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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들불레터에서는 젠더 간 차이를 고려한 의학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책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의 배신』과 이른바 '여성건강4법'으로 불리는 법안을 비롯하여 '성차의학'과 관련한 한국의 현재를 살펴 보았습니다.
📚 들불이 만난 이야기
-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의 배신』, 엘리자베스 코멘 지음, 김희정·이지은 옮김 (생각의힘)
- 『세 번째 전장, 자궁절제술』,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엮음, 박지순 옮김 (갈무리)
- 『나의 몸 그 이상』, 린지 카이트, 렉시 카이트 지음, 박순미 옮김 (드루)
- 『바디올로지』, 이유진 지음 (디플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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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드라마 〈콜 더 미드와이프〉(Call the Midwife)는 1950~60년대 런던 빈민가에서 활약한 조산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드라마는 동명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제니퍼 워스가 쓴 이 책은 본인이 간호사로 일하며 실제 겪은 일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2007년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산파’라고도 불렸던 조산사들의 경험과 지식이 산모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작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산모와 아이의 몸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여러 상황에 대처하는 모습, 출산 전후로 큰 혼란을 겪는 산모들을 안심시키는 조산사들의 따스함에 보는 내내 큰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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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 드라마 〈콜 더 미드와이프〉 (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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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파’는 17세기까지 유럽의 출산 분야를 독점했던 여성의 직업이었습니다. 이후 남성 의료인이 등장하면서 길드와 같은 단체를 조직하여 전문성을 획득하고, 해당 분야를 전문직으로서 독점할 수 있도록 사회적 지위를 쌓아 가면서 산파와의 긴장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산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직을 구성할 수 없었고 대학에 들어갈 수 없어,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인정하는 ‘전문성’을 획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이후 귀족계급이 남성 의료인에 출산을 맡기기 시작하면서 출산 분야에서 여성 산파의 지위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경우에도 조산사는 유럽과 비슷한 수순을 밟으며 쇠퇴의 길로 향했습니다. 유럽에서 남성 산과의사는 ‘겸자’와 같은 도구도 독점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의료도구 등을 조산사가 사용하는 일을 법에서 금지하였습니다. 산모들은 이에 의료시설을 잘 갖춘 병원을 이용하게 되었고, 이에 조산사가 쇠퇴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상황은 비단 출산 분야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약사, 치과 의사, 수의사 등 18세기를 지나며 전문직으로 거듭난 의료 분과들은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삼고 발전해 왔습니다. 뇌졸중, 위식도역류질환, 협심증, 소화불량, 편두통 등 젠더 간 증상이나 치료 방식에 차이를 두어야 하는 분과에서도 여전히 표준을 남성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거나 증상의 개선이 더뎌 큰 괴로움을 호소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오늘날 의과대학은 여성이 의료인이 되는 일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연구대상으로서 여성의 몸은 소외되고 무시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차의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출현하였는데요. 한국에서 여러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 각 분과별로 여성의 몸이 어떻게 배제되어왔는지 그 역사와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바로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의 배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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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젠더 간 차이를 고려한 의학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책입니다. 피부, 뼈, 창자, 숨, 방광 등 신체기관별로 쪼개어진 챕터는 각 분야에서 여성의 몸과 고통을 어떻게 오진해 왔는지 그 사례와 역사를 살핍니다. 의학 연구에서 여성이 소외되고 있는 현실을 낱낱이 파헤치는 동시에 의료인과 환자의 상호작용이 이 사회의 가부장제와 성차별, 젠더폭력에 기인하고 있음을 드러내요.
이 책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이루어진 들어가는 글과 나가는 글에 있는데요. 도입부에서 저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환자, 엘렌과의 마지막을 회상합니다. 그는 엘렌이 남긴 잊지 못할 말(“선생님께 땀을 흘려서 죄송해요.”)을 떠올립니다. 치명적인 질병을 갖고 있어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가, 본인이 아픈 일에 수치심을 느껴 의사에게 사과하는 일은 저자의 입장에서 몹시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책의 결론에서 저자는 뇌척수액 감소로 인해 뇌가 부어 응급실에 실려가야 했던 지난 일을 떠올리며, 그 당시 저자 본인이 간호사에게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미안해요, 제가 몸에 데오도란트 바르는 걸 잊어버렸네요.”
여성들이 수치심을 느끼며 자신의 아픔을 사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이에 대해 의료계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아 온 역사를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씁니다.
“여성의 ‘정상적’ 신체 기능뿐만 아니라 여성의 고통, 즐거움, 힘, 지적 능력을 정의하는 의학의 역사에서 당사자인 여성의 목소리는 명백히 결여되어 있다. (...) 우리가 여성의 건강이라는 의학의 미로에서 길을 찾는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과거의 잔재는 유령처럼 출몰한다. 애초에 이 미로를 만든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개념은 좋게 봐줘도 제한적이었고, 최악의 경우 편집증적이고, 여성혐오적이며 폭력적이지 않았던가. 그 유령은 그날 엘렌의 방에도 나를 따라와 있었다. 어디에나 있는 죽음 그 자체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죽어가는 그녀를 지켜봤다. 땀 흘리는 그녀, 사과하는 그녀를.” (1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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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서울대학교병원 성차의학연구소 구성원들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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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분당서울대병원에 ‘성차의학연구소’가 개소했습니다. 성차의학(Sex/Gender-Specific Medicine, SGM)은 섹스와 젠더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모든 이들에게 더 적합하고 안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목표를 두고 생겨난 분과입니다.
성차의학연구소가 문을 열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과학기술기본법1) 개정안이 있었어요. 2021년 입법된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에서는 과학기술 연구에서 성별 특성을 고려하도록 하는 내용을 새로 담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대한성차의과학회 초대 회장인 김나영 교수는 ‘성차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차의학이 “170cm, 65kg, 남성”이라는 기준에 의해 세팅된 의학 연구 및 임상 현장으로 인해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의료 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성별 간 대사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약물(졸피뎀)을 동일한 용량으로 처방하였다가 여성의 사고가 늘어나게 되는 등의 참사가 한 예입니다.
2025년 12월에는 성별 특성을 기반으로 여성건강 보호 체계를 구체화하는 내용을 반영한 이른바 ‘여성건강4법’2)이 발의되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 대표로 발의된 4건의 개정안은 현행 보건의료 체계가 성별 특성에 따라 설계되지 않았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성차의학에 기반한 국가적 정책 수립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발의되었습니다.
◾ 각주
1) 과학기술기본법은 과학기술 전반의 발전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법률이고, 의학 분야는 의료법 등의 별도 법률로 규율되는데요. 다만, 의학 분야를 포함하여 과학기술 전 분야의 연구 개발 및 기술 개발에 대한 예산을 배분하는 역할을 하기에 의학 역시 이 법안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의 국회 본회의 통과에는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GISTER’ 등 여성계의 노력이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2) 보건의료기본법 개정안, 약사법 개정안, 건강검진기본법 개정안,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자살예방법) 개정안 총 4건의 개정안을 포함하고 있어 편의상 ‘여성건강4법’으로 통칭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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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엮음
박지순 옮김 (갈무리)
페미니스트 활동가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는 '자궁절제술'을 출산, 임신중지에 이은 세 번째 전장으로 보고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자궁절제술이 산부인과에서 흔하게 시술되는 수술로, 대체 치료법에 대한 고려 없이 관행처럼 여성의 신체에 남용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자궁절제술 경험이 있는 당사자들의 증언을 모아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서문에서 자궁절제술의 남용은 곧 '폭력적 남성 지배'와 다름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이 책의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서술한 파트는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의 배신』과 함께 읽으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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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지 카이트, 렉시 카이트 지음
박순미 옮김 (드루)
이 책은 의학, 신체보다 '보이는 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깊이 들여다본 책입니다. 암 환우 카페의 게시판을 둘러보다보면, 겨드랑이 털을 밀어야겠다는 글이나 수술실에서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다는데 뱃살이나 몸에 난 여드름이 신경쓰인다는 글이 종종 보입니다. 저도 그 영향으로 수술 전에 몸이 어떻게 보여질지 조금 신경썼던 기억이 나요. 이 책은 셀룰라이트, 흉터, 여드름 등 감추고 싶은 부분을 과하게 의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살필 수 있는 작품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의 배신』 속 사과하는 여성들의 심중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당신도 이미 그 사실을 한 번쯤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아름다운 존재 또는 고쳐야 할 부분의 집합이거나 관찰과 평가를 받아야 할 대상 그 이상의 존재라는 진실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본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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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지음 (디플롯)
최근 만난 친구들이 제게 '울쎄라'라는 시술을 권했습니다. 리프팅 효과가 있다는 이 시술을 어째서인지 제 친구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고 있었어요. 평소에 피부 탄력에 대해 큰 고민 없던 저도 친구들을 만나고 나니 왠지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운동이나 열심히 하자'고 생각하며 얼른 마음을 고쳐 먹었지만 하마터면(?) 전보다 거울을 더 자주 들여다볼 뻔 했는데요. 이때 떠오른 책이 이유진의 『바디올로지』입니다.
이 책은 『여성의 몸에 대한 의학의 배신』과 유사한 목차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가슴, 엉덩이부터 피부, 혀, 땀, 항문, 살점 등 인간의 몸 이야기를 통해 인류가 겪은 억압을 살피고 어떠한 권력이 몸에 개입되고 있는지 분석하는 작품입니다. 왜 우리는 피부과에서 리프팅 주사를 600샷씩 맞는 걸까요? 왜 우리는 언제나 다이어트의 압박을 받는 걸까요? 우리의 몸에 각인된 사회적 기준, 통제하고 억압당한 신체의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이 책을 읽어 보세요.
"피부는 인간사를 담는다. 살면서 생긴 상처와 흉터, 뙤약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 나이 듦에 따라 생긴 검버섯과 기미도 모두 인생의 자국이다. 쭉쭉 늘어나는 할머니의 피부를 잡아당기며 놀던 기억, 좋아하는 사람의 손끝이 처음 닿았을 때의 떨림과 흥분, 원치 않는 피부 접촉에 진저리치게 끔찍한 순간까지 모두 삶의 흔적이다. 피부엔 경험과 기억이 새겨진다. 양자물리학자 캐런 버라드는 2024년 한국여성학회 석학 초청 포럼에서 기억과 만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해한다는 것은 만짐, 감각하기, 소통하기의 문제이며 이는 다시 돌아가기, 기억하기와 관련된 문제다.” 접촉의 경험은 사랑이 되기도, 폭력이 되기도 한다. 이 관계의 얽힘을 추적하는 일 또한 과학의 영역임을 버라드는 다시금 강조했다. 접촉과 소통이 과학의 이슈라면, 인종 차별과 성차별을 낳은 피부 과학 자체도 응당 비판받아야 마땅하며 과학자의 책임 또한 그리 가볍지 않으리라." (본문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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