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들불입니다. 오랜만에 인사 드려요. 들불은 〈케이팝 하는 여자들〉 행사 이후 잠시간의 휴식기를 가지며 내실을 다지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다려주신 구독자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들불이 새로 시작한 팟캐스트 〈우리 좀 솔직해져 볼까?〉와 모집 중인 북클럽을 소개하고 비비언 고닉과 나오미 클라인의 흥미로운 신간을 소개하였습니다. 또, 영국의 페미니즘 출판사 비라고 출판사Virago Press의 50주년 기념 앤솔러지 『복수의 여신』을 소개했어요. 모두 재미나게 읽어주시길 바라며, 오늘의 들불레터 힘차게 시작해보겠습니다!
📚 들불의 새로운 소식들
- 팟캐스트 〈우리 좀 솔직해져 볼까〉
- 〈우리를 잇는 책읽기〉 모임 모집 안내
- 〈천천히 오래오래 읽기〉 모임 모집 안내
📚 들불의 PICK!
-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 비비언 고닉
- 『도플갱어』, 나오미 클라인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 『복수의 여신』, 마거릿 애트우드 외 지음, 이수영 옮김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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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우리 좀 솔직해져 볼까〉 시작!
들불이 팟캐스트를 시작했습니다. 현재 두 개의 에피소드가 올라온 상태이고요, 다음 화에서는 제가 장바구니에 담아둔 책 / 요즘 읽은 책 / 나에게 맞는 팔레스타인 도서 고르는 법을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팟빵, 스포티파이, 유튜브에서 들으실 수 있어요.
- 〈우리를 잇는 책읽기〉 모임 모집 중! (참여하기)
트라우마와 재현(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역사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었어요. 《작별하지 않는다》는 마감되었고, 다른 모임은 2~3석 남아 있습니다.
- 〈천천히 오래오래 읽기〉 모임 모집 중! (참여하기)
들불에서 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만남을 통해 한국 문학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시, 또 함께’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작가정신의 시리즈 〈소설, 잇다〉를 읽습니다. 근대 대표 여성 작가와 현대 작가의 소설, 에세이를 통해 현대까지 이어져 온 여성작가의 계보를 확인하는 시간을 함께 가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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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등 빛나는 저작을 쓴 비비언 고닉의 초기작 중 하나인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가 오월의봄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비비언 고닉이 페미니즘 운동을 취재하던 1970년대, "비난해야 하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 문화 일반"이라는 발언으로 비판을 받게 되자 떠오른 유년시절의 '미국공산당원들'에 대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진보적 사회주의자이자 공산당원이었던 부모님과 미국으로 탈출해온 러시아 유대인인 할머니의 이야기까지... 개인적인 삶과 역사, 정치가 뒤엉키는 지점을 보여주는 이 책을, 비비언 고닉을 애정하는 독자라면 정말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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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나오미 클라인 지음 류진오 옮김 (글항아리)
여러분, 나오미 울프를 아시나요? 한국에 《버자이너》,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로 소개된, 제3세대 여성주의 운동을 이끈 것으로 평가되는 페미니스트 작가입니다. 한편, 나오미 클라인은 《자본주의는 어떻게 재난을 먹고 괴물이 되는가》,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등 자본주의를 비판한 작가로 잘 알려져 있죠. 두 사람은 '유대인'이자 '나오미'라는 이름, 두 가지 중대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출간 이후의 행보는 판이했습니다. 클라인은 3세대 좌파지만, 울프는 자유주의자이자 엘리트 여성으로서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고 급기야 극우 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울프와 클라인을 혼동했고, 포털 사이트에는 언제나 울프와 클라인의 이름이 동시에 거론되고 있습니다. 나오미 클라인은 바로 이 지점, 울프와 혼동된 '도플갱어' 이야기로 논의를 시작합니다. 이를 출발점 삼아 극우를 탐구하고, 좌파를 반성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서 나타난 유대인의 문제까지 분석하죠. 이 책의 부제는 '우파라는 거울 이미지를 마주한 미국 좌파의 딜레마'인데요. 무척 흥미롭지 않나요? 나오미 클라인과 나오미 울프를 한 번쯤 혼동해본 적 있는 독자라면 특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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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픽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픽션은 "소설이나 희곡 따위에서, 실제로 없는 사건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재창조해냄, 또는 그런 이야기"를 뜻합니다. 이 정의는 우리에게 소설이 "실제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면, 혹은 "실제로 있는 것을 거짓으로 가리거나 다르게 꾸미는" 재창조의 작업이라면 이른바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남깁니다. 여성 작가가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재창조된 (좋지 않은, 아니면 너무 나쁜) 현실'은 우리의 현실보다 더 "세계에 대한 진실"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요. 현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게 픽션이라면, 픽션에서 현실로 고개를 돌린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픽션은 우리가 무엇을 마주치게 만드나요?
랑시에르는 픽션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모든 것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픽션을 몫 없는 자들의 말과 글을 새기는 정치적 시도로 이해하죠. 그는 《픽션의 가장자리》에서 '몽상'이라는 비활동이 세계의 활동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을 "임의의/보잘것없는 순간"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순간이 갖는 혁명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임의의/보잘것없는 순간은 지배적인 시간, 즉 승리자들의 시간의 '승리'가 가장 확실시되었을 때조차 승리자들의 시간을 폭발시키는 힘이다. 지배적인 시간이 말 바깥, 시간 바깥에 있는 이들을 밀쳐낸 곳, 아무것도 아닌 것의 가장자리에서 이 힘은 작동한다." (《픽션의 가장자리》, p.248)
오늘 제가 소개할 《복수의 여신》 역시 "지배적인 시간"이 밀쳐낸 곳에 자리한, 아무것도 아닌 것의 가장자리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폭발적인 혁명의 힘을 담고 있습니다. 모욕적인 칭호들로 불리며, 실재하지만 비-실재하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분노와 유머를 통해 전달하죠. 이 이야기는 현실인 동시에 진실이고, 지배적인 시간 사이에서 멈춰졌던 여성들의 시계를 다시 작동시키는 힘입니다. 오늘 '들불이 만난 이야기'에서는 《복수의 여신》의 출발점을 되짚어보고, 제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단편 두 편을 소개하며 기존의 시계를 깨뜨리는 작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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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은 비라고Virago에서 《FURIE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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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여신》은 1973년 영국에서 카르멘 카릴Carmen Callil이 설립한 페미니즘 출판사 Virago Press가 만든 '50주년' 기획 앤솔러지입니다. 마거릿 애트우드를 비롯해 앨리 스미스, 카밀라 샴지 등 다양한 국적, 인종, 성적 정체성과 문화를 가진 여성 작가 15인이 참여했죠.
비라고Virago 출판사가 설립된 1970년대는 영국의 여성해방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급진적 페미니즘 운동이 고조되던 때였죠. 카르멘 카릴은 여성해방운동의 성공에 힘입어 불평등한 성별 위계를 해결하고, 대안적이자 반자본주의적인 출판 프로젝트로서 비라고를 설립합니다. 팟캐스트, 아동 고전 출판 등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비라고는 여성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 문학계에 도전해왔어요. 《복수의 여신》은 50년간 비라고가 일으켜 온 혁명의 기념비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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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출판사의 이름인 비라고Virago는 "영웅적이고 호전적인 여성"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말참견 잘하고 어디서나 문제를 일으키는 드센 여자"를 뜻하는 멸칭으로 주로 쓰입니다. 《복수의 여신》의 서문을 쓴 산디 토츠비그는 비라고Virago의 유사어를 나열하며, 이 책의 구성을 소개합니다.
"수다쟁이buddy, 개년bitch, (...) 입이 험한 여자fishwife, 한을 품은 여자fury, 할망구harridan, 화냥년hussy, 가십녀muckraker, (...) 사나운 여자tygress, (...) 촌년wench... 나는 이 모든 것들의 합체가 되고자 소망한다. 왜냐하면 이 멸칭들이 전부 자립을 위해 떨쳐 일어서는 여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P.8, 《복수의 여신》)
산디 토츠비그의 바람대로 《복수의 여신》은 여성을 향한 멸칭들의 '합체' 그 자체인 작품입니다. 각 챕터마다 멸칭이 하나씩 붙어 있고, 이에 대해 작가가 이야기를 쓰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거든요(*이미지 참고)
각 작품은 짧게는 열페이지, 길게는 30페이지 정도의 분량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각 챕터에 쓰인 멸칭들의 의미도 위 이미지와 같이 자세히 적혀있고, 챕터 마지막에는 작가의 이력도 수록되어 있어요. 짧은 이력에도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이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잘 몰랐던 작가의 작품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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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 지 고민이 되는데요. 다른 의미를 찾기 보다 일단 '재밌다'고 단평만으로 이 작품을 읽어보시라 설득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은 유흥업 종사자인 화자가 삼십 대에 접어 들면서 〈위기의 주부들〉이 촉발한 '40대 어머니' 붐에 편승해 새로운 포르노 시장을 개척해보려는 야심찬 계획으로 시작합니다. 영상 속에서 그는 '40대 어머니'로 분한 채 연기를 하죠. 그러나 이 사업은 생각지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바로 40대 어머니로서의 당사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차린 것인데요. 그래서 그는 급히 올리비아와 그녀의 아들의 방을 섭외합니다. 관념적이고 건조한 범주로서의 '40대 어머니'가 아닌, '현실의' 40대 어머니를 연기하기 위해서요. 그러나 올리비아는 아들의 방이 영상에 노출되는 걸 꺼려합니다. 사는 곳이 특정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죠. 이 때문에 전화로 화자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화자는 데릭 허시를 마주칩니다.
이십 대때 만난 데릭 허시는 동종 업계 종사자였지만, 지금의 그는 스턴트맨이 되어 있습니다. 손가락도, 머리도 성한 곳이 하나 없는 그를 향해 화자는 묻습니다. "왜 그랬어?" 그리고는 이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뭔데 데릭 허시에게 '왜 그랬느냐?'고 묻는단 말인가? 더구나 나 자신이 같은 질문에 답하느라 경력 전체를 의미 없이 보냈는데 말이다. '왜 그랬느냐'라는 지속적 질문의 진짜 의미는 어떻게 수치스럽지 않을 수 있느냐'였다."(p.143)
'나'는 자신을 "소수의 선구자"로 칭합니다. "민첩성, 유연성, 회복력, 혹은 매력"과 같은, 육체적인 가능성이야말로 포르노 배우의 자질이며 이는 소수만 갖고 있는 능력이라는 거죠. 일반 사람들이라면 쥐가 날만한 장면에서도 별 탈 없이 거뜬히 해내는 육체적 탄력성 말이에요. 설령 포르노배우 스스로가 '선구자'라 칭하는 일이 "페미니즘의 성과"를 까먹는 일이라고 할 지라도, 그는 내가 보기에 데릭 허시는 이러한 자질을 충분히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데릭 허시가 스턴트맨을 하며 신체 일부를 잃고 있다니! '나'의 입장에서 이보다 큰 손실은 없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나'는 그에게 "왜 그랬어?"라고 묻는 일만큼 모욕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데릭 허시에게 모욕 주기를 그만두고 그의 앞을 떠납니다. 데릭 허시가 위험한 삶에서 꺼내줄 수 있는 달콤한 제안을, 40대 어머니로 분한 '나'의 남편 역할을 맡기로 하는 제안을 기다리는 중인데도 말이죠.
'몸'을 쓰는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이 직업에 있어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장면, 그리고 서로의 본심을 숨긴 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우습고 슬픕니다. 화자인 내가 스턴트맨인 데릭 허시를 위험한 삶에서 꺼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은, 포르노 배우의 삶이 손가락이 잘리고 머리를 다치는 일보다는 안전하다는 잠시간의 착각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포르노 배우인 내가 데릭 허시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챕터의 제목인 허시hussy ('제멋대로 놀아나는 닳고 닳은 여자' 즉 화냥년, 헤픈 년, 바람둥이)가 기존에 갖고 있던 '폭력에 노출된/모욕적인/수치심에 잠식된/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진'과 같은 기존의 통념을 떠올리며 갸웃하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면 포르노 배우의 이야기는 언제나 피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것 같습니다. 그가 직업적 모색을 늘어 놓기 시작한다면, 그것도 아주 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이야기를 건넨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될까요? 왜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같은 여성의 것인데도 덜 받아들여지거나 더 큰 비판에 부딪히게 되는 걸까요? 한 번쯤 고민해볼 만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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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다는 주변 사람에게서 언제나 최악을 보는 인물입니다. 그는 "어떤 종류든 나를 완성시키는 동반자의 존재가 가능하다면, 그건 서로를 까발리고 추락시키는 노력을 둘 다 죽어라 할 때"라고 생각하는 인물이죠.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부정할 수 없는 질책의 말을 퍼붓습니다.
어느 날, 마케다에게 취업 제안이 들어 옵니다. 그가 하게 될 업무는 "가장 잔인한 악플꾼"이 되어 유명인과 예비 유명인을 적대적 미디어 환경에 단련시키는 작업입니다. 그리하여 "언어에 초민감한 유명인"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유명인"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죠. 회사는 '솔로몬'이라는 컴퓨터 시스템을 만들어 마케다와 짝을 이뤄 활동하도록 요청합니다. 이윽고 그들은 효율적인 업무 분담을 통해 완벽한 2인조로 거듭나죠.
하루는 솔로몬이 마케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신의 목적이 도대체 무어냐고요. 마케다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을 일부 상실시키는 게 우리의 목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마케다의 답이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마케다가 지금까지 해온 일은 "사람들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는 관점을 알리는" 것이었거든요. 솔로몬의 이 말은, 마케다가 그간 해온 이른바 '독설 작업'이 누군가의 자존심을 조금 꺾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아예 그 사람의 존재 이유 자체를 말소시켜버리는 방식으로 기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남깁니다.
고난을 통해 사람이 성장한다는 말이 헛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시작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고난이 비판만을 위한 비판으로 기능할 때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릴 수 있는지 우리는 여러 가슴 아픈 사례를 통해 익히 봐 왔고요. 마케다가 사람들에게 던진 독설을 '악플'로 치환해본다면, 이 문제는 더욱 현실적으로 와 닿습니다. 누군가의 존재 기반을 발로 걷어차버리는 '말'이 그를 위한 일로 포장되어 버린 지금 사회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회복시키는 '말'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요?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어쩌면 잃어버린 말들, 다정하고 따뜻한 말들을 복원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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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한 《복수의 여신》, 들불에서 함께 읽어요!
- 일시: 11월 29일 금요일 오후 8시 ~ 10시
- 장소: 온라인(줌)
- 도서는 현대문학에서 보내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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