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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들불레터에서 '남성성'이 낳은 여성혐오 폭력과 그 중 계속해서 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교제폭력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번 들불레터는 가정폭력, 교제폭력, 딥페이크 성범죄 등 여성혐오 범죄 피해자 곁에서 직업인으로서 그들을 지지하고 조력해온 변호사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대로 된 처벌에 집중하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피해자를 외면하지 않고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일도 중요하겠지요. 이번 레터를 읽고, 구독자 여러분도 바통을 이어 받아 피해자의 곁에 서서 '말'을 잇는 과정에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 (광고) 『법정 밖의 이름들』, 서혜진 (흐름출판)
① 침묵을 여는 법: 법률은 이름 없는 폭력들을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까? ② 존재를 증명하는 말들: 침묵을 깬 피해자들은 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할까? ③ 마무리하며 ④ 《법정 밖의 이름들》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 《법 짓는 마음》, 이보라 지음 (유유) - 《교만의 요새》,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박선아 옮김 (민음사) - 《인식적 부정의》, 미란다 프리커 지음, 유기훈·정선도 옮김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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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저는 변호사, 의사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 소위 ‘전문직-엘리트’의 책을 선호하지 않는 독자입니다.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연이 곧 작가로 분한 직업인의 브랜딩이 되는 경향에 대한 염려가 있고, 특히 피해 생존자나 통증, 질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작가의 해석에 의해 임의로 위치 지어지는 상황에 대한 문제 의식이 있습니다. 이는 ‘당사자만이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직업인이 당사자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윤리의식을 묻는 것입니다. 실제로 의사가 쓴 책은 당사자의 허락을 구했다고 할 지라도 해당 경험을 풀어내는 방식 때문에 비판을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판사나 변호사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그 비판이 덜한 것 같습니다만, 제가 만난 일부 책들도 아쉬운 점이 많았어요.
책을 소개하기에 앞서 제 취향을 늘어 놓는 것이 저어됐지만 굳이 밝힌 이유는, 오늘 소개할 책 《법정 밖의 이름들》이 제게 전혀 다른 경험으로 다가온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쓴 저자 서혜진은 성폭력, 스토킹, 디지털 성범죄, 가정폭력, 아동학대 등의 법률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범죄 피해자의 곁에 서서 법률 대리인의 역할을 해온 변호사입니다. 한국 법조계의 토양 위에서 제대로 조명받을 수 없었던 케이스들을 우직하게 맡아 온 그는 감상에 젖어 범죄 피해자를 동정하거나 그들의 경험을 어려운 용어로 해석하며 이해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식으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
이 책은 범죄 피해자를 변호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이해한 저자가 “특별한 정의”나 “대단한 결말”, “‘사이다’”에 대한 의식 없이 그저 ‘과정’으로서 기록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 저자는 피해자의 ‘말’이 갖는 법률, 제도와의 거리감을 가늠할 수 있도록 각 케이스를 통해 갖게 된 직업인으로서의 문제의식을 나누고, 존엄을 되찾는 과정에서 상당한 침묵과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력자로서 담백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전달합니다. 변호사로서 그가 가진 전문성과 지식이 피해자의 삶과 긴밀하게 연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책의 전반에서 한 순간도 잊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책에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이나 지식의 깊이가 분명하게 전달되는 한편, 책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거창한 ‘사명감’이라기보다는 피해자와 함께 걷는 동료로서의 애정, 고통을 나누는 우정에 더 가깝습니다.
오늘 〈들불이 만난 이야기〉는 서혜진 변호사의 책을 중심으로 범죄 피해자, 들불레터로 이어 온 ‘계보 잇기’ 작업의 다음 주자로 구독자 여러분을 초대해보려고 합니다. 우리 같이 관심 갖고, 귀 기울이고, 바통 넘기듯 사회적 인식 개선이라는 변화로의 여정에 피해자 곁에 서는 ‘말’을 잇는 과정을 함께 겪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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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묵을 여는 법: 법률은 이름 없는 폭력들을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까?
- 2차 피해: 2018년 12월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제정을 통해 법률에 포함되다
“기존의 법률 언어와 사고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 하지만 변화는 존재한다. (...) 지금은 이름조차 없는 피해들도 언젠가 법률이 끌어안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p.45)
- 스토킹: 2013년 「경범죄처벌법」에 ‘지속적 괴롭힘’으로, 2021년 3월 “노원구 김태현 살인 사건” 등 무수한 스토킹 살인 사건을 경험하며 「스토킹범죄의 처벌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다
“느린 걸음이지만 법률은 한걸음씩 이름 없는 폭력에 다가가고 있다.” (p.47)
- 딥페이크 성범죄: 2024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의2에 따라 반포의 목적이 없어도 편집·합성 행위 자체로 처벌이 가능하며, 소지·구입·저장·시청한 행위도 모두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다
“물론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법률의 변화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응답이자, 책임 있는 대답이기도 하다.” (p.77)
《법정 밖의 이름들》 1부 「침묵을 여는 법」에서 저자는 법이 어떻게 피해자를 끌어안고 있는지, 또 어떻게 바깥으로 밀어내는지 ‘법률’이라는 언어와 피해자의 언어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본 챕터입니다. 저자는 피해자가 사용하는 언어에 집중해 ‘피해자다움’을 촘촘하게 요구하는 수사기관과 그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사회인식의 문제, ‘교제폭력’이나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이 포섭하지 못하는 범죄 피해자들, ‘진짜 피해’, ‘가짜 피해’라는 제도적 편의상의 이분법에 의해 피해자의 자리 밖에 머물게 되는 피해자들의 사정까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들여다 봅니다. 또, 법률이나 제도, 더 나아가 사회적 인식의 개선까지 촉구하죠.
규범을 위반하거나 규범의 속성에 들어 맞지 않는 언어는 권력에 의해 밀려 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오롯이 담아낼 말이 충분하지 않아” 상대를 설득하기 어려운 언어, “피해가 너무 오래, 너무 깊게, 너무 일상적으로 스며들어” 진술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언어가 그렇습니다. 사회체제를 유지하는데 주된 기반이 되는 ‘법률’ 언어는 권력자들에 의해 제정되고 집행되며, 그들이 머무는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못할 말들은 쉽게 무시 당하고 탈락됩니다. 사실 법이 해야할 역할은 언어의 전달 방식이나 설득력 같은데 집중하는 게 아니라 잘 듣고, 피해자가 언어를 좀 더 꺼내놓을 수 있도록 독려하는 일인데도요.
이러한 사정을 법조인인 저자 역시 지식으로, 또 경험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에 그는 각 장에서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법’이 피해자의 곁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한다고, 법이 모든 걸 해결해주진 못하더라도 피해자의 말에 최소한의 응답을 해야할 책무를 지닌다고요. 중요한 점은 저자가 비관적인 태도로 일관하기보단 느리게나마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회운동을 하거나 사회 의제에 관심을 갖다 보면 변화가 더디거나 아예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자주 그러한 순간들을 경험하는데요.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피해자와 함께 걸어온 길이 의미 없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 기뻤고 도리어 기운이 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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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존재를 증명하는 말들: 침묵을 깬 피해자들은 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할까?
“최말자의 재심은 단지 과거의 오류를 바로잡는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정의를 기억하고, 누구의 이야기를 기록할지의 선택이다. (...) 나는 법이 말하는 정의와 우리가 살아가는 정의가 조금 더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p.104)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린’ 최말자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얼마 전 드디어 새로운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지난 7월 23일, 재심청구일로부터 5년, 사건발생일로부터 61년만에 ‘성폭력 가해자의 혀를 절단시킨 중상해죄’가 무죄 구형을 받았거든요. 《법정 밖의 이름들》 2부는 여전히 진행 중인 “열아홉 소녀 최말자의 이야기”를 다루며 시작합니다. 이 챕터에서 그는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는 가르침이 현실에서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살피고, 다시 법에 질문을 던집니다.
법원의 언어인 ‘판결’은 단순한 결론을 넘어, 사회가 정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어떤 판결은 불평등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거나, 오히려 그 불평등을 강화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1965년, 최말자에 대한 법원의 판결(“성폭력을 당하는 순간에도 결코 가해자의 혀를 깨물어서는 안 돼!” (p.103))입니다.
저자는 최말자의 이야기를 통해 판결문이 가지는 무게를 강조합니다.
“판결문을 단순한 문서나 종잇조각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우리의 삶,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 (p.104)
사실 판결문은 자주 접해본 사람이 아니면 읽기 힘든 언어입니다. 찾아서 읽는 것도, 찾은 다음 깊이 이해하며 읽는 것도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우리는 종종 판결문에 반영된 법률이나 법리보다는 판결문의 결론, 그러니까 유/무죄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사건을 정의롭게 종결시키는 결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중요한 건 판결과 판결문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이는 법률 전문가에게는 당연히 중요시 되어야 할 일이고요, 시민들도 의식해야할 지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변화는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성적 수치심이라는 표현을 성적 불쾌감으로 변경한 대법원 양형위의 결정이 그렇습니다. 피해 감정을 고려한 변화는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으면 법조계의 시간은 더욱 느리게 흐를지도 모릅니다. 《법정 밖의 이름들》은 바로 이러한 인식을 심어주는 책입니다. 관찰자, 방관자로서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피해자의 곁에 적극적으로 설 수 있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해요. 그리고 판결문 속 언어가 피해자의 존재를 지우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증언하고 기록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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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무리하며
《법정 밖의 이름들》을 읽고 나면, 그가 피해자와 함께 걸어온 길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서혜진 변호사는 법과 제도의 언어에 작은 균열을 내고, 그 틈으로 피해자의 ‘말’이 스며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그 길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제안합니다.
그의 기록을 읽다 보면, 피해자의 곁에 선다는 것이 거창한 사명감보다 ‘말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좁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피해자와 서혜진 변호사로부터 받은 바통을 우리 각자가 이어받을 차례입니다. 지속적인 관심과 실천이 모일 때, “법 테두리 바깥의 정의”를 찾고 구현하는 언어가 만들어질 거예요. 그 여정을 《법정 밖의 이름들》과 함께 시작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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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법 짓는 마음》, 《교만의 요새》, 《인식적 부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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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정 밖의 이름들》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법정 밖의 이름들》이 범죄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조력하는 변호사의 책이라면, 《법 짓는 마음》은 입법 과정에 힘을 보태온 국회 보좌관, 입법 실무자의 책입니다. 부당한 일을 당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시민을 비호하는 처벌법, 억울한 죽음에 얽힌 진상을 규명해줄 특별법 등 각종 자료를 수집해 당사자를 보호해줄 수 있는 법안의 디테일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아온 저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법을 만들고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 그래도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조금의 희망을 품게 됩니다.
② 《교만의 요새》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이 책에서 미투 운동 이후 미국에서 일어나는 중인 '성평등 혁명'을 살핍니다. 그러면서 미투 운동에서 지목당했던 가해자들이 저지른 차별과 폭력의 근원에 '교만'이 있음을 밝히는데요. 보통 '교만'은 스스로 우월하다고 인식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행태를 일컫습니다만 이 책에서는 '교만'을 상하가 존재하는 권력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 해석하며 논의를 전개합니다. 이어 그는 가해자들을 지탱해온 사회 규범과 문화, 즉 미국 남성들이 '젠더적 교만'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교만에 맞서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나와 다른 상대, 심지어 나를 혐오하는 상대와 대화가 가능할까?'라는 질문이 자주 떠오르는 요즘인데요. 이 책에서 가능성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요?
③ 《인식적 부정의》
이 책의 저자 미란다 프리커는 사회적 소수자 혹은 차별과 혐오 범죄의 피해 당사자가 자신이 경험한 부당한 피해를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하는데에서 출발하여 이들의 경험이 '고정관념'이나 '무시', '차별'과 같은 "지나치게 포괄적인" 단어로 정확하게 설명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그가 개념화한 '인식적 부정의'란 인식적으로 '부당함'을 일컫는데요. 인식적 부정의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데요. 앞서 살펴본 《법정 밖의 이름들》에서 언급된 범죄 피해자들은 어떠한 유형의 부정의에 놓여 있는지 살피며 함께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인식적 부정의의 첫 번째 유형을 증언적 부정의로, 두 번째 유형을 해석학적 부정의로 명명하고자 한다. 증언적 부정의는 편견이 청자로 하여금 화자의 낮은 신뢰성을 부여하도록 할 때 발생한다. 반면 해석학적 부정의는 이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집단적 해석 자원의 격차로 인해 누군가가 자신의 사회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서 불공정한 불이익을 받게 될 때 초래된다." (《인식적 부정의》)
"증언적 부정의의 (핵심 사례에서의) 일차적 해악은, 청자의 정체성 편견으로 인해 [화자가] 지식을 공유하는데서 배제된다는 데 있으며, 해석학적 부정의의 (핵심 사례에서의) 일차적 해악은, 집단적인 해석학적 자원 내의 구조적 정체성 편견으로 인해 [화자가] 지식을 공유하는 데서 배제된다는 데 있다."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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