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구입니다. 저는 요즘 일주일에 한 번씩 심리상담을 받으러 다니고 있어요. 제가 타인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리는 것에 비해 제 감정은 반발짝 또는 한발짝 늦게 알아차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꼬박 받고 있습니다. 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첫 상담을 받으러 갈 당시 제가 인식했던 어려움보다 더 큰 어려움이 제 안에 가라앉아 있단 사실을 상담을 통해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10회차로 예정했던 상담은 당분간 계속 이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감정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계신가요? 매일 다르게 부딪히는 상황 속에서 감정 또한 시시각각 변화할텐데, 그 감정들을 어떻게 따라잡고 계신가요?(정말정말 궁금하니까 자신의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분들은 그 경험을 '후기'로 남겨주세요!) 저는 여전히 제 감정을 느끼는 일에 서툴지만, 나를 계속해서 들여다보면 조금씩 달라질 거라 믿고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하는 중입니다.
오늘 소개할 책들은 모두 '감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책 속에는 저처럼 뒤늦게 감정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매개체를 통해 원한과 같은 어두운 감정을 공유받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뜻을 순수한 분노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감정의 단서들을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번에도 들불레터를 쓰며 제 안에 가라앉은 불순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는데요. 어쩌면 심리상담 다음으로 레터를 쓰는 일이 제게 가장 큰 성찰과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제게 늘 힘이 되는 들불레터, 오늘도 힘차게 시작해보겠습니다!
덧. 레터 하단에 '<알싸한 기린의 세계> 도서 증정 이벤트'를 마련하였으니, 책 받아가세요! 💗
👏 들불의 PICK
- 『골목의 조』, 송섬
- 『온난한 날들』, 윤이안
- 『그 여자는 화가 난다』, 마야 리 랑그바드 지음, 손화수 옮김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도서 증정 이벤트!)
🙋♀️ 들불이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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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덕분에 라틴어 경구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했던 말은 영화 속 키팅 선생님이 학생에게 알려주었던, '오늘을(또는 현재를) 잡아라'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일텐데요. 그리고 이 말 다음으로 자주 언급되던 라틴어가 있었는데, 바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입니다. '메멘토 모리'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풀어쓰자면, 너도 언젠가는 죽으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뜻인데요. 겸손과 같은 미덕이 성숙한 사람에게서 자주 드러나보인다는 점을 생각할 때, '메멘토 모리'는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내면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속뜻을 가진 말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송섬의 장편소설 『골목의 조』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이후, 그 어느 것에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성이 '조'를 만난 이후 맞닥뜨리게 되는 예기치 못한 순간 죽음들로 인해 다시 한 번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 같아요.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어떤 일을 갑자기 겪게 되면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어영부영 지나고 말지만,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 때 느꼈던 감정을 밀려드는 파도처럼 속수무책으로 받아내는 경험을요.
화자인 '나'는 유년기부터 아버지에게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하다 못해 샤워하는 방법까지도 책을 보고 배우죠. 이렇다 할 유대감이 없는 부녀 관계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이 나고 맙니다. '나'는 훗날 '아버지가 죽은 것을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냐'는 조의 질문에 '(문에 목을 매 죽은 아버지 때문에)어쩐지 문이 무겁다 싶었다'고 대답하거나(p.110)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면서 보낸 시간을 '뜨겁고 무거웠던 유골함'에 대한 감각 정도로 설명하는데요. 이 때문인지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시큰둥하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떠난 것처럼 말이죠.
'조'는 '나'가 살고 있는 동네의 허름한 술집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늘 친구가 없다고 말하는 내가 유일하게 가까워지는 사람이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입니다. 나는 조와 시간을 보내면서, 잊고 있던 기억을 차츰 되짚기 시작합니다. 술을 마시다가도, 영화를 보다가도, 일기를 쓰다가도 말이죠. 그리고 이후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죽음들은 나를 혼란에 빠뜨리지만 조가 질문과 관심으로 나를 일으켜 세운 덕분에, 나는 드디어 자신의 감정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슬픔을 느꼈음을, '슬프면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몰라서, 언제 슬픔이 다 끝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모른 척 했던' 과거의 자신을 이해하고 고백합니다.
'메멘토 모리'의 속뜻처럼, 죽음과 성장이라는 단어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이 완전한 소멸에 이르는 것이라면, 성장은 자라나는 궤적을 선명하게 표시하는 삶의 증거 같은 것으로 여겨지니까요. 하지만 누군가는 뻥 뚫린 자리를 들여다보면서 성장하기도 합니다. 그 곳에 머물렀던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남긴 커다란 구멍을 넘나드는 나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면서 말이죠. 마치 『골목의 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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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일은 이렇게 두려운데, 남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해보았어야 했어. 둘러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 p.187-188
"언제나 시간이 가만히 흘러서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이동하는 것은 나였어. 그리고 이동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미아가 되지 않는 것이었고." - p.212
"무언가 중요한 것이 끝나가는 동시에 시작하는 시기인 듯하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결국 하나일지도 모른다. 서로 아껴주는 마음." - p.217, <작가의 말> 중
👀 함께 즐기면 좋은 자료
- 영화 <헤어질 결심>
『골목의 조』와 <헤어질 결심>은 누군가의 죽음이 삶에서의 중요한 감정(슬픔, 사랑)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맞물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을 재미있게 보신 분이라면, 『골목의 조』도 함께 즐기실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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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난한 날들』은 안전가옥이 기획부터 집필까지 작가와 함께 만들어나가는 '매치업 프로젝트'의 첫 번째 테마, '기후 미스터리'라는 장르로 출간된 장편소설입니다. '기후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생소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안전가옥 스토리 PD인 윤성훈 님에 의하면, '기후 미스터리'는 '기후 소설'이라는 장르로부터 영감을 받아 조합하게 된 단어로, '단순히 먼 미래의 파국에 대해 미리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바로 인식하고 힘들더라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문제의 대안을 어떻게든 제시하며 기후 위기라는 비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차근차근 생각해 보길 제안하는 장르'(p.349)라고 합니다.
『온난한 날들』의 배경이 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후의 대한민국입니다. 매일 정해진 탄소 배출량을 준수해야 하고 이를 초과할 경우 벌점을 받는 국가 시스템이 일상이 된 시기이자 탄소 배출 감독관이 도시를 관리 감독하고 한 사람이 하루에 버릴 수 있는 플라스틱 양도 제한되어 있는 시기죠. 이러한 시대적 의무 속에서 각 도시들도 환경과 관련된 저마다의 특색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온난한 날들』의 공간적 배경인 평택은 10년 전, 신소재 플라스틱 시범 사용 도시인 '에코시티'로 지정되었습니다. '신소재 플라스틱'은 에코시티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소재로, 일반 플라스틱과 달리 금방 썩는다는 특징이 있다고 해요. 덕분에 평택은 탄소 배출을 타 지역보다 20퍼센트까지 더 가능하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도시죠.
이 시기를 살고 있는 주인공 '화음'에겐 독특한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식물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능력입니다. 화음의 능력을 식물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고 소개한 이유는, 식물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내뱉은 말이나 생각, 강하게 남아 있는 원한이나 사념 같은 것'(p.20-21)들을 듣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의 원한이 식물을 통해 새어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화음은 자신의 거주지이자 근무지인 에코시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식물의 소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한 신흥종교의 자취를 쫓던 화음은 에코시티에서 '법의 생태학' 연구소이자 탐성 사무소를 운영 중인 '해준'을 만나게 되는데요. 해준은 화음이 해결하고자 하는 사건에 연루된 또 다른 의뢰인을 위해 화음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화음에게서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이를 계기로 둘은 다른 사건들도 함께 해결하게 됩니다. 그렇게 탐정 해준과 (해준 말에 의하면) '환경 전문 탐정'인 화음이 여러 사건들을 접하는 과정 속에서 한 기업과 '신소재 플라스틱'과 관련된 사건에 연루되면서 소설은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식물의 '소리'를 따라가면서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기존 추리물의 문법을 따르지 않아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또, 자신의 능력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귀신에 씌었다느니 정신 분열의 초기 증세라느니 떠들어대는 것'(p.340)에 불과했던 과거와 달리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하는 해준 덕분에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긍정할 수 있게 된 화음의 성장을 지켜보며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해요.
『온난한 날들』을 읽으면서 누군가에겐 사회과학서나 과학서로 배우는 기후 위기보다 문학으로 접하는 기후 위기가 더 큰 설득력을 가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장르보다 문학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분들, 그 중에서 특히 기후 위기에 관심을 갖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휴가철에 이 책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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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읽으면 좋은 자료
- 기후위기 시대에 문학하기, 김보경 (문학광장)
서이제의 『두개골의 안과 밖』과 성다영의 『밥에 대하여』를 인간중심주의를 허무는 기후위기 시대의 문학으로 명명하며 비평한 글입니다. 저는 특히 서이제 작가님의 작품을 읽으며 큰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는데요(해당 작품은 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려있습니다.). 비평과 함께 비평에 언급된 두 작품도 꼭 함께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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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책 소개에 앞서 제 이야기부터 짧게 해보자면, 저는 평소 '국가 간 입양'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책을 읽기 전 구글에 관련 자료들을 서치해보면서 그제서야 한국의 해외 입양 문제를 알게 되었어요.
여러분은 '국가 간 입양' 문제나 '한국의 해외 입양 실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신가요? 만약 이 문제가 낯설게 느껴지신다면, 우리는 왜 잘 모르고 있는 걸까요? 『그 여자는 화가 난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은밀한 비밀로 남겨져있던 국가 간 입양 문제를 분노의 언어로 풀어낸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화가 난다』는 1980년 한국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덴마크로 입양된 마야 리 랑그바드가 쓴 시집이자 국가 간 입양에 대한 수기입니다. <추천의 글>을 쓴 김혜순 시인은 이 책을 '입양 보낸 그들의 목구멍에서 쏟아지는 분노에 찬 비트를. 그 비트에 얹은 세상에서 제일 긴 여자 힙합 아티스트의 래핑을.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점에서 다성악으로 터지는 그 목소리를.'이라고 표현하는데요. '비트', '래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무척이나 리듬감 있게 읽힙니다. 아마도 모든 문장이 '여자는~'으로 시작하, 또 많은 문장이 '~화가 난다.'로 맺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리듬감의 근원은 분노, 오로지 분노입니다. 입양과 인종차별에 대한 증언들이 괴상한 조화를 이루며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책은 굉장한 몰입감으로 읽기를 멈출 수 없게 만듭니다.
여자는 자신이 수입품이었기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자신이 수출품이었기에 화가 난다.
여자는 어린이를 입양 보내는 국가는 물론 입양기관도 국가 간 입양을 통해 돈벌이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
여자는 미국 입양기관인 국제홀트아동복지회에서 북한을 비롯해 아이들을 모집할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찾고 있다는 소문에 화가 난다. (...)
여자는 오늘날 '아이들을 위해 부모를 찾아주는 일'보다 '부모들을 위해 아이를 찾아주는 일'이 더 우선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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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밝은세상으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 받아 작성한 원고입니다. 레터 하단에 도서 증정 이벤트가 있으니,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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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싸한 기린의 세계』 글+그림 작가 1
초등학생이던 제가 친한 친구의 집에 놀러간 날이었어요. 친구의 집은 늘 비어있었기 때문에 어른들이 좋아하지 않는 만화책을 함께 읽기 좋았죠. 그런데 그 날따라 친구 어머니가 집에 계시더라고요. 낭패란 생각으로 쭈뼛쭈뼛 어색하게 들어섰는데 아주머니는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셨어요. 온화하고 상냥한 분이셨던 기억이 납니다. 인사를 마치고 친구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아주머니께서 치킨을 사왔으니 먹으라며 큰 대접에 치킨을 담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집에서는 늘 '닭다리는 먼저 집는 사람이 임자'였기 때문에 저는 빠르게 닭다리부터 찾았어요. 그런데 아주머니가 가져다 준 치킨엔 닭다리가 없었습니다. 친구에게 '어라 왜 닭다리가 없지?' 라고 물으니 친구는 익숙하다는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닭다리는 오빠 거라서 엄마가 따로 빼놔.'
중학생이 된 저는 평소와 다름없이 등교를 위해 학교 앞 횡단보도에 서 있었습니다. 학교까지 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어요. 그 날은 체육검정시험이 있는 날이어서 체육복으로 상하의를 갖춰 입은 상태였습니다. 친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서 있던 그 때, 엉덩이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 놀라 뒤를 돌아보니 파리한 몰골의 아저씨가 제 엉덩이에 손을 대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로 소리를 질렀고, 아저씨는 도망쳤어요. 학교에 가 이 사실을 알리니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가 혹시 착각한 건 아니니? 그 아저씨가 정말 너를 만진 게 맞니?'
이후 무사히 대학생이 된 저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가게 되었습니다.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기 전, 여자선배들은 후배들에게 당부했습니다. '그 선배는 위험한 사람이니 조심해라, 그 사람이 산책 가자고 해도 같이 나가지 말라'고요. 저는 겁이 나서 대충 장단만 맞추다가 졸린 척 일찍 방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밖이 시끄러워 뜬 눈으로 누워 있는데, 술에 취한 동기가 방으로 들어와 저를 일으켜세우며 도와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요. '아까 언니들이 조심하라던 선배가 둘이서만 산책을 나가자고 손을 잡아 끌고 어깨동무를 하는데 너무 무서워. 내 옆에 좀 있어주라.'
앞서 소개한 이야기들은 과거의 어느 날, 제가 실제로 겪었던 일들인데요. 갑자기 이 이야기들을 쏟아낸 이유는, 오늘 소개할 『알싸한 기린의 세계』가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만드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작가1의 신간, 『알싸한 기린의 세계』는 짧은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에세이툰입니다. 에피소드는 크게 세 파트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어요. <1장 이상한 세계>는 공기처럼 당연하게 존재하는 차별들에 제동을 거는 파트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가정 내 딸아들 차별과 여성의 선택을 두고 자신들이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무가치한 논쟁을 이어가는 남성들의 그릇된 인식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2장 기린의 세계>는 차별을 겪어 온 기린이 이 사회와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하는 파트로, 일상 속 크고 작은 차별들이 사회의 여러 문제들로 이어지는 양상을 살펴보며 설득적인 언어로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달합니다. 마지막으로 <3장 다시 만난 세계>는 여자들이 연대한 기록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제목에 들어간 '알싸하다'는 말처럼, 차별주의자를 대하는 기린의 말과 행동에는 우리를 얼얼하게 만드는 매콤함이 있습니다. 제가 앞서 떠올렸던 과거의 일들처럼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상황에서 '그 때 그렇게 했다면 좋았을 걸','내 생각을 좀 더 분명하게 이야기할걸' 같은 생각들을 마음 한 켠에 두었던 분들이라면 자기 할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기린의 모습에 통쾌함과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최근 콘텐츠의 주류 흐름처럼 '사이다 서사'로 분류되는 책은 아닙니다. 노골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한 권선징악의 형태를 띠고 있으면서 복수만을 목표로 하는 사이다 서사와 달리, '기린'의 말과 행동은 선/악과 무관하게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반응이기 때문이죠. 만약 기린의 말에 정량 초과의 매콤함을 느꼈다면, 그건 우리 역시 차별적 인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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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택에 남의 의견을 너무 첨가하지 말자. 다른 사람과 발맞추어 걷지 말고 마음대로 방탕하게 걸어보자. 어차피 삶은 남의 발만 밟지 않으면 되니까.
- 『알싸한 기린의 세계』, p.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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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여자들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빈번히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여자들은 외부의 시선, 평가, 판단에 계속적으로 노출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외부의 시선들은 여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한하고, 홀로 다른 결정을 내린 스스로를 이기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죄책감의 기원이 되기도 하는데요. 『알싸한 기린의 세계』는 여자들의 자유를 이기심으로 둔갑시켜 다른 선택지를 고를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획일적인 선택만을 강요하는 문화, 위험하다는 이유로 여성이 이 길 너머를 넘보지 못하도록 막는 문화 등 우리 바깥의 시선, 평가, 판단 등이 복잡하게 얽힌 문화들을 응집적으로 묘사하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기린은 외부의 시선에 내면의 시선으로 응수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시선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안전한 길이 아니니 혼자 다른 길로 가지 말라는 사람에게 '익숙하진 않지만 이끌리는 길로 갈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의 원천이 되고,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너도 그렇게 살라고 말하는 사회에겐 '새로운 길의 발견을 거대한 이변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무기가 됩니다. 그리고 부당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크게 부릅 뜬 눈으로 사회의 시선에 정면대응하는 기린의 모습은, 우리 안의 새로운 나를 일깨우는 든든한 토대가 됩니다.
『알싸한 기린의 세계』를 읽은 여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한다면, 우리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시선에 맞선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장담할 순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변화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 변화의 순간을 함께 목격하고 싶으신 분들, 그리고 변화의 길로 들어서는 일이 주저되어 지지와 응원이 필요한 분들 모두에게 우리의 단단한 동료, 『알싸한 기린의 세계』를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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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절망하지 말아요. 당신이 바뀌었잖아요! - 『알싸한 기린의 세계』, p.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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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1님,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탈코일기』, 『B의 일기』, 『알싸한 기린의 세계』를 그리고, 현재 활발하게 인스타에서 인스타툰을 연재하고 있는 작가일입니다. 페미니즘이 대중적으로 언급되는 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해요.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2. <알싸한 기린의 세계>는 여성으로 살아가며 겪는 차별, 페미니스트로서 겪게 되는 고민들과 이를 대하는 작가님의 마음가짐 등을 담은 짧은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저도 여성이자 페미니스트로서 공감되는 내용이 많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어요. 아마 저처럼 공감하며 읽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께서는 이 책을 펴내면서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어떤 걸 느끼고 경험하길 바라셨나요?
공감이죠. 『알싸한 기린의 세계』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도서가 아니에요. 가볍게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그래, 나도 그랬어.’ ‘나도 이렇게 말했다면 좋았을 걸.’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와 같은 감정을 독자님이 느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같은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도서를 추천하고, 서로가 공감한 지점들을 공유하고, 당장은 외로워도 결국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을 느끼셨으면 이 도서의 목적은 다 한 거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스트도, 아직 페미니즘이 뭔지 모르겠는 분들도 알싸하고 매콤하게 제 책을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
3. 작가님의 인스타그램과 책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우리 높은 점수를 받는 사람이 아닌, 평가받지 않는 사람이 되자.’더라구요.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지금 여자들에게 이 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우리는 커다란 착각 가운데 키워졌어요. 우리가 차별 당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착각이요. 하지만 낮은 점수를 받든, 높은 점수를 받든, 결국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에 내 평가서가 쥐어져 있고, 남의 평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나라면 영원히 그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할 거예요. 저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만점을 받기 위해 만점을 받을 수 없는 대회에 출전했죠. 아까운 시간이 흘러갔어요.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니더라고요. 저는 이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었어요. ‘높은 점수를 받는 사람이 아닌, 평가받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을 관통하는 문장이에요. 저는 이제 여성들이 ‘남’들에게서 자신의 평가서를 빼앗아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4. <알싸한 기린의 세계>에는 작가님이 페미니즘 ‘입덕과 부정 과정’을 겪으셨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또,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몰랐던 시기에 친구 덕분에 페미니즘을 처음 알게 된 일화도 실려있고요. 아직도 페미니즘을 모르거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여기는 일을 주저하며 ‘페미니즘 부정기’를 거치고 있을 분들이 많을 것 같아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들려주세요.
사람을 포기하는 일은 쉬워요. 싫다는 사람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일은 더 쉬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놓지 않는 주변 지인 덕분에 한 사람의 삶이 달라졌어요. 그건 바로 제 삶이에요. 그리고 아마 당신의 삶도 될 수 있겠죠. 주저하고 망설이는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지독할 정도로 여성들이 불리한 가부장제 구조 속에서 더 이상의 손해를 보고 싶지 않다면, 주변에 있는 페미니스트를 놓지 마세요. 그들은 당신이 남성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줄 사람이에요. 당신이 비로소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누구보다 쉽게 변화할 수 있도록 옆에서 응원해줄 사람들이에요. 당장은 주저해도 언젠가는 같이 함께했으면 해요.
5. <알싸한 기린의 세계>에는 오래오래 페미니스트로 행복할 수 있는 작가님만의 마음가짐이 담긴 일화들이 여럿 실려 있습니다. 이 일화들에는 페미니스트가 불행하길 바라는 사람들의 모습도 담겨 있어 분노를 자아내기도 하는데요. 주변에서 나의 불행을 바라는 것 같을 때, 언론에서 보도되는 소식들을 접하며 분노와 좌절감을 맛볼 때,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아 무력감을 느낄 때마다 여자들이 지치지 않을 수 있는 작가님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변했다'라는 말을 끊임없이 기억해요. 그리고 전체적인 미래를 생각해요. 화가 나고 우울한 가운데 이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스트가 될 여성들을 아니까요. 장작이 끊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타오를 거고, 결국 우리가 이길 거예요. 페미니즘의 싸움은 결국 쪽수싸움이에요. 비정상이 노출될수록 이상함을 느끼는 여성들은 더 많아질 거예요. 지난 5년 간의 시간이 그것을 증명해요.
6.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스스로를 검열하지 마세요. 절대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지 마세요. 자신을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탐내지 마세요. 그냥 거절하세요. 누군가가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가만두지 마세요. 가장 먼저 자신의 눈치를 살피세요. 언제나 건강하세요. 이게 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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