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들불입니다. 오늘은 동덕여자대학교 남녀공학전환 사태를 다루고, 한국의 '대학'이 나아가야할 길을 나윤경의 글에서 발견해보았습니다. 또, 이진민 작가의 《언니네 미술관》을 통해 예술이 우리의 삶에서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들불 캐비닛
- 동덕여자대학교 남녀공학전환 논란
- 한국 여자대학교의 존재 이유: 남녀공학의 대안 혹은 경쟁자, 나윤경 지음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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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동덕여자대학교(이하 동덕여대)가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채 "학교 발전계획안 '비전2040'"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남녀공학으로의 전환을 논의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동덕여대 학생들은 수업 거부를 비롯해 피켓 시위, 과잠 시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학교 측의 논의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으며, 학교 측 관계자는 '남녀공학 전환이 아직 확정된 사안이 아니며, 추후 학생들과의 논의를 거치려고 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한 월간지가 단독으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대학 측의 이러한 논의는 이미 2~3년 전부터 추진되어왔다고 합니다. 이미 두 달전부터 대학 교수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밝혀졌고요.
'동덕여자대학교 졸업생 연대'가 12일 발표한 입장문을 비롯해 현재까지 보도된 사실에 의하면, 이미 동덕여대 한국어문화전공학과에는 6명의 남학생을 '재학생' 신분으로 입학시킨 바 있습니다. 이미 남성 재학생이 존재하는 상황을 학생들은 4개월이 지나 인지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통해 학교 측과 김명애 총장이 밝힌 것과 달리, 공학 전환이 이미 부분적인 시행 단계를 거치고 있던 게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2015년 여성학전공과정의 폐지, 2020년 여성학 센터의 다목적화라는 명분 하에 이루어진 동덕르네상스 홀로의 변경 등의 행보를 미루어 봤을 때, 공학 전환은 예견된 수순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고요.
상황은 더욱 악화되는 중입니다. 김명애 총장이 입장문에 “12일 개최된 3000여 명 참여가 예정된 동덕 진로 취업·비교과 공동 박람회 현장의 집기와 시설을 모두 파손시켰으며 동시에 본관 점거를 시작하며 직원을 감금하기도 했다”는 내용을 실어 또 한 번 학생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거든요.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오히려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방조했으며, 학생들의 권리 주장을 '폭력'으로 프레이밍하려는 저열한 시도에 유감을 표하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편, 대학교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이하 에타)에서는 성별 간 대립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동덕여대뿐 아니라 그간 대학교 내 성차별을 경험해온 여성들이 남성들의 그릇된 인식을 지적하며 동덕여대 사태로부터 촉발된 논의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에타가 '제2의 메갈'이 돼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는 커뮤니티 안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의 방식(미러링, 조롱 등)에서 비롯된 것일텐데요. 특히 남녀공학대학교 내에서 차별을 경험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배움의 산실이어야 할 대학이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만드는 단서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편에서는 이른바 '분리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 역시 제기되고 있습니다. 트위터(현 X)에 '트랜스젠더는 왜 이 문제에 연대하지 않느냐'는 내용의 트윗이나 여성운동과 트랜스운동을 분리해 접근하고 실천해야한다는 트윗이 올라오며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점화시켰죠. 여대 논의가 터져나올 때면 어김없이 강조되는 '트랜스배제적' 페미니즘과 '교차성' 페미니즘의 대결 구도가 이번에도 반복되고 있는 셈입니다.
동덕여대 남녀공학전환을 둘러싼 여러 논의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이야기해볼 필요를 느끼지만, 들불 캐비닛에서는 여러 논의에 앞서 "왜 '여자대학교'는 남녀공학전환으로의 방법만을 도모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논의의 출발점이 잘못 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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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1년 교육과학연구에 수록된 글로, 동덕여자대학교 창학 100주년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된 결과물인데요. 이 글이 쓰여진 배경에는 여자대학교의 ROTC 신설 경쟁이 있습니다. 2010년, 이른바 '금녀의 구역'이라 불렸던 학군단에 여성이 진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여성 ROTC 제도가 6개 대학에서 시범적용된 것인데요. 그 중에는 숙명여자대학교도 포함되었고, 2011년 성신여대, 2016년 이화여대에도 ROTC가 설치되었습니다. 나윤경 교수의 글은 여자대학교들의 ROTC 신설 경쟁을 바라보며, 한국의 여자대학교들이 남녀공학대학교와 유사한 '남성중심적인' 틀 안에서 경쟁하고자 하는 이유를 살피며 여자대학교의 존재 이유를 되묻는 작업을 거칩니다.
저자는 먼저 2010년 3월 김예슬 씨가 쓴 대자보의 내용을 인용하며 대학이 해야할 역할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인용한 '김예슬 선언문'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략)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중략)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중략)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중략)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후략)
-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
저자 역시 김예슬 씨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며, '자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지 않고 사회적 이슈에 개입하지 않는 '대학'의 현재를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성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건, 유능한 인재 배출을 위해서건 "모든 여자대학이 여성학군단 설치를 신청한 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여자대학이 남녀공학대학의 대안이기를 희망하는지, 아니면 그들과 경쟁하기를 원하는지", 그리고 "여대 졸업생과 남녀공학대학의 졸업생은 어떻게 다르고, 차이가 없다면 여대는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논의를 이어갑니다.
저자는 먼저 남녀공학대학과 여대에서 경험하는 일상에서의 "성 정치"와 "성 역할"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공학 내에서 남학생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진행된 교양수업을 통한 연구에서 저자는 여학생들이 느낀 편안함과 여성 차별에 대항할 수 있는 여성들만의 네트워크, 자신감을 회복하는 유익한 경험 등 여자들만이 존재하는 환경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발견합니다. 또, '복학생'이 존재하는 남녀공학대학의 구조는 남성적으로 구성될 수 밖에 없으며, 군사주의와 나이주의의 영향으로 여성에게서 리더의 역할을 제한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고 밝히죠. 그러나 저자는 지금까지의 연구들이 남녀공학대학교와 여자대학교 내 여학생과 남학생을 '능력'과 '성취'의 측면에서만 조명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 이로 인해 대학교육이 '도구적이고 경쟁적으로 의미화'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점 역시 지적합니다.
저자는 한국의 대학문화를 미국의 The Sisters와 비교하며 논의를 이어갑니다. 미국 동부 8개 명문 남자대학을 지칭했던 '아이비 리그'와 대비되는, 19세기 중후반의 유서 깊은 7개 여자 사립대학인 Seven Sisters는 1,300~2,750명의 적은 재학생 규모를 유지하면서 직업 전문교육이 아닌 "폭넓은 비판적 사유가 가능한 교양인 양성"에 집중하는 "자유 교양교육"을 교육과정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대학 입학 정원이 줄어들고 있으니 남녀공학으로의 전환이 '옳다'고 보는 대학의 자본주의적 논리에 대항하는 가능성으로서 미국의 사례를 소개한 것인데요. 저자는 The Sisters에서 장려되는 다양한 종류의 스포츠, 경기를 통한 네트워크 조성, 전공과 무관하게 열려 있는 여러 수업(비교문학, 글쓰기, 과학, 수학 등), 공동체로의 실천적 개입을 도모하는 교과과정 한국 여대의 사정과 비교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의 대학이 "기업의 부품 하청 공장 신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여대가 남녀공학대학과 마찬가지로 오직 '취업 경쟁력 강화'라는 양적 발전에만 주목하는 한, 그 존재 의미는 남성중심적 패권주의를 답습하는 모양이 된다고 말합니다.
'숫자'가 학교 혹은 학과 존폐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일례로, 대구대의 사회학과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이번 장례식은 최근 3년간의 학과 평가 지표가 좋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과된 사회학과 학생들이 주최한 추모행사로, "학교 재정을 안정화하려면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라는 생각에만 초점이 맞춰진 인식을 '사회학적 상상력'을유쾌하게 꼬집으려는 목표로 진행되었습니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사회학과를 폐지하는 것은 입학생 비중이나 취업률 등 '숫자'의 측면에서 존재의의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대를 남녀공학으로 전환하겠다는 논리와 분명 닿아 있습니다.
실제로 저출산으로 인한 대학 위기론과 취업률을 기반으로 대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만나면서 여대의 남녀공학전환은 피할 수 없는 흐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다수의 여대들이 입학정원을 채우지 못하면서 잇따라 폐교의 길로 접어들고 있고, 현재는 20개 이상 줄어든 75개 여대만이 그 명맥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보도된 바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셈법에 맞춰 여대의 존재의의를 훼손하는 일은 이번 동덕여대 사태에서도 드러났습니다. 학교는 '숫자'의 논리에 따라 남녀공학전환을 고려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여전히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여대는 다른 무엇도 아닌 '교육'부터 고민해야할 것입니다. 대학의 반성 없는 태도는 여대의 존재 의의 역시 흐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그 존재여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대학'이라는 교육의 장이 존재해야하는 이유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모두를 위한 길인지 고민하는 단계로 이어져야할 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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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예술'의 역할이 무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마 다양한 의견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한낮의 미술관에서 보내는 한갓진 시간으로 예술을 떠올리시는 분께는 '휴식과 이완'을, 전쟁과 폭력으로 인해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다시금 떠올리는, 일종의 매개로 여기는 분들께는 '애도와 기억'을, 그리고 내가 무심코 지나쳤거나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곳으로 눈길을 이끄는 '다시보기'를 의미할 겁니다. 오늘 소개할 작품 《언니네 미술관》을 쓴 이진민 작가는 예술을 '단어'로 소개합니다. "우리 앞에서 걸었던 수많은 여성들이 쌓아둔 희로애락의 퇴적층을 선명히 볼 수 있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이야기가 미술 작품 속에 담겨 있다고 말하죠. 이진민 작가에게 예술은 이야기의 레이어를 이루는 시간이면서, 하나의 단어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 사전인 셈입니다.
여성과 미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연결 지어 소개하는 작품은 계속 출간되고 있습니다. 각각의 책들은 저마다의 관점을 가지고 여성의 이야기를 전달해왔죠. 예컨대, 이유리 작가의 《기울어진 미술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은 예술작품 속 권력 관계에 집중하며 그림 속에 담긴 여성혐오를 예리하게 분석해내는 방식으로 미술을 소개했고요.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은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 예술가의 '괴물 같은 면'에 집중하며, "예술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때 언급되는 예술가들 중에는 성폭행범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여성 편력과 학대로 악명이 높은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있습니다. 또, 《그들도 있었다》와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현대미술가 100인'과 같은 작품에 여성이 12명밖에 들어있지 않은데 의문을 품으며, 한국 근현대 미술가 가운데 여성 작가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찾아보려는 시도를 한 결과물입니다.
한편, 《언니네 미술관》은 총 아홉 개의 단어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단어-그림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이 세상의 모든 딸들이 위로와 힘을 얻어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죠. '저자의 말'을 읽다보면 이진민 작가가 이 책을 그간 익숙하게 이야기되어온 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는데요. 그러한 고민 끝에 쓰여진 책의 구성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먼저, 「다시 바라볼 것들」 챕터에서는 근육, 마녀, 거울이라는 세 단어를 통해 우리가 다시 바라보고 해석해야할 역사, 신화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또, 「크게 바라볼 것들」에서는 슬픔, 서투름, 사소함, 익숙함, 하찮음이라는 단어를 통해 그간 사소하게 여겨져왔지만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것'들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끝으로 「함께 바라볼 것들」에서는 직선과 곡선, 앞과 뒤, 너와 나라는, 각기 다른 모양새를 가진 단어들을 하나로 엮어 단어들이 가지는 '홀로 있음'의 고귀함과 '함께 있음'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그 중에서도 「크게 바라볼 것들」 챕터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일들을 미술작품을 확대경 삼아 크게 바라보면서, 일상의 소중함과 '하찮다'고 여겨져온 많은 것들을 다시 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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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쉥크, 〈비통함〉, 1876~18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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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쉥크는 19세기 중반 활발히 활동했던 화가로, 주로 '양'을 모티브로 한 동물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비통함〉은 아기 양의 차갑게 식은 몸 앞에서 비통한 얼굴로 울부 짖는 어미 양의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주변을 둘러싼 매정한 까마귀들은 어미 양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 아기 양을 호시탐탐 노립니다.
"그림에서 우리는 비정한 사회와 기회주의적인 무리, 잔혹한 집단성, 애끓는 모정, 도움받을 곳 없는 이들의 절망 같은 것을 본다." (p.143)
작가는 오귀스트 쉥크의 작품을 보며, '조문'이라는 단어의 뜻을 되새깁니다. '슬퍼할 조'에 '물을 문'을 쓰는 이 단어는, "슬퍼하며 묻고ask, 그렇게 함께 아파해 주고, 그런 뒤에 묻는bury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죠.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수많은 참사들에 대한 '애도'를 실패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그 이유는 "묻지ask 않았기" 때문입니다. "묻지ask 않으니 묻을bury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억울하게 희생 당한 영혼들을 마음에 묻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확한 '애도'를 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함께 물을 것'을 제안합니다.
"자식의 사인은 어미에게 과연 납득할 만한 것이었을까. 자식의 죽음은 이유가 무엇이든 납득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이유조차 알지 못한다면 도저히 보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함께 물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조문이라는 아득한 단어에 '물을 문'을 넣어둔 이유다." (p.144)
얼마 전, 한국에서 26년 간 이주 아동으로 살아온 청년 강태완 씨의 사망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는 6살이 되던 해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와 자랐습니다. 미등록 이주아동인 태완과 미등록 이주노동자인 엄마는 한국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 울분과 불안을 삼키는 나날을 보내왔죠. 그렇게 오랜 세월의 고단함을 딛고 이제 막 연구원으로 채용된 그가 입사 8개월 만에 산재로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조사 나온 경찰에 잡혀갈까 무서워" 병원 주위에 머물다 경찰이 "걱정 말라"고 이야기하자 그제야 태완의 시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속했던 회사의 대표는 어머니에게 개인적으로 사과를 건넸지만, 이미 해당 장비의 조작에 능숙했던 그가 왜 유독 그날 조작에 실패한 건지 그 경위를 규명하거나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함께 물어야 할 차례입니다. 아기 양의 죽음 앞에서 비통하게 울부짖어야 했던 어미 양의 마음을 헤아리며, 묻어야ask 묻을 수bury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는 납득할 수 없는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사명으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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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함, 익숙함, 하찮음: 결코 사소하고 하찮지 않은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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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릿 도우, 〈양파를 다지는 소녀〉, 16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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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는 과거 '최음제'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양파와 젊은 여성을 함께 등장시킨 미술 작품 중에는 성적 함의를 가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죠. "수직으로 서 있는 촛대, 막자와 막자사발, 입을 벌려 뉘어놓은 주전자" 역시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요. 하지만 저자는 이 작품을 오히려 "섹슈얼한 뉘앙스를 걷어내고 메이드를 성스러운 존재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쾌활한 인상의 여성이 성실하게 양파를 갈아내는 모습과 고귀한 신분에만 사용했다는 '파란색' 안료를 사용하여 그린 앞치마, 소박한 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맑은 얼굴에서 노동의 가치와 인물의 신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죠.
그간의 해석에 대항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저자는 작품 속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된 존재에서 일상을 꾸리는 힘을 가진 존재로 탈바꿈시킵니다. 이어 저자는 '요리'를 하는 시간처럼 사소한 일이 일상에 주는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찮은 것은 편안함을 주고, 그 편안함에서 용기와 힘이 생긴다. (...) 한때 나는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힘을 잔뜩 주는 것이 젊음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에 힘을 주지 않으면, 나에게도 나를 둘러싼 세상에도 의미 있는 변화 같은 건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 지금은 그렇지 않다. (...) 가끔은 그저 보드라운 '숨소리'만으로도 좋다고 믿는다. (...) 무수한 작은 목소리와 숨소리들도 세상에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218)
연말이 되니 잔뜩 힘이 들어간 새해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 역시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리추얼이라고 가볍게 생각한다면 괜찮겠지만, 무리한 계획이 독이 되어 나의 일상을 마비시키고 스스로를 주눅들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 사소하고 하찮은 일을 통해 지탱하는 일상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사람들의 얼굴도 한 번씩 떠올려보면 좋겠어요. 최근 함께 근무하던 군무원을 잔인하게 살해한 양광준의 신상이 공개된 일을 포함해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남성에 의해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가해자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삶도 하찮고 조그마한 일들에 의해 평범하게 굴러갈 수 있었겠지요. 왜 어떤 이들에게는 소소한 일상이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 이 역시 작은 목소리라도 보태어 함께 물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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