게 관리해야하는 여자아이돌의 자기관리에 대한 죄책감, 하루가 다르게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 멤버들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남자아이돌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겪는 부대낌 등 죄책감과 관련한 논의는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논의되어 왔죠. 물론 페미니스트-팬들이 느끼는 이러한 감정도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본 세션에서는 기존의 논의에서 좀 더 나아가 에스파와 뉴진스라는 두 그룹에게 투영하는 여성의 욕망을 비롯한 여러 심리를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페미니스트로서 아이돌을 사랑하는 일의 즐거움과 괴로움을 짚어볼 예정입니다. 이 이야기를 위해서는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이 지금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 맥락을 짚는 작업 역시 중요할 것 같은데요. 자세한 이야기는 본 세션에서 듣고 또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
|
|
🎵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 🎵
앞서 언급한 키워드들을 포함, 여러 논의를 토대로 건강한 케이팝 문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의 경우, 남은 좌석의 수가 많지 않으니 서둘러 신청해주세요!
⋆ 일시
◦ Week 1. 2024. 09. 21(토) 오후 1시 ~ 4시
◦ Week 2. 2024. 09. 28 (토) 오후 1시 ~ 4시
⋆ 방식
온라인(줌)/오프라인(홍대 플랫폼P 다목적실)
* 주최: 들불, 유유히
* 기획: 들불(구구), 케이팝 하는 여자들(유진)
* 디자인: 스튜디오 휴휴
* 후원 및 협찬: 스티비, 노플라스틱선데이, 리무브 |
|
|
얼마 전 미국의 시사 주간지 The New Yorker의 9월9일자 표지가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입양 가족", "여성 중심의 양육 문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온 이 표지는, 이후 백인 자녀를 돌보는 유색인 여성 유모(보모)의 문제에 대한 내용임이 밝혀졌습니다. 인종, 계급의 문제를 담은 이 표지를 그린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 R. 키쿠오 존슨은 2021년 4월, 같은 주간지의 'delayed(지연된)'이라는 제목의 표지를 그려 화제를 불러 일으킨 작가인데요. 나날이 급증하고 있는 아시아인 혐오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불안을 묘사한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번 9월9일자 표지 역시 유색인 여성들의 일상을 그려내면서, 그 안에 숨겨진 여러 층위를 드러냈습니다. X(구 '트위터')에서는 <뉴요커> 9월9일치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을 보고 여러 의견이 쏟아져나오는 가운데, 그림에 내포된 인종, 계급의 문제를 포착하기 어려웠다는 점에 놀라는 반응을 보였는데요.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이 전개되면서 필리핀 여성 노동자 100명이 입국한 상황에서 가사노동의 '값싼 외주화'를 꾀하는 정부 및 사회의 태도를 떠올린다면 이 표지는 이제 우리에게도 많은 고민을 안겨주는 표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
|
|
"A Mother's Work," by R. Kikuo Johnson. |
|
|
"delayed" by R. Kikuo Johnson. |
|
|
앞서 소개한 9월9일자 표지의 맥락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할 책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입니다.
"로럴은, (...) 우거진 가로수 길과 아름답게 복원된 유서 깊은 브라운 스톤 건물들을 지나 농장 직거래 유기농 레스토랑과 바로 깎은 양털로 만든 옷을 400달러에 파는 고급 의류 부티크를 지난다. 그곳의 흑인 보모들은 우리 동네 사람들이 타는 자동차보다 비싼 유아차에 백인 아기들을 태우고 다닌다." (p.41)
이 책 역시 화제가 됐던 뉴요커의 표지만큼이나 여러 층위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인데요. 인종, 계급과 더불어 정체성 정치, 다문화, 다양성이라는 표지까지 다양한 문제를 포괄하는 이 책은 우리에게 여러 질문을 안겨줍니다. 오늘 〈들불이 만난 이야기〉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 패트리샤 박이 쓴 화제작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을 통해 한국-아르헨티나계 미국인 알레한드라 김의 다사다난 성장기를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층위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
|
|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 어떤 책인가요? |
|
|
'알레한드라 김'은 한국-아르헨티나계 미국인으로, 굉장히 복잡한 다문화 정체성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퀘이커 오츠'라는 부유한 백인 학생이 대다수인 학교를 다니는데요. 퀘이커 오츠에서 알레한드라는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선생님과 일상적으로 타 인종을 차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이방인의 감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는 온갖 차별과 편견 어린 시선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에 대한 분노와 모욕감을 억누른 채 학교 생활을 이어갑니다. 이 책의 제목에서 나타나듯, 알레한드라는 이른바 '가면증후군'을 경험합니다. 가면증후군이란, '사기꾼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질환으로 자신을 "진짜들 사이에 숨어든 가짜"라고 여기는 증상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소수집단 출신(여성, 인종적 소수자, 성 소수자, 장애인, 특정 종교의 신자 등)"이 자주 경험하는 가면증후군은 "자신이 특정 인종이나 집단을 대표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는 특징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알레한드라의 경우, 자신의 능력이나 감정을 믿지 않고 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점에서 '가면증후군'과 유사한 증상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놓여있는 차별적인 상황 하에서 가면증후군은 어쩌면 상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고 외면하기 위한 핑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구체적인 차별의 상황을 하나의 '증상'으로 치부하면서 광범위한 문제를 회피하는 거죠. 알레한드라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똑바로 마주하려하지 않는 알레한드라 곁에는 '로럴'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알레한드라와 가장 친한 친구인 로럴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 학생이자 알레한드라가 경험하는 차별에 맞서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야한다고 믿는 백인입니다. 로럴은 알레한드라가 수업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당한 인종차별을 이유로, 선생님의 사과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이어가고 이에 선생님을 학교에서 몰아내기에 이르는데요. 이 때문에 알레한드라는 상까지 받으며 굴욕적인 관심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 알레한드라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계속해서 불편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설상가상 로럴이 대입용 에세이 주제로 이 사건을 쓰게 되면서 알레한드라와의 관계는 더욱 틀어지게 됩니다.
📕
한편, 알레한드라에게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와 요양보호사로서의 고된 노동과 남편을 잃은 상실감에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알레한드라는 이러한 가정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가난하고 우울한 동네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를 꿈꿉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거주하는 동네에서는 그가 그토록 섞이기 어려워했던 '퀘이커 오츠' 출신 특유의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사람이 갖는 정체성이란 상황과 맥락, 관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그렇기에 단순히 인종, 성별 등으로 구분 지어지기엔 어려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 알레한드라는 어디에도 섞이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혼란과 욕망을 발견합니다.
"이 지역(퀸스)에는 백인이 드물다. 대부분 라틴계나 남아시아인이고, 그 틈에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일부 섞여 있다. 퀸스로 돌아오니 정치적으로 옳은 말이 오히려 다 이상하고 진실하지 못한 말처럼 느껴진다." (p.43)
"퀸스 거주민들은 멍청하지도, 천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현실적일 뿐이었다. (...) 제임스 우드가 최근 <뉴요커>에 뭐라고 썼는지, (...) 푸코가 팬옵티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 우리 이웃 사람들에게는 돈과 음식, 보금자리가 바로 아메리칸드림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아니었다. 나는 이미 도착해서 정착한 사람들에게 속하기를 갈망했다. (...) 정확하고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말이다." (p.76-77)
💬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의 서문에서 저자는 미국인이지만 한국인인 자신이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 채 "가짜"인 것처럼 살아오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알레한드라의 이야기가 자신의 삶과 닮아있음을 밝히죠.
"알레한드라처럼 저 역시 매일매일을 가짜 행세를 하는 사람처럼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사람들은 늘 제 얼굴을 보고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물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마치 가짜 한국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 가짜가 된 느낌은 학생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어디든 그곳에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소설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외로움을 덜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p.5~7)
우리는 알레한드라가 자라나는 여정을 따라가며 그가 경험하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자신의 자격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가면증후군의 괴로움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우리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내가 선 위치는 어디인지, 나는 나의 위치에서 누구를 위해 어떤 말을 발화하고 행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요. 또, 소수집단이 경험하는 차별, 소외를 하나의 증상으로 일축하며 시선을 세상이 아닌 개인에게로 향하게 만드는 현실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게 되고요.
|
|
|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 속 인종, 계급의 문제 |
|
|
이 책에서 제가 특히 흥미로웠던 인물은 인종 차별을 당하는 동양계 미국인을 '위한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행동에 앞장서는 '로럴'이라는 백인입니다. 그의 행동은 조금 돌발적이고 섬세하지 못하지만 악의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 그 역시 알레한드라만큼이나 백인으로서 (윤리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사정을 알레한드라 역시 잘 알고 있고, 어떤 면에서 그는 로럴에게 경외감을 갖기도 합니다.
"내 문제가 지금 청원이라는 형식으로 다 공개되어 버렸다는 굴욕감만 빼면, 한편으로는 경외감 비슷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 로럴이 용기있게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도 나를 위해서. 그럴 필요 없는데. 하지만 로럴은 또한 내가 조용히 넘어가길 바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이제 JBJ(인종차별을 한 선생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갈 것이고, 그러면 그 후폭풍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내가 될 터였다. 누군가에게 감사와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p.97)
❓
여기에서 생기는 물음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누군가의 문제를 일견 타당한 이유로 해결하고자 나설 때 어떠한 방향성과 태도, 방법론을 취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인종·계급에 관한 여러 문제들에도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이 '필리핀 가사노동자'를 고용하는 일을 필리핀 여성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일, 가사·돌봄노동에 괴로워하는 한국 여성들을 위한 일, 저출생 해결의 대책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어떤 위치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청취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발화를 해야할까 라는 고민이 생깁니다.
이에 대해서는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에서 언급한 영화감독 트린 T. 민하의 제안에서 힌트를 얻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트린 T. 민하는 "내 체험 바깥에 있는 문화에 "관해 말하기"(speaking about)보다 그 "근처에서 말하기"(speaking nearby)를 제안"합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에 관해 말하기보다 근처에서 말하기로 했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신과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잠재적 간격을 인정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대표성의 공간을 남겨두는 거죠. 그리하여 당신이 대상자와 아주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대표하거나, 대신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여 발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직 근처에서, 즉 가까운 거리에서 말할 수 있을 뿐이며, 그러려면 의미 규정을 의도적으로 멈추어 의미가 간단히 봉쇄되지 않게 하고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에 여백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 타자와의 관계에서 권위자의 위치를 점하려고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전지전능의 주장과 지식의 위계에 따라 생성되는 무수한 판단 기준으로부터 당신은 사실상 자유로워집니다." (p.143)
인종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간단하게 접근하는 방법, 즉 '흑인', '아시아인'의 체험 등으로 납작하게 눌러 유형화하고 접근하려고 하죠. 하지만 이는 트린 T. 민하가 말한 '근처에서 말하기'와는 거리가 먼 백인 중심의 사고 방식입니다. 우리가 시도해야 하는 건 "백인성을 탈중심화"하는 일, '계급'이라는 "간격"을 발견하고, "다문화적 합일성이라는 안이한 환상이나 도덕성을 과시하는 살균된 언어에 기대지 않고서"(같은책, p.151) 발화하는 일입니다. 그러려면 일단 내 안의 '백인성'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할텐데요. 『알레한드라 김의 가면 증후군과 솔직한 고백』의 주인공 '알레한드라'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다양성'이라는 거대한 이름 안에 숨겨진 복잡다단한 인종·계급적 다층적 층위를 발견하고 이 가운데 우리의 위치를 점 찍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 인종이 섞여 살고 있는 2024년의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끝으로, '다양성'에 관한 이 책의 흥미로운 대목 하나를 더 소개한 후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레한드라와 같은 학년에는 유일한 아시아계 여학생인 '마야 창'이 있는데요. 알레한드라와 마야에게는 아시아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마야는 부모님이 의사라는 점에서 다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알레한드라는 마야와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경쟁심을 '다양성'의 측면에서 이야기합니다.
"어떨 때는 우리 사이에 무언의 경쟁심이 느껴질 때도 있다. "다양성"이 일종의 우리의 특징이 되고 그게 우릴 '특별'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둘이 있을 때는 공통점을 묻어 두고 어느 정도 경쟁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주변의 모든 이가 다양성을 우리의 특징으로 삼지 않는 한은 그랬다." (p.75)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에서 '다양성'이라는 세련된 탈정치를 날카롭게 짚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성'이라는 단어가 중산층 남성을 기준으로 한 '보편성'이라는 단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지만, "듣기 좋고 부담 없는 단어"일뿐, "논쟁을 덮어버리는 도구"로 기능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다양성이 포섭하는 '여러 개'의 '다양성'은 평등하지 않기에 다양성이라는 말로 '융화'나 '연대'를 말하기보다 우선 '자기'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죠. 퀘이커 오츠에서도 다양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학교가 강조하는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특히 계급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데에 정희진의 분석은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
|
|
들불레터, 어떠셨나요?
들불은 여러분의 의견과 이야기가 궁금해요.
아래 버튼을 클릭하시면 익명으로 의견을 남기실 수 있답니다! |
|
|
들불레터 지난화 다시 보기
친구에게 들불레터 추천하기 아래의 링크를 주변에 공유해주시면, 들불의 내일에 큰 보탬이 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