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들불 구구입니다. 윤석열 파면 이후 마음의 무게를 1g 정도 덜어내고 인사 드릴 수 있어 조금은 후련합니다. 아직 산재한 투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한 스텝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모두에게 수고하셨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매일 같이 광장으로 향하던 분들, 맘 졸이며 뉴스를 보고 들으셨던 분들에게 잠시나마 한숨 돌리고 신발끈을 좀 더 단단하게 조일 수 있는 시기가 되길 바랍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한 시민단체의 활동가로 근무 중인데요. ‘윤석열 파면’을 외치던 광장의 시간은 끝났지만, 내란청산과 대선 대응을 위해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모색하는 중입니다. 약속 드린대로 매주 들불레터로 찾아오는 일이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시민활동으로서의 들불레터를 지속해나갈 수 있도록 힘 닿는 데까지 애쓰겠습니다. 당분간 레터가 간헐적으로 발행되더라도 너른 양해 부탁 드립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작품은 샬롯 브론테의 《셜리》 입니다. 알라딘에서 북펀딩이 진행될 당시 3500%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달성률을 기록했던 화제의 초역본이죠! 책을 좋아하시는 들불레터 구독자 분들께서도 많이들 북펀딩에 참여하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다만 《셜리》가 총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다 한 권당 페이지 수가 450쪽 정도여서 받아보신 분들께서도 읽고 계시거나 읽을 계획을 세우는 중일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들불레터는 《셜리》 1, 2권을 효과적으로 이해해보고 싶은 독자 분들께 가이드가 될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이에 대한 주관적인 설명을 덧붙여 보려고 합니다. 브론테의 다른 작품이 그렇듯 이 작품 역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아지는 작품입니다. 브론테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내용을 감히 추측하며, 그 방향을 조심스레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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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워드가 되는 각각의 문장들은 모두 《셜리》에서 발췌한 문장들입니다. 《셜리》를 읽으실 때 각각의 문장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껴보세요!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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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의 시대적·공간적 배경은 1810년대 영국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셔입니다. 당시 유럽은 나폴레옹전쟁으로 경제적 불황기를 겪고 있었고, 강도 높은 노동에 비해 적은 임금으로 고통받던 노동자들이 기계 도입으로 인해 실직되는 이중고에 처한 절망적인 시기였습니다. 그 중 요크셔는 방직 산업이 발달한 곳으로, 기계를 이용한 산업 자동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곳 중 한 곳이었는데요. 방직기와 같은 기계 도입으로 기존의 공장제 수공업 시대는 끝났고, 적은 인력과 인건비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미숙련공에게 일을 맡겨도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니, 공장주들은 그간 일을 해온 숙련공들을 해고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반발한 숙련공들이 기계를 파괴하는 폭력 행위를 저지르게 된 것이 바로 ‘러다이트 운동’입니다.
러다이트 운동을 접한 시인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바이런은 의회에서 이렇게 발언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절망과 그로 인한 동요에는 더 깊은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단결하여 자신들의 안락함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생계 수단을 파괴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안락함과 당신들의 안락함과 모든 사람의 안락함을 파괴한 것은 바로 지난 18년 동안의 파괴적인 전쟁, 즉 참담한 정책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잊을 수 있습니까? (중략) 이 사람들은 기계가 무용지물이, 아니 무용지물보다 더 나쁜 물건이 되기 전까지는 자신들의 기계를 결코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바이런의 발언에 따르면, 러다이트 운동은 폭력적인 양상을 띠고 있긴 하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창구가 마땅치 않은 점에서 시작된 변화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러다이트 운동이 있기 몇 해 전인 1799년에는 단결금지법이 통과되면서 노동조합 결성 등이 저지되었기 때문에 러다이트 운동은 일찍부터 예견된 노동운동이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참정권이 일정 수준의 재산을 가진 부유한 남성에게만 허락되었고, 정치 역시 귀족 중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러다이트 운동은 절박한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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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셜리》의 주요 인물인 ‘로버트 무어’는 공장주로서 바이런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인물입니다. 그는 새로운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개인적인 경제적 난관을 극복하고자 하는 남성으로, 일자리를 잃고 궁핍한 상황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자신의 기계를 부순 것에 대해 엄벌하고 싶어하는 인물입니다. 노동자들의 어려운 사정은 잘 알고 있었지만, 가난에 억눌려온 자신의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으로, 이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야심으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인물이죠. 이에 또 다른 등장인물인 ‘캐럴라인’은 그의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 중 하나의 방법으로 캐럴라인은 무어에게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를 함께 읽자고 제안합니다.
《셜리》 1권 6장의 제목이기도 한 ‘코리올라누스’는 셰익스피어의 최고의 비극이라는 평을 받는 작품인데요. 이 작품 속 배경이 되는 1600년대 전후로 잉글랜드에는 굶주린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오만한 코리올라누스는 귀족이자 장군으로서의 자긍심과 오만함으로 시민들에게 권력이 주어지는 것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냅니다. 캐럴라인은 코리올라누스의 일면이 무어와 닮았다는 자신의 생각을 부드럽게 암시하며 무어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시도합니다.
“그럼 코리올라누스한테서 당신과 비슷한 점을 느꼈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
“당신은 내가 그들에게 굽히기를 바라나요?” “아뇨, 전혀 아니에요. (…) 하지만 가난한 노동자들 전부를 ‘폭도’라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묶어버리고, 계속해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다루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당신은 작은 민주주의자로군요, 캐럴라인. (…)”
(p.133~135, 《셜리》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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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여성들은 정부의 논의들과 관련하여 어떠한 직접적인 발언권도 없이 독단적인 지배를 받고 있을 뿐이지만, 나는 언젠가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이 나라에서 전체적인 대의제 체계가 전제 정치의 편리한 도구가 돼 있을 뿐이어도 여성들은 불평할 필요가 없다. 자녀들의 입에 빵을 넣어줄 수 없음에도 왕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 무수한 중노동 기계공 계급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대표자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메리가 서술했듯 여성은 러다이트 운동을 주도한 노동계급과 마찬가지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을 박탈당한 존재였습니다. 19세기 초반, 산업혁명의 기틀을 마련했던 탄광노동에는 다수의 여성과 아동이 투입되며 착취적인 노동환경에 놓였고, 방직기 도입 이후에도 여성들은 터무니 없이 낮은 임금을 받으며 노동력 또한 하찮게 취급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여성들은 ‘계속해서’ 노동하는 존재였지만 그들의 노동은 예나 지금이나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부정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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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셜리》에서는 여성 노동의 구체적인 모습을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요? 《셜리》의 등장인물인 ‘캐럴라인’은 숙부의 물질적 도움에 의존하는 가난한 여성입니다. 그는 노동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작품 곳곳에서 드러내지만, 수만갈래로 뻗어나갈 지 모를 욕망의 근원을 계속해서 억누르는 인물인데요. 아래 대목은 그가 욕망을 강박적이고 금욕적으로 억누르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을 무어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향한 상사병으로 해석하지만, 독자는 이 대목에서 그가 자신의 욕망을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서 여성이 상상가능한 범주, 즉 ‘사랑’으로 전치시켜 해석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알게 된 대로 받아들여야지, 질문을 하거나 불평을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다. 빵을 기대했는데 돌아오는 것이 돌멩이뿐이라면, 돌멩이에 이가 깨지더라도 신경이 고통을 느낀다고 비명을 질러서는 안 된다. (…) 전갈이 손바닥을 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 고통으로 오랫동안 덜덜 떨고 나면 움켜쥔 전갈은 죽을 것이고, 당신은 어떻게 울지 않고 견디는지 큰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 이 시험에서 살아남는다면 그 이후로는 평생토록 더 강해지고, 더 현명해지고, 더 무뎌질 것이다.” (p.151, 《셜리》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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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셜리’는 대저택과 부를 물려받은 상속인입니다. 그는 자선을 통해 궁핍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돕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나는 불행을 예방하고 싶어요. 부자들에 대한 가난한 사람들의 적개심이 고통에서 나왔다는 것을 낮이든 밤이든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자기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우리를 증오하거나 질투할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들의 고통을 누그러뜨리고 증오심을 줄여주기 위해 내 재산을 쓰게 해줘요.” (p.377, 《셜리》 1권)
셜리와 같은 상류층이 이러한 생각을 가진다는 게 현대적인 관점에서 예외적이고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는 고통을 이해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독자는 이 대목에서 셜리가 계급적인 좌절을 경험한 인물은 아니지만, 여성으로서 차별 받은 경험으로 인해 각인된 고통을 '계급'의 자리에 대입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즉, 그가 경험한 젠더 차별의 경험이 곧 계급 차별의 경험과 상호교차적으로 얽히게 된 셈이죠. 셜리에게 일자리를 잃은 노동계급은 독해불가능한 타자적 집단인 동시에 평생 실업한 채 살아가야 하는 독신여성의 위치에서 닿을 수 있는 집단이기도 합니다.
또한 셜리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여성이 갖는 형편 없는 공적 영향력을 의식하고 이를 해소하고자 '남성성'을 연출합니다.
"저는 향사랍니다. 셜리 킬더 향사가 제 호칭이고 작위예요. 부모님은 저에게 남자의 이름을 주었고, 저는 남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요. 저에게 남성성을 조금은 불어넣어주기에 충분하지요. 제라르 무어같이 위풍당당한 앵글로-벨기에인이 제 앞에 서서 저에게 심각하게 사업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때면 제법 신사가 된 기분이에요." (p.286, 《셜리》 1권)
셜리가 스스로를 '킬다 대장'이라 칭하며 남성성을 연출하는 모습은 특히 사업 이야기를 할 때에 두드러져보입니다. 이는 현대의 여성들이 가진 일면, 파워포즈를 취하거나 쿠션어를 지양하는 등의 사소한 노력과 겹쳐 읽히는 장면이라 개인적으로는 조금 괴롭게 읽힌 대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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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너도 네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모르는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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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셜리》의 결말부를 읽으면서 떠올린 작품은 이디스 워튼의 《버너 자매》였습니다. 《버너 자매》 의 등장인물인 두 여성은 '셜리'의 처지와 달리 산업화의 중심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하층민 입니다. 자매는 매일 열심히 일하지만 날이 거듭될수록 더한 가난으로 추락하고, 그러한 가운데 선택하게 된 결혼조차 절망적으로 마무리하게 되면서 슬픈 결론을 맞이합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읽을 때 굉장한 무력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혔었는데요. 가난한 여성의 자유 의지를 단 한 순간도 허락하지 않는 이디스 워튼의 현실적이고 냉정한 글이 사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여성의 삶을 가장 날 것 그대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의 삶이 종종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오는 허망함이 제게 진한 여운을 남겼었던 거죠. 그런데 《셜리》를 읽으면서도 저는 묘하게 비슷한 감상에 빠져 들었습니다. 《셜리》에서 묘사되는 '여성으로서의 무력감'이 2025년을 살고 있는 제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거든요. 《셜리》의 여성 인물들이 맞이하게 되는 결말이 저자인 샬럿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비관적으로 경험한 결과물이란 게 느껴져서 조금은 막막한 기분으로 책장을 덮게 되었는데요. 여러분에게는 《셜리》의 결말이 어떠한 감상을 남길 지 궁금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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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리》는 바느질, 요리 등을 '만족하면서, 꾸준히, 불평 없이, 한평생' 해야 했던 여성들의 '사적'이라고 치부되는 삶과 남자들의 것으로 여겨졌던 공적인 영역(이성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이 만나고 부딪히고 얽히는 지점들을 날카롭게 포착해낸 작품으로, 당대의 비평가에게 혹평을 받은 것과는 달리 굉장한 수작으로 평가될 만한 소설입니다. 제가 읽은 브론테의 작품 중 가장 페미니즘적인 소설이라고 생각되는 작품이기도 한데요. 데뷔 소설 《제인 에어》 이후 보다 더 예리하게 벼려진 필력으로 여성의 문제를 정확하게 담아 냈거든요. 또, 샬럿이 타협했다고 생각되는 지점들까지도 전부 여성이 경험했던 억압적인 가부장적 지배의 역사의 구체적인 한 단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성에 의해 다시 쓰인 역사 소설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양한 평가와 해석이 가능한 동시에 현대에도 적용가능한 문제의식이 담긴 《셜리》! 이 작품을 통해 고전이 남기는 "창조적인 혼란"을 경험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라며 오늘의 들불레터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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