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소식들을 접하다보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어지럽고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나의 주관과 신념을 지키고 나를 둘러싼 작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독자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우리가 여러 관계와 얽혀 있는 방식을 조명하는 책들을 준비해봤어요. 물론, 즐거움과 감동도 놓치지 않는 책들로 말이죠!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건넨 배턴(책 추천)으로 여러분이 삶을 끝까지 잘 완주할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들불레터, 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 덧. 레터 하단에 '도서 증정 이벤트'를 마련하였으니, 참여하셔서 좋은 책 받아가세요! 💗
* 알리는 말씀 : 시스템상의 문제로 모바일에서 오늘 레터 내용 중 일부에 단락 띄어쓰기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음을 확인하였습니다. 해결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으나 해결하지 못하였고, 이에 레터의 일부분은 읽기에 조금 불편함이 있으실 수도 있어요. 모바일 환경에서 레터를 읽으실 독자분들께 양해의 말씀 드리며, 가급적 PC 환경에서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 들불의 PICK
- 『이어달리기』, 조우리
- 『동물 너머』, 전의령
- 『페미니즘』, 데버라 캐머런
💬 번역으로 읽는 여성서사
- 『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저, 권남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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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리 작가의 신간 『이어달리기』는 중심 인물인 '성희'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치러질 장례식에 6명의 조카를 초대하면서 전개되는 에피소드를 묶은 연작 소설입니다. 성희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난 조카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을 물려주기로 마음 먹는데요. 여섯 명의 조카들은 성희가 준 미션 속 문제를 직면하거나 해결하며 미션을 수행하고, 성희로부터 자신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을 물려받게 됩니다.
'이모'라는 호칭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피가 섞인 친족 관계가 아니어도 우리는 누군가를 이모라고 부르고, 또 스스로를 이모라고 지칭하기도 하잖아요. 성희 역시 그의 조카들과 친족 관계는 아니지만, 기꺼이 그들의 이모로서 후견인을 자처합니다. 좋은 것,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게 해주고 조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주저 없이 달려가는 멋진 후견인인 성희의 모습은 제가 되고 싶은 어른의 모습을 꼭 닮아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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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에피소드가 재밌고 감동적이었지만, 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파트는 '수영'의 이야기였습니다. 수영은 어린 시절 부모의 방임을 경험했고, 그로 인해 혼자 지내는 시간 속 고요함에 질리도록 익숙해져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수영은 누군가와 정서적 유대를 맺는데 익숙치 않습니다. 관계도, 집도 정이 들 때 즈음 주저 없이 떠나버리죠.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나면 오히려 자신이 혼자임을 더욱 강렬하게 느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낯선 환경으로 자신을 밀어넣는 것이었죠. 그런 수영에게 성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안의 어떤 것이,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가지고 있는 어떤 기질이, 나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것일까 봐. 그래서 어떻게 해도 피할 수가 없을까 봐. 이미 다 결정되어 있을까 봐. 버릴 수도 달아날 수도 없는, 나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무서워." "아니야, 수영아. 넌 그냥 너야. 너대로 사는 거야." (...) "넌 네 방식대로 사는 거야. 네가 정하는 거야."
수영이 스스로의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몇 번이나 지치지 않고 말해주었던 성희의 손. 그 손의 낯설고, 그리운, 온기.
- p.72-73
가끔 내가 나로 사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잖아요.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확신이 없을 때도 많고요. 나의 타고난 성향 탓, 기질 탓을 하면서 끝도 없이 울적해질 때, '네 방식대로 살라'는 성희의 말은 간결하지만 큰 위로로 다가옵니다.
봄이 다가오면서, 세상 곳곳에 넘치는 활기가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지는 분들도 계실 것 같아요. 그런 분들에게 저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조건 없이 사랑을 주는 여자와 그렇게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며 사랑의 배턴 터치를 하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힘을 내서 이들과 함께 이어달리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요. 누군가 내 배턴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쩌면 조금은 기운이 나지 않을까요?
👀 함께 즐기면 좋은 자료
- 시스터후드 - 여성과 연대 : [이어달리기]의 조우리 소설가
- 손수현, 안예은의 이어달리기
- 『이어달리기』 : 만화로 보는 우리 사회 여성과 일에 대한 12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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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 동물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인터넷 서점에서 '동물'을 검색하는 일이 잦아졌고, 이 책 역시 그렇게 만나게 된 책입니다. 하지만 제 예상과 달리, 이 책은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었어요. 전의령 교수의 『동물 너머』는 동물권 담론을 넘어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이를 '얽힘'이라는 단어로 재조명하는데요. 이를테면 반려동물이 어린아이에 대한 감정적 대체물(우리가 개나 고양이를 '아기'라고 부르거나 반려인인 우리를 '엄마'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생각해보세요.)로서 가족을 이루는 현상이나 반려동물에게 가해지는 인위적 개입(미용, 브리딩, 중성화 수술 등)이 지배와 통제, 애정과 즐거움 모두와 얽혀 있는 현상임을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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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만 없어 고양이"라는 유행어가 반려동물이 없다는 자조감과 박탈감을 생산하는 동시에 귀여운 개, 고양이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관련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소비자본주의적 욕망을 강화(p.31)하는 방식으로 발화된다는 것을 말하며 소비 주체로서 인간의 욕망과 동물이 얽혀 있는 방식을 조명합니다.
제가 특히 흥미롭게 읽었던 파트는 둔촌 주공 재건축 현장의 길고양이들이 무엇을 상징하고 상기시키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었어요. 길고양이들을 버려지고 남겨진 존재로 명명하고 연민의 대상으로 재현하면서 이들을 인간이 돌봐야 한다고 당연시하는 것을 넘어 우리는 어떤 장면에 주목할 수 있을지(p.63) 묻는 질문을 통해 길고양이가 인간과 함께 공동구성하고 있는 도시의 새로운 흐름을 발견하도록 하는 과정은 우리의 시선을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게 만들어줍니다. 길고양이들이 재건축 현장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누비고, 인간은 이런 그들을 돌보기 위해 그들의 삶에 적극 개입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은 그들을 통해 도시와 재건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고 이것이 바로 길고양이와 인간이 도시를 '공동구성'한다는 것인데요. 저는 한 번도 고려해본 적 없는 관점이라 뒷목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해하며 읽었답니다 😁
이처럼 『동물 너머』는 동물이 인간과 다종다양하게 얽혀있는 관계임을 드러내는 작업으로써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동물권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인간이 동물과 얽혀있는 방식을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관찰해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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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영국의 여론조사 기관 유고브YouGov가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여성 중 절반 가량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 않겠다"라고 대답했고, 5명 중 1명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모욕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조사가 있었는데요. 20대 여자현상을 알아보기 위해 시사IN에서 시행한 조사를 살펴보면, 전체 응답자의 20.8%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인식하고 있으며, 페미니즘에 대한 감정 온도(0은 '매우 부정적' - 100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할 때)도 평균 32.1도에 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저자는 여성들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길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로 페미니즘에 따라붙는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꼽습니다(p.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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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유고브의 조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Someone who believes in the social, political and economic equality of the sexes."(남녀의 사회, 정치, 경제적 평등을 믿는 사람)이라고 페미니즘을 정의하기 전과 후에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답하는 비율이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즉, '페미니즘'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페미니즘에 보이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버라 캐머런의 『페미니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책입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복잡한 신념을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정의했는지에 대해 따라가며, 계속해서 독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페미니즘이란 이런 것입니다'라고 하나의 정의로 결론을 내리기보다, 여러 가지를 물음표의 상태로 남겨둠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페미니즘이란 무엇인지 새롭게 구성할 수 있도록 이끌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의 정의가 무엇인지 아직도 혼란스러운 분들 또는 페미니즘이 내가 생각하는 신념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여기길 주저하는 분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추천사를 쓴 권김현영의 말처럼, 이 책은 얇은 두께임에도 오래 토론하기 좋은 책입니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책 속 질문들을 가지고 토론을 나눠보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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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번역가
권 남 희
본 문학 전문번역가 겸 에세이스트. 직접 기획하여 번역한 무라카미 류의 소설 『고흐가 왜 귀를 잘랐는지 아는가』, 『오디션』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러브레터』가 베스트셀러가 되며 번역가로서 이름을 알림. 대표적인 번역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더 스크랩』, 『시드니!』, 『후와후와』, 『반딧불이』, 사쿠라기 시노의 『유리갈대』를 비롯, 『배를 엮다』, 『누구』 『애도하는 사람』, 『밤의 피크닉』, 『츠바키 문구점』, 『퍼레이드』,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등이 있음.
『귀여움 견문록』 (마스다 미리 저, 권남희 옮김)
안녕하신가요, 구독자 여러분? 어쩐지 레터를 발행할 때마다 안부를 묻게 되네요. 안녕하기 쉽지 않은 나날들이 이어지기 때문일까요? 어느덧 3월도 중순이 넘었는데 여전히 겨울옷을 정리하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봄에의 믿음을 가지고 의연한 나목이 되어 보아야겠어요.
삶이 결코 가볍지 않은 세상이라 그런지 요즘 SNS를 보면 유독 서로의 정신건강을 염려하며 ‘좋아하는 것을 많이 말하라’든가 ‘귀여운 것을 보면 행복해진다’든가 하는 말들이 많더라고요. 오늘 이야기할 이 작품도 일종의 그런 맥락에서 골라보았습니다. 마스다 미리가 쓰고 그리고, 번역가 권남희가 옮긴 『귀여움 견문록』인데요.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이 귀엽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소개하고 고찰해보고 어떤 면이 특히 귀여워 보이는지 서술합니다. 하나도 무겁지는 않은 내용이에요. 그래서 좋더라고요. 예를 들면 바로 첫 장의 ‘하교하는 초등학생의 귀여운 실루엣’을 떠올리며 요즘에는 코로나19 확산 때문에 더욱 소중해진 초등학생들의 하교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요. 초등학교 시절의 내 하교 모습은 어땠을지 기억을 되짚어보거나 …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에는 상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 작가의 작품이라 일본 고유의 문화가 나오기도 하는데, 그걸 또 한국 문화에 대입해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지역마다 다양한 땅따먹기 지도 모양 이야기를 읽으면서 ‘엎어라 뒤집어라’, ‘데 덴찌’ 같이 동네마다 달랐던 손바닥 뒤집어 편 가르는 유년 시절 놀이도 생각나서 마음이 따뜻해지고요.
이렇게 어릴 적을 떠올리게 하는 표제어들도 있는 한편 지금 우리들의 일상 속에 찾아올만한 귀여움들도 많았습니다. 고양이 꼬리라든지, 새알심, 붕어빵 같은 고맙게도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해주는 것들…! 이 작가가 귀여움을 느끼는 데 조금 특이한 점은 귀여운 대상에 굉장히 집중해서 오래 생각해본다는 점입니다. ‘와, 귀엽다!’하고 금방 지나가는 게 아니라 책 제목이 무려 ‘견문록’인 만큼 ‘이 귀여운 것은 어디에서 온 거지? 이 귀여운 이름은 무슨 뜻일까?’ 하며 귀여움을 오래오래 음미하는데, 귀여움을 누리는 좋은 방법이겠더라고요. 실제로 작가도 언급한 것처럼 ‘거울 뉴런’ 현상이라는 게 있어서 우리 뇌는 어떤 행위를 하는 장면만 보아도 그 행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인다고 합니다. 귀여운 거나 좋아하는 걸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이런 효과 때문이겠죠? 그러니 우리도 귀여운 것을 오래오래 곱씹어보도록 해요. 번역가 권남희도 옮긴이의 말에서 자신이 귀여워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있어요. 이것도 역시 귀여움을 많이 생각하는 습관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다만 이 책 자체는 굉장한 집중력을 요하거나 진지하게 읽을 것까지는 아닐 수 있어요. 오히려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자기 전 하루에 한 편씩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난히 힘들거나 황량한 마음이 들 때는 두 편, 세 편을 읽고 자도 좋고요. 그러면 좋은 꿈을 꾸고 안녕할 내일을 위해 힘을 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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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귀여운 것들을 더 귀여워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많이 이용합니다. 생각한 것보다 백과사전이 그리 딱딱하지만은 않더라고요. 오히려 로맨틱하거나 귀여운 구석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백과사전을 한 권이라도 장만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백과사전을 끼고 보면 어떨까요?
메리 읽고 씀.
🐚 메리 :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번역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한 달에 두 번 번역 덕분에 읽을 수 있는 여성 서사를 소개합니다. 여성 서사가 모두의 것이 되는 날을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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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창비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레터 하단에 도서 증정 이벤트가 있으니,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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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저는 중학생 때 집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작은 학원에 다녔습니다. 학원에 가려면 짧은 지하도 하나와 그보다 긴 지하도 하나를 통과해야했는데요. 지하도는 어둡고 습한데다 인적이 드물었고, 군데군데 조명이 깨져있어 음산한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긴 지하도 끝에서 남자 고등학생 무리가 담배를 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한 살 위 선배만 봐도 무섭던 그 시절, 무리 지어 불량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는 남자 고등학생의 모습은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협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날 그들 곁을 지나치면서 ‘내일부턴 제발 여기 없어라’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날 이후 그들이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는 일은 부쩍 늘었습니다.
그들은 그 곳을 아지트 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어요. 그들은 그 곳에서 담배도 피고,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희롱하며 험한 말로 겁을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곁을 지날 때마다 숨을 참았고, 제 발소리가 과장되게 울려퍼지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스레 걸어다녔습니다. 그들이 저를 영영 발견하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갑자기 제가 중학생 때 이야기를 한 이유는, 오늘 소개해드릴 책이 저와 비슷한 경험을 담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리베카 솔닛의 책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은 저처럼 살기 위해 사라지고자 했던 여자들의 이야기이자 사라지도록 강요 받은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책은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에서 시작됩니다. 저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응시하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는 아득히 먼 어둠일 뿐임을 깨닫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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젋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소멸을 수많은 방식으로 맞닥뜨리는 것, 혹은 소멸로부터 달아나는 것, 혹은 소멸을 깨닫기조차 회피하는 것이다. 혹은 이 모두를 동시에 겪는 것이다.
-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p.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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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장소는 리베카 솔닛이 가정폭력을 경험한 후,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집을 나와 어렵게 구했던 라이언가의 집으로 이동합니다. 그 집에서 솔닛은 사라지는 것들을 목격합니다. 건물, 사람, 문화, 분위기. 동네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먼지처럼 쓸려 나갔고, 솔닛은 그 가운데에서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고자 애씁니다.
이제 이야기의 시선은 집 안에 놓여있는 작은 책상으로 이동합니다. 솔닛은 이 책상을 준 친구(헤어진 남자가 휘두른 칼에 열다섯군데 찔린 후 목숨을 건진 여성)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은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 사건을 자극적으로 보도하기 바쁜 언론, 그리고 한 여자의 죽음을 통해 다른 여자들이 받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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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젊은 여자들에게 "자신이 살해될 가능성을 늘 그려보게끔" 만든다. (...) 많디많은 여성이 영화에서, 노래에서, 소설에서, 세상에서 살해되었다. 그 죽음 하나하나가 내게는 작은 상처, 작은 짐, 피해자가 나일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작은 메시지였다. -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p.65, 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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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은 여성을 침묵 시키려는 사회를 고발하며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리베카 솔닛의 회고록입니다. 이 책은 저자 본인이 여성으로서 경험해야했던 억압과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자기 인식을 다양한 장소, 사물, 감각을 경유하여 풀어낸 작품입니다. 솔닛이 서문에서 밝혔듯, 이 책은 ‘회고록이면서 회고록이 아니기도’(p.6)한데요. 이 책이 ‘저자 개인의 경험을 담았지만, 모든 여성이 겪는 집단적 경험의 맥락 속에서 서술했기’(p.6) 때문입니다. 이처럼 책은 저자와 인종도, 사는 곳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우리가 단지 여성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솔닛의 경험에 공감하며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딘가 깊숙이 묻어두었던 나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되기도 합니다. 제가 중학생 때의 경험을 떠올렸던 것처럼요. 이 경험은 유쾌하지 않고, 때로는 두렵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솔닛이 말했듯, 이 일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나아왔는지 재어보기 위한 재방문'(p.299)이기도 합니다. 솔닛의 말처럼 삶은 '확장했다가도 수축하고, 닫혔다가도 열리면서 자꾸 변하는 과정'(p.299)이니까 우리의 삶이 고집스레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우리는 자신을 해친 무언가를 향해 다가가기도 하고, 그로부터 멀어지기도 하고, 그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다른 어떤 것 혹은 사람이 우리를 그것으로 도로 데려간다.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탈출할 때 디뎠던 계단이 문득 폭포로 바뀐 것 같은 그런 시간의 미끄러짐은 본디 트라우마란 것이, 그리고 트라우마가 느끼는 시간이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이 책에서 시도한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나아왔는지 재어보기 위해서 과거를 재방문할 때도 있다. 닫힌 것이 다시 열린다. 가끔은 우리가 그것을 새로이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새로이 수선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다시 열린다. 가끔은 이야기의 끝에 덧붙은 새 챕터 때문에 도입부의 의미가 바뀐다. -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p.299
또, 책에는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가시화하기 위한 솔닛의 노력이 담겨 있습니다. 솔닛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러한 호명 역시 여성들을 희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솔닛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책 소개는 책의 후기에서 솔닛이 덧붙인 시구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 시구는 솔닛에게 책상을 주었던 친구가 자신의 이야기를 책에 소개해도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면서 덧붙인 것인데요. 제게 큰 위로가 됐던 시구여서 꼭 소개하고 싶었어요.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이 문장이 큰 위안과 격려가 되길 바라며, 오늘 들불이 만난 이야기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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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깨진 것들을 엮어서 낙하산을 만들었다."
- 윌리엄 스태퍼드의 시구,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p.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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