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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들불레터에서는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하여』 속 두 개의 키워드, '해석'과 '스타일'에 관해 살폈습니다. 손택이 제시하는 비평론을 좀 더 쉽게 이해해보고 싶은 분들께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자부합니다. 그럼 오늘의 레터 시작해볼게요!
📚 들불이 만난 이야기
- 『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윌북)
- 영화 〈세계의 주인〉
- 『큐트 가속주의』, 마야 B. 크로닉, 에이미 아일랜드 지음, 윤태균 옮김 (formless twins)
- 『침묵』, 존 케이지 지음, 나현영 옮김 (포도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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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대표작과 국내 초역 에세이들을 소개하는 윌북의 [수전 손택 더 텍스트]의 두 번째 작품은 『해석에 반하여』입니다. 지난 번 소개해드렸던 『여자에 관하여』가 ‘여성’에 관한 키워드(나이듦, 수치심, 외모, 욕망, 섹슈얼리티 등)를 다뤘다면, 이번에 소개할 『해석에 반하여』는 ‘예술’을 바라보는 손택의 통찰이 담긴 문화비평서인데요.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해석에 반하여』의 핵심 키워드 ‘해석’, ‘스타일’를 통해 손택의 비평론을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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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하여』의 표제작이기도 한 「해석에 반하여」는 미메시스 이론에 관한 설명으로 시작합니다. ‘미메시스론’(mimesis theory)은 말하자면 ‘예술은 현실을 모방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론입니다. 이때 주요하게 등장하는 두 명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먼저, 플라톤에게 예술은 유용성, 진실성이 모두 떨어지는, 그러니까 현실을 왜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무용하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반박합니다. 그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모방하는 존재이며, 예술은 현실을 이해하게 돕는 것이기 때문에 ‘치유’의 형태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현실을 그대로 모방한다기보단 현실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모방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사뭇 달라 보이지만, 결국 모두 “예술은 언제나 구상적”이라는 가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상적’이라는 말은, 예술이 인식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말하면, 눈에 보인다는 거죠. 그들에게 예술은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손택은 예술에 관한 서구의 의식이 앞서 설명한 ‘미메시스’의 틀 안에 머물고 있으며, 이것이 예술을 정당화가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해요. ‘예술이 현실을 모방한다’는 생각을 좀 더 비판적으로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미메시스 이론에 따르면 예술은 현실을 재현(모방)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현실의 틀 안에서 보면서 현실의 그릇을 담을 수 있는 도구쯤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질문이 생깁니다. 예술의 ‘모방’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지, 그리고 현실을 모방하는 것에 예술이 머무른다면 예술이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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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은 이러한 전제 자체를 문제라고 봅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예술이 설명되어야 하고 해명되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리니까요. 우리는 흔히 예술 작품을 볼 때 ‘느낀다’고 표현합니다. 예술을 느낀다는 건 곧 예술의 체험이 감각적 경험이라는 뜻일텐데요. 손택은 ‘내용’이라는 개념이 예술을 접하는데 일종의 헤게모니로서 작용하며, 내용에 대한 해석이 강조되는 경향이 곧 세계를 척박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술의 내용, 해석에 몰두하며 의미를 찾는 과정이 예술이라는 세계를 고갈시키고, 영토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거죠.
과거와 비교하여 현대의 “해석 프로젝트”는 더욱 문제적입니다. 고대 후기, 신화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 계몽으로 인해 무너질 무렵, 고대 문헌과 현대 독자들의 요구를 조화시키기 위해 해석의 등장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종교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의문을 품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니까 일종의 알레고리를 구축해 그 괴리를 해소하려고 했던 거죠.
그러나 우리 시대의 해석은 좀 더 복잡합니다. 손택의 말을 그대로 옮겨 와 보겠습니다.
“오늘날 해석 프로젝트에 열의를 쏟는 까닭은 문제가 되는 텍스트에 공경심을 느껴서가 아니라 외적인 것에 대한 노골적 적대감과 공공연한 경멸 때문이다. 과거의 해석 방식은 억지스러울지언정 존경을 잃지 않았다. 문자적 의미 위에 또 다른 의미를 얹는 방식이었다. 현대의 해석 방식은 속을 파내고 그러면서 파괴한다. 텍스트의 ‘이면’을 파헤쳐서 진정한 숨을 뜻을 찾아낸다.” (p.19)
예술의 표면성, 감각성, 육체성을 경멸하고 내용(해석)을 고귀하게 여기는 경향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요? 손택은 이러한 경향을 구체적으로 파헤치기보다 예술을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이기 위해, 그리하여 예술 비평을 생생한 것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술 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게 아니며,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작품에서 짜내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내용에 대한 관심을 줄여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 우리에게는 해석학이 아닌 예술의 성애학이 필요하다.” (p.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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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별 문체'에 관해 정리한 글의 일부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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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손택은 ‘스타일’에 대한 반감을 지적합니다. ‘작가별 취업면접’이나 ‘작가별 문체’에 관한 글을 읽어보신 적 있으신 분들 계실 겁니다. 이 글들에는 작가가 그간 써온 문체를 적용하여 쓴 문장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들에서 언급된 작가의 책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크게 공감하며 웃음을 터뜨리실 거예요. 스타일이 정말 닮아 있거든요. 이때 스타일은 무엇일까요? ‘스타일’은 예술의 외피입니다. 예술이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표현성의 문제죠.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묻기보다 예술 그 자체에 ‘사로잡히는’ 것. 이것이 손택이 거듭 강조하는 주장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좋은 영화를 한 편 봤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아마도 그 영화가 좋은 이유를 영화의 내용, 그러니까 우리가 감상을 하는 동안 구성한 ‘의미’에서 찾으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손택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의미를 배우는 게 아니라 내가 삶에서 느끼고 있는 감정 혹은 감각을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구성하게 되는 것이라고요. 삶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역동(모순, 불안, 고독...)을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새롭게 감각한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이 역시 그대로 옮겨 와 볼게요.
“그렇기에 예술 작품은 아무리 표현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작품을 경험하는 사람의 협력에 크게 의존한다. 사람이 작품에서 ‘말하는’ 것을 인지하고도 둔감해서 또는 몰입하지 않아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유혹일 뿐 강압이 아니다. 예술 작품은 고압적 특성을 드러내게 의도된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예술은, 경험하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공모하지 않으면 유혹할 수 없다.” (p,41)
이는 특히 문학 독자가 기억해 두면 좋은 문장입니다. 의미를 안다는 것, 곧 ‘인지’는 예술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반응과는 다릅니다. 손택이 보기에 해석은 예술을 몸으로 감응하도록 만드는 걸 가로막는 방해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술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몸을 열어 젖힐 필요가 있습니다. 손택은 우리의 수용성이 곧 예술을 만나는데 중요한 전제라고 이야기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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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멧 갈라(패션 자선 행사)의 테마는 수전 손택의 '캠프'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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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첫 번째 챕터를 채운 두 개의 키워드, ‘해석’, ‘스타일’에 관해 이해하고 나면 두 번째 챕터부터는 작가 혹은 작품에 대한 손택의 구체적인 비평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레터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캠프’에 관한 노트」는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여러 개의 단상을 엮어 쓴 이 글에서 손택은 ‘캠프’가 “특정한 스타일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상”, “과장된 것, ‘벗어난’ 것, 원래 모습이 아닌 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진지한 걸 거부하고, 희극적인 세계관을 제시하는 게 캠프인데요. 누군가는 이를 우스꽝스러워 보인다고 할 수 있겠지만, ‘캠프’는 좋은 것-나쁜 것 둘 중 하나에 속하는 범주가 아닙니다. ‘고급문화’와는 구별되는, 탐미적인 감수성. 그게 바로 캠프입니다. 이 글과 ‘저급한 예술’을 연결하여 생각해보면 재밌습니다. 또, 우리가 퀴어적이라 부르는 예술의 형태에 대해, ‘사랑’과 ‘깜찍함’이 공존하는 예술에 대해 떠올리는데 유용한 도구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캠프'는 일반적인 섹슈얼리티와 젠더 개념에 도전합니다. 손택은 캠프의 취향이 인정받지 못하는 취향의 진실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가장 '세련된' 형태의 성적 매력은 자신의 성별에 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이를 드랙 문화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양성성androgyne은 캠프 감수성에서 중요한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 (...) 아르누보 판화와 포스터의 여리고 흐르는 듯한 무성적 신체, 램프나 재떨이에 양각으로 표현된 형태, 그레타 가리ㅡ 매혹적인 양성적 공허 등. 취향에 관한, 잘 인정되지 않았던 진리가 캠프 취향의 바탕이 된다. 가장 정제된 형태의 성적 매력은 본래 성을 거스르는 데 있다는 것. 남성적 남성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요소는 여성적인 것이고, 여성적 여성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요소는 남성적인 것이다." (p.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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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수전 손택의 대표작이자 첫 번째 에세이집인 『해석에 반하여』의 내용 일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술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현대 문화비평의 혁명적 고전인 『해석에 반하여』가 지금 알라딘에서 북펀딩을 진행하고 있다고 해요. 카뮈, 장 뤽 고다르, 비틀스, 정신분석과 종교, SF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 손택의 논평을 이 책을 통해 지금 바로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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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 서수빈, 장혜진 주연
손택은 「고다르의 〈비브라 사 비〉」는 콕토의 『일기』를 인용하며 시작합니다.
"영화의 가장 큰 힘은 액션이 어떻게 묘사되고 어떻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느냐에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 있다. 어떤 행위를 목격한 사람은 보통 그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변형하고 왜곡하고 부정확하게 증언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액션이 수행되고, 그 액션을 기계를 이용해서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반복 재생할 수 있다. 부정확한 증언이나 허위 신고에 맞설 수 있는 것이다." (p.2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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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손택은 모든 예술이 증명 혹은 분석의 방식으로 전개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는, 혹은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고자 하는 작품들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에서 나아가 '어떻게', '왜' 이러한 일이 발생했는지를 가리켜야 합니다. 그러나 고다르의 영화 〈비브라 사 비〉는 무엇도 설명하지 않은 채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걸 '보여주기만' 합니다. 똑바로 보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이 영화는, 보는 것만으로 그녀가 겪게 되는 불행과 그로 인한 분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형식적인' 측면에서 돕습니다. 영화의 장을 12개로 분절하고, 주연 '나나'(배우 안나 카리나)의 얼굴을 여러 각도에서 비추고, 롱테이크와 클로즈업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그는 형식으로서 설명을 생략합니다.
손택은 나나가 자신을 긍정하는 장면을 두고 이렇게 씁니다.
"나나는 자신이 자유롭다는 걸 안다고 고다르는 말한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심리적 내면이 없다. 자유는 내적이고 심리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신체적 우아함에 가깝다. 자유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자유롭다는 것은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자유롭고, 따라서 책임이 있으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p.291-292)
이 대목에서 저는 〈세계의 주인〉 속 주인이의 모습을 떠올렸어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다움'이라는 고정관념과 가장 먼 곳에 선 주인이. 자기 자신인 채로 살다가도 어느 한 순간 분노를 터뜨리거나 충동적으로 구는 주인이. 극장에 앉아 눈물을 흘리던 저는 영화를 '보는' 행위 역시 제 책임이란 걸 실감하며, 주인이가 우아한 몸짓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 순간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습니다. 여기에는 '어떻게', '왜' 보다는 보여주는 것으로,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충분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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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큐트 가속주의』
마야 B. 크로닉, 에이미 아일랜드 지음, 윤태균 옮김 (formless twins)
손택은 '캠프'가 진지하게 제시되지만 너무 과해서 완전히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진지하게 제시되긴 하나 캠프의 핵심은 진지함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일, 장난스럽고 경박하게 복잡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 손택의 '캠프'와 같이 진지함을 통해 혹은 진지함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책이 또 있을까 서치하다 발견한 책이 있는데요. 바로 『큐트 가속주의』입니다. 한 리뷰어가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야할지, 개그로 받아들여야할지 헷갈린다"고 쓴 문장에서 흥미가 솟았어요.
역자 서문에 의하면, 이 책을 쓴 에이미와 마야는 "귀여움의 노심에 온갖 진지하고 남성적인 텍스트와 이미지를 집어넣"습니다. 특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은 이 책이 실험적으로 접근하는 중요한 원전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만의 가속주의를 가질 때, '귀여움'은 두 저자가 선택한 "경사로"입니다. 또한, 귀여움은 "퀴어의 격정적 실천"으로도 나타납니다.
"대디 어드민(Daddy Admin)의 가부장적 꼰대짓은 귀여움에게 먹혀 소화될 운명에 처해진다. 성(Sex)과 젠더의 구획을 교란하고 뒤섞음으로써 새로운 인간종이 탄생한다. 본문에서 언급하듯, 소셜 미디어와 웹 네트워크의 부흥은 귀여움의 팬데믹을 야기했다. 귀여움의 강한 전염성은 이분법의 극단에 놓인 항을 하나의 (가상적) 육체로 주조하여 실로 퀴어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역자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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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 지음, 나현영 옮김 (포도밭출판사)
얼마 전 본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공연한 〈드래곤 레이디는 울지 않는다〉에서 공연자인 마거릿 렝 탄은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토이 피아노'를 통해 구현합니다. 그는 토이 피아노를 장난감이 아닌 진지한 연주 악기로 보여주면서 자신이 가진 예술적 기술을 증명합니다. 마거릿 렝 탄의 삶에서 꼽은 여러가지 만남 중 가장 중요한 만남은 존 케이지와의 만남입니다. 사진과 비디오, 음악을 통해 보여지는, 존 케이지와 나눈 예술적 교감은 실로 아름다워 눈을 떼기 어려웠는데요. 그 이후 존 케이지에 대해 종종 떠올리다, 『해석에 반하여』를 읽고 그의 책 『침묵』을 다시 읽게 됐습니다.
이 책은 존 케이지가 쓴 23편의 기고문과 에세이, 강연문을 엮은 책입니다. 이 책에서 케이지는 작곡을 "의도나 표현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흐름과 하나인 행위로 다시 정의"하고자 하는데요. 그에게 삶이란 곧 듣는 행위이며, 그는 삶에 그러하듯 소리 역시 통제하기보다 그대로 수용할 때 삶이 더욱 근사해진다고 주장해요. 미메시스 이론을 비판한 손택의 철학과 어떠한 면에서 맞닿아 있고 동시에 어떤 부분에서는 반박하기도 한 이 책, 『해석에 반하여』와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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