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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들불레터에서는 애나 펀더의 『조지 오웰 뒤에서 - 지워진 아내 아일린』 을 소개하였습니다. 오늘 레터를 읽고 아일린의 존재를 복원하고, 그를 오웰의 곁에 세우는 일에 여러분도 동참해보시죠! 🤗
📚 들불이 만난 이야기(*레터 하단에서 도서 증정 이벤트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조지 오웰 뒤에서 - 지워진 아내 아일린』, 애나 펀더 지음, 서제인 옮김 (생각의힘)
-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 『교정의 요정』, 유리관 지음 (민음사)
- 『괴물들』,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을유문화사)
-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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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릴 때 시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세상을 ‘시’를 통해 바라보고 싶다는 욕심이 담긴 소망이었어요. 단어를 아름답게 그리고 새롭게 사용하며 세계를 단단하게 공글리는 작업은 오직 시만이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어느 날 제가 많이 의지했던 도서관 사서 선생님께 제가 쓴 시를 보여 드렸어요. 사서 선생님이 주인공인 시였기 때문에 보여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시를 읽고 조지 오웰의 작품들을 추천해주셨는데요. 제 시가 그의 글을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제 시에 어떤 ‘정치성’이 담기길 바랐던 선생님의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시는 어딘가 텅 비어있었어요. 나도 있고, 선생님도 있지만 세계는 없었달까요. 마치 내가 처음부터 혼자서 존재했던 것처럼 내 시에는 텅 빈 기표들만 가득했습니다. 이후 저는 선생님 덕에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심지어는 내가 사랑했던 시들이 그러한 세계의 토대 위에서 세계를 허물어보고자 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선생님이 제 세계로 초대했던 또 한 사람, 조지 오웰이 있었습니다.
조지 오웰은 1946년 <갱그럴>지에 게재한 산문 《나는 왜 쓰는가》에서 ‘정치적 글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씁니다.
“내가 시작하는 지점은 언제나 누군가를 분명히 편들고자 하는 감정, 무언가가 부당하다는 감각이다. 자리에 앉아 책을 쓸 때면 나는 ‘이제부터 예술작품을 만들어내야지’라고 되뇌지 않는다. 나는 까발리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주의를 집중시키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에 책을 쓴다...” (p.32, 《조지 오웰 뒤에서》에서 재인용)
오웰의 이 글은 제게 예술과 정치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 거듭해서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불의에서 촉발된 번뜩이는 불씨를 원고 위에 올려다 놓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오웰이 말한 것처럼 정말 수도 없이 실패를 하고 있고, 지금 이 원고를 쓰는 순간에도 실패를 예감하고 있지만 제가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데에는 오웰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저는 조지 오웰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밑줄을 긋고, 필사를 하고, 오웰이 가진 철학을 제 글쓰기의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으면서요. 리베카 솔닛이 쓴 《오웰의 장미》를 읽으면서는 사회주의자가 장미를 심는 일에 대해, 그가 투쟁의 기초로 삼았던 미학적 욕망에 대해 생각하며 약간의 존경심마저 가졌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마감이 있어 내내 노트북을 붙들고 있던 어느 저녁이었습니다. 밥도 해 먹어야 하고, 밀린 빨래도 해야 하는데다 두 명의 고양이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에서 글을 쓴다는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제가 생활인으로서 탈락했다는 감각과 이런 상태에서 글을 쓴다는 게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파열음을 내고 있었어요. 저녁을 해 먹을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배달앱을 들여다보면서 저는 어쩌면 내가 불의에서 불씨를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들을 제쳐두고 타인에게 외주 주면서 생겨난 모순, 그리고 모순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불씨를 ‘불의에서 발견한 불씨’인 척 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 명의 기만자가 되어 볶음밥을 시켜 먹었습니다(어쩌면 지금 이렇게 쓰는 것 역시 제가 성찰할 줄 아는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제 안의 깊이 있는 윤리성을 어필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기며 또 한 번의 기만을 저지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이때 이런 질문이 떠올랐어요. 걸작을 쓴 작가들은 어땠을까? 어떻게 집필 노동과 가사 노동을 병행할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 글쓰기는 생활과 어떻게 만나고 부딪혔을까? 이 질문은 제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작가 조지 오웰에게도 당연히 향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은 바로 《조지 오웰 뒤에서 - 지워진 아내 아일린》에 적혀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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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일린 오쇼네시 블레어. 오웰 아카이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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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일린의 뒤에서 - 다시 쓰는 오웰의 삶
먼저 《조지 오웰 뒤에서 - 지워진 아내 아일린》이 어떤 책인지 설명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 책은 작가 ‘애나 펀더’의 논픽션으로, 조지 오웰이 쓴 아래의 문장에서 시작된 집요한 탐사 작업의 결과물입니다.
“여자들에 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하나는 그들이 구제할 길이 없을 만큼 지저분하고 단정치 못하다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의 무섭도록 탐욕스러운 성욕이었다.” (p.33~34, 오웰의 투병 시기 노트 재인용)
오웰이 자신의 첫 아내 아일린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이 글은 저자가 “그 남자(오웰)에게서 그의 아내에게로” 옮겨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오웰은 여자들을, 다시 말해 아내들을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는지, 혹은 무엇을 ‘요구하는지’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청소는 충분하지 않고 섹스는 너무 많이 요구한다고 말이다. 그럼 아내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내게 첫 번째로 떠오른 생각은 이렇다. 아마 청소는 너무 많이 해야 했고, 섹스는 충분치 않았거나 충분히 근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p.35)
애나 펀더는 거듭해서 자신이 오웰의 작품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독자인지 이야기합니다. “그의 작품들을, 혹은 그를 어떤 식으로든 끌어내리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쓰는 “이야기로 인해 그가 ‘취소’될 위험에 처할까봐 걱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취소될 위험에 대한 불안한 예감 이전에 아일린은 이미 가부장제에 의해 “취소”되어 버린 인물입니다. 애나는 아일린이 쓴 편지들을 토대로 그의 삶을 재구성합니다. 오웰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일린의 목소리를 통해서 아일린과 오웰 부부의 삶 전체를 재구성하기로 결심한 것이죠.
이 책은 읽기에 유쾌한 작품은 아닙니다. 저처럼 조지 오웰의 철학을 인생의 참조점으로 삼았던 독자에게는 더더욱 그럴 겁니다. 그의 성생활뿐 아니라 그가 아일린에게서 고마움도 모르고 받아온 수발 노동에 대해 서술된 대목은 단숨에 읽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을 찌릅니다. 읽는 내내 마치 묵직한 돌 몇 개가 제 심장을 누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조지 오웰의 세계가 단지 그가 불의에 대해 갖고 있는 매서움만으로 지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가부장제는 한 편의 허구다. 모든 주요 인물은 남성이고, 세계는 남성들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여성들은 그들을 보조하는 배역, 아니 계급이다. 우리 모두 그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고, 그 이야기는 너무도 강력해서 현실을 대체해 버렸다. (...) 이 허구에서는, 두 가지 주된 목적의 사라지게 만드는 속임수가 있다. 하나는 여성이 하는 일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성이 그 모든 일을 혼자서 해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다른 하나는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행동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성을 결백해 보이게 한다. (...)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오웰이 표현했듯, 까발리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주의를 집중시키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공교롭게도 어떤 사람이.”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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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가적인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발 노동
오웰이 밝혔듯 1936년은 오웰에게 굉장히 중요한 해였습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가난이라는 주제를 다룬 네 작품을 엮은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이전에 출간한 네 권의 작품을 합친 것보다 많이 읽힌 것으로 잘 알려져 있죠. 그만큼 중요한 작품을 썼던 이 시기, 오웰은 신혼 생활을 이어가는 중이었습니다.
오웰은 자신의 마지막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 내가 빈둥거리고 있다고, 해야 할 작업이 늦어지고 있다고, 결과물의 양이 다 합쳐 봐도 비참할 정도로 적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날은 말 그대로 단 하루도 없었다. 심지어 하루에 10시간씩 일하고 일주일에 네댓 편의 기사를 써내던 시기에도 신경을 갉아 먹히는 듯한 이런 느낌(...)” (p.120, 재인용)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던 오웰에 대해 애나 펀더는 이렇게 씁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니다. 아일린이 그를 위해 시간을 더 만들어주고 있다. 오웰이 자기 삶을 스스로 관리했더라면 결코 가질 수 없었을 만큼 많은 시간을 제공하고 있다. 아일린은 에이전트와 주고받는 편지를 포함해 오웰의 서신 업무 상당수를 처리한다. 부부의 사교 모임을 계획하고, (4.8킬로미터 떨어진 발독 마을에 버스를 타고 가서) 필요한 모든 생필품을 구입하고, 청소 대부분을 담당한다. (...) 그가 글을 쓰는 동안 아일린은 (...) 넘쳐흐르는 물을, 오물 구덩이를, 가게 일을, 집안일을, 정원 일을, 오웰이 앓는 여러 가지 병을, 닭들을, 염소를, 그리고 손님들을 돌본다.” (p.120-122)
책을 읽다보면 아일린이 오웰과 함께 살며 한 일들을 ‘돌봄’ 정도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는 감상을 받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유리관의 《교정의 요정》 일부를 빌려와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수발자본주의는 이른바 돌봄선언의 악몽 같은(=현실의) 버전이다. 돌봄 대신 수발이다. (...) 노동자가 자본가를, 남반구가 북반구를, 여성이 남성을, 약자가 강자를, 종들이, 여전히 양반들을 수발들어야 한다는 식이다.” (p.245, 《교정의 요정》)
아일린이 오웰과 결혼생활을 이어오면서 한 일이나 결정들을 격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분별 없이 남편만을 위해 가사노동에 복무했다는 식의 해석도 하고 싶지 않고요. 다만 아일린이 지나치게 오웰을 수발하기 위한 노동을 해야했을 때, 오웰이 10대 아랍인 여성을 성구매하는 일을 허락하도록 강요 받았을 때, 그리고 각종 장소에서 다른 여자들을 덮치고 팬들과 은밀히 만날 약속을 잡을 때, 그 외에 아일린의 존엄을 해치는 모든 일들이 반복될 때 아일린은 그를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에 대해 애나 펀더는 이렇게 씁니다.
“아일린은 왜 오웰 곁에 머무르며 그를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지적으로, 그리고 다른 모든 면에서 떠받치기 위해 일하는 걸까? (...) 자신의 가장 심오한 자아를 해치는 일에도 괜찮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길들여지는 방식의 정점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우리를 이용하는 체제에 동조하도록 길들여진다. 그러고는 결국 우리가 동의했다고,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 원한 일이라고 말하게 된다. 어떤 경우든 우리는 ‘분명 그것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간주되고, 우리가 고통받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로 남을 것이다.”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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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렇다면 우리는 조지 오웰의 글을 전부 폐기해야 할까?
오웰이 아일린에게 그랬던 것처럼, 타인을 착취해야만 위대한 글이 탄생할 수 있다면 그 글의 쓸모와 의미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토록 형편없는 조지 오웰의 행태로 인해 그의 글을 전부 ’폐기‘하는 것만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오웰이 먼저 고민한 듯 합니다. 오웰은 (마치 자신을 변호하듯) 여자를 학대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디킨스에 대해 쓴 에세이에서 주장합니다. “작가가 사적인 삶에서 여자를 학대했다는 사실이 우리가 그의 작품을 읽는 방식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말예요. “작가의 문학적 개성은 그의 사적인 인격과 거의, 혹은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는 “상자 속의 여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고려하지 않습니다.
애나 펀더는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바라봐야할지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 사람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저 작품이 나온 근원일 뿐이다. 그 두 가지가 일치하기를 바라고, 그렇지 않다면 ‘취소’라는 처벌을 가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압제다. 그 압제에서는 어떤 예술도 탄생할 수가 없다.” (p.322)
그러나 저자는 덧붙입니다.
“어떤 작가든 독자든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실체 사이의 간극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여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p.323)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페미니즘이 제기한 오랜 의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이나 지젤 사피로의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통해 좀 더 고민해볼 수 있습니다.
“나 또한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입장인 적이 있었다. 그 괴물이 나에게 한 짓을 기억하고 있다. 이 문제에 거리를 유지하며 냉담한 태도로 접근할 수 없다. 나는 그 고소인들에게 공감한다. 나도 고발자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예술을 소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에 앞서 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엇도 놓치고 싶지 않다. 왜 꼭 그래야 할까? 왜 〈차이나타운〉이나 〈슬리퍼Sleeper〉를 빼앗겨야 할까? 내가 여성으로서 겪어 온 아픈 일들과, 위대한 예술이 주는 자유와 미학과 장엄함과 기이함을 못내 경험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 긴장이 도사린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 질문은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감정적 질문이다.” (《괴물들》)
“강간과 성폭행으로 남녀 창작자들이 비난받을 때, 일반적으로 이러한 비난을 창작의 자유에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물론 창작의 자유는 이데올로기 강요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창작의 자유가 타인을 해할 자유로 정의된 적은 단연코 없다. 신성한 괴물 혹은 천재라는 카리스마적 형상이 도구로, 심지어 특정한 침해를 덮는 데 이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작가나 창작자의 지위가 만들어 내는 권력에 대해 우리 사회가 문제를 제기해야 함을 역설한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혐오 담론을 확산하기 위해 자신의 상징 권력을 활용했다면 그 작가에게 책임이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독서는 나의 세계와 작가의 세계가 만나는 적극적은 행위입니다. 다만 내가 어떠한 관점을 견지하며 작가의 세계로 뛰어들지, 또 작가의 글이 나의 세계와 어떠한 부딪힘이나 만남을 각오하고 덮쳐오는지에 따라 그 글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헌과 철학에도 불구하고 결정은 독자, 즉 여러분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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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지 오웰 뒤에서 - 지워진 아내 아일린》이 갖는 의미
애나 펀더는 다시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아일린의 편지 속 한 꼭지를 떠올립니다.
"에릭(조지 오웰)이랑 너무도 끊임없이, 정말이지 격렬하게 싸워댔거든. 살인이나 별거가 성사되면 편지를 딱 한 통 써서 모두에게 보내는 편이 시간 절약이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지 뭐야..."
애나 펀더는 조지 오웰의 작품들을 탐독해오면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인물, 아일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됩니다. 오웰의 삶 속에서 그는 중요하지 않는 인물처럼 (여러 평전을 통해) 그려졌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걸, 애나는 곧 알게 됩니다. "옥스퍼드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유머가 넘치고, 재능 있는 여성"이었던 아일린,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어 오웰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던 아일린, "《동물농장》을 장편소설로 기획하고, 매일 밤 오웰과 함께 작업을 하며 자신의 재치와 통찰을 그 소설의 캐릭터들 속에 녹여 넣었던" 아일린... 그러나 온데간데 없이 지워져버렸던 아일린... 《조지 오웰 뒤에서 - 지워진 아내 아일린》은 아일린의 노동과 작업을 발굴하여 조지 오웰 뒤가 아닌 그 옆에, 어쩌면 그 앞에 세워두는 일인 동시에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작업입니다. "도덕적으로 낡고 허약한, 정당성이 없는 권력 체계"인 가부장제를 부수고 불공평한 노동 환경을 바꿔버리는 일. 애나 펀더의 이러한 의도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는다면 여러분 역시 변화를 만드는데 한 몫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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