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구입니다. 예정대로라면 지난 10일, 58화가 발송되었어야 했는데요. 제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고 요양을 하게 된 바람에 발송을 하지 못했어요. 대신 빠른 시일 내에 <미투 운동 중간결산 특집호>로 또 한 번 찾아뵙고자 합니다. 오늘 발송되는 58화는 물론, 곧 발송될 특집호 역시 재미나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모두 코로나 조심하시고요! 약간의 기침과 함께 오늘의 들불레터 시작해보겠습니다 🤧
덧. 레터 하단에 '<정상은 없다> 도서 증정 이벤트'를 마련하였으니, 책 받아가세요! 💗
👏 들불의 PICK
- 『공정 이후의 세계』, 김정희원 지음
- 『여름 키코』, 주하림
- 『가족과 국가는 공모한다』, 노부타 사요코 지음, 조지혜 옮김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도서 증정 이벤트!)
- 『정상은 없다』, 로이 리처드 그린커 지음, 정해영 옮김
|
|
|
구글의 검색창에 '공정'을 입력한 후 뉴스 탭에 들어가면 약 11,800,000개의 검색 결과가 나옵니다. 반면, '페미니즘'을 검색하면 약 187,000개의 뉴스가 나오죠. 개인의 검색 습관과 기타 기술적인 문제들을 고려하더라도 큰 차이인 것 같은데요. 이렇듯 한국에서 '공정'을 둘러싼 담론은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확대·재생산을 거치며 엄청나게 쏟아졌고, 청년-세대론과 결부되면서 청년이 바라는 제1의 가치인 것처럼 비춰지고 있습니다. 저는 '공정'이라는 키워드가 모든 현상의 중심에 알박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조금 지겨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계속되는 공정 돌림노래 속에서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공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기 시작했죠. 또, 공정이라는 단어 때문에 가려진 수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하는 고민도 많아졌고요. 아마 많은 분들이 저처럼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정희원 교수의 책, 『공정 이후의 세계』 역시, 저처럼 '공정에 관한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어서' 집필된 책입니다. 그러니까 제목에 들어간 '공정'보다는 '이후의 세계'에 방점을 찍은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공정'에 관한 책이 아니다. 나는 '공정'에 관한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어서 이 책을 집필했다. 이제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 p.5
공정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성립하기 위해선 반드시 '경쟁'과 '능력주의'를 전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원리로 돌아가는 시장에서 살아 남으려면 '능력'을 갖추어야한다는데, 지금 우리 사회가 말하는 능력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배제한 채 정의된 기득권의 언어입니다. 『공정 이후의 세계』에서 저자는 '공정한 경쟁'과 '능력주의' 등의 담론을 분석하고, '공정'이라는 단어를 해체·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기득권의 언어였던 '공정'을 공동체 모두의 언어로 가져옵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저자는 본인이 소개할 개념과 관련된 한국의 사례들을 소개합니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부터 <인천국제공항공사 불공정 시비와 로또취업방지법>, <편의점 채용 공고 내 지원자격 논란(페미니스트가 아니한 자)> 등 한국 사회에서 논쟁을 일으켰던 굵직한 이슈들을 통해 논의의 물꼬를 트는데요. 이 책이 이론적 접근이 아닌 사회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 언어를 구조화하는 과정자체임을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평소 SNS를 통해 다양한 소식을 부지런히 접해온 분들께는 특히 흥미를 돋우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공정'에 대한 대안가치로 '돌봄'을 제안합니다. 돌봄은 유구한 시간 동안 부차적인 가치로 여겨져왔고, 돌봄능력은 열등한 존재인 여성만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간주되었죠. 하지만 저자는 공동체의 수호를 위해서는 정의와 돌봄이 필수적인 역할을 하며, 그렇기에 돌봄에 대한 공동체의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또,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와 공동체를 향한 돌봄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급진적 자기돌봄(radical selfcare)'의 윤리를 보편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여기에서 '급진적 자기돌봄'이란 흑인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강조해 온 윤리적 실천으로, 백인 중심 사회에서 스스로를 온전히 사랑하기 어려웠던 흑인 여성들이 스스로의 행복과 평안을 돌보는 법을 익혀야했고, 이에 '생존의 문제'로서 주창되었던 개념입니다.
이외에도 저자는 공정보다 더 중요한 여러 대안가치를 제안하면서, 우리를 공정 이후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저처럼 공정이 비껴간 사람과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 또 우리 사회에 변혁을 가져올 방법에 대한 여러 논의에 목말라 계셨던 분들께 이 책을 적극 추천합니다.
"급진적 자기돌봄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나의 회복이 곧 모두의 회복인 돌봄. 연대를 위한, 손을 맞잡기 위한, 동지가 되기 위한 돌봄. 내가 속한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자기돌봄. 그러므로 자기돌봄은 곧 타자돌봄이 된다." - p.135 |
|
|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한국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라 오랫동안 차트 상단을 점하고 있었던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에 대한 저자의 비판입니다. 저자는 1부 3장 <"능력주의는 허구"라고 말한다는 것의 의미>에서 샌델이 '능력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그 뿌리는 건드리지 않는 길을 택했다'며, '사회구조와 물질적·문화적 조건을 혁신하는 방법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피해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샌델이 능력주의의 본질을 회피하는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능력주의 비판 담론을 보수·개인화 시켰다는 것인데요. 이에 대한 내용은 위 유튜브 영상에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
입추 이후 아침저녁으로 조금은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저만의 방식으로 여름을 떠나보낼 채비를 합니다. 복숭아, 수박 같은 여름의 과일들을 양껏 먹거나 '여름 플리', '씨티팝 플리'를 찾아 들으며 여름의 분위기를 느끼는 등 모든 감각을 여름의 한복판에 머무르게 해주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고 시도하죠. 그 중에서 특히 제가 공을 들이는 작업은 바로 '여름 책 읽기'입니다. 여름에 읽어야 제 맛인 그런 책들을, 오직 저만을 위해 큐레이션하여 읽는 것인데요. 올 여름 역시 수많은 책 후보가 있었지만, 오랜 고민 끝에 첫 번째로 선정된 책은 바로 주하림의 『여름 키코』입니다.
들불에서도 시읽기모임*을 꾸준히 진행해오고 있는데요. 이 때 늘 듣는 이야기가 바로 '시 읽기는 어렵다'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그러니까 시에서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거나 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냥 느끼면 돼요! 정답은 없어요!'
주하림 시인의 『여름 키코』는 많은 시집 중에서도 특히 감각을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책입니다. '블러드 문blood moon'과 '바닷가'의 색채 대비(「여름 키코」)와 '깨진 글라스'와 '백사장 하얗게 말라가는 산호들'처럼 눈이 아프도록 부신 여름의 빛(「배케이션 빛」)을 통해 감각적인 경험을 할 수 있거든요. 이렇게 감각의 체험을 하다보면 문득, 주하림의 시가 우리의 환상 속에 자리한 푸르고 쨍한 여름의 빛이 아닌 눅눅하고 끈적한 여름에 더 가깝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의 변화를 감지한 독자는 이제 시에서 여자들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름 키코』는 우리가 다른 존재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여러 감각을 통과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막간 홍보 타임!
* 이번 들불의 시 읽기 모임에서는 '김유림' 시인의 시를 읽습니다. 아직 자리가 남아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께서는 신청해보세요! 나만의 방식으로 시를 만나는 경험을 해보실 수 있답니다 😉 (프로그램 알아보기!) |
|
|
<들불의 pick> 코너를 위해 저는 보통 6~7권 정도의 책을 검토하고, 그 중 3~4권의 책을 선별합니다. 이 과정에서 독서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레터 이외의 작업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되도록 빠르게 훑고 지나가려고 노력합니다. 분량이 많은 책의 경우에는 흥미가 가는 챕터를 골라 읽기도 하고, 잘 읽히지 않는 책은 발췌독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이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푹 빠져 읽게 되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모든 작업이 뒤로 밀리게 되고, 제 스케쥴(혹은 제 수면시간)에도 차질이 생기게 되지만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싶을 만큼 재미난 책들이 있어요. 지금부터 소개할 『가족과 국가는 공모한다』가 바로 그런 책이었습니다.
제목과 부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책은 결코 '재미있는' 책은 아닙니다. 이 책이 시작된 지점만 살펴보자면 재미는 커녕 암담하고 절망스럽죠. 그럼에도 제가 이 책에 푹 빠졌던 이유는 바로 이 책이 던지는 논쟁적인 화두 덕분입니다.
『가족과 국가는 공모한다』의 저자 노부타 사요코는 알코올의존증, 섭식장애, 가정폭력 등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그 가족, 그리고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이르는 다양한 이들과 상담을 해온 4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임상심리사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임상심리사인 저자가 '여성학의 성과를 흡수하고 사회학의 논리를 구사하면서' 가족 폭력의 구조를 발견하고, '사적인 경험이 국가 폭력과 뿌리에서 연결되어 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 결과물입니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직후부터 일본에서는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일상 용어로 급부상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PTSD라는 진단명이 등장하면서 가족 내 폭력 피해자도 PTSD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1995년 대지진 이후로 '어덜트 칠드런* 붐'이 일었다고 하는데요. 이 때 일본 사회에서 발견된 주요한 경향으로 '하향 비교'가 있었습니다.
하향 비교는 미국 심리학자 토머스 A. 윌스의 개념으로, '사람의 자존감이 현저히 손상되었을 때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자신보다 불행한 누군가와 비교함으로써 주관적인 행복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인데요(p.141). 일본 사회에서는 이보다 더 나아가, '더 불행한 사람과 비교하면 내 불행은 아무것도 아니니 참아야 한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경험을 쓰나미나 대지진을 겪은 피해자들의 경험에 비하면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요. 스스로가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타인이 그것을 비난함으로써 축소하려고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익명의 비난을 '하향 비교를 이용한 타자 때리기'라고 말합니다.
"한 내담자가 피해 지역에서 자신과 비슷한 신경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 여기에 악성 댓글이 쇄도했다. 피해 지역의 사람들은 신경증 이전에 가족을 쓰나미로 잃고 당장 내일 식사며 용변 문제로 괴로워하는데 이런 글이나 써서 올리느냐는 메시지가 산더미처럼 쌓인 것이다. 공포를 느낀 이 여성은 결국 컴퓨터를 만지지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p.142
저자는 이러한 '불행 비교'의 출발점에 '피해자 권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피해자라는 인식이 가져다주는 해방감과 고유함, 면책성을 주장할 수 있는 공명정대한 감각, 그리고 허무함과 상실감. 내면의 다양한 감정과 인식 체계가 교차하면서 피해자는 '터무니없는 승인·구제'의 열망을 가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승인 욕구는 '면책성을 무기로 삼아 공격하고 지배하려' 들며, '모든 책임을 면제받은 피해자이기에 휘두를 수 있는 힘으로 피해자임을 과시하고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지우며 때리기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한국 사회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사회구조적인 불평등에 의해 일자리를 얻지 못한데 대한 분노를 엉뚱한 집단을 향해 표출하는 집단적 분노의 양상, 나 역시 피해자라는 주장에 따라오는 또 다른 혐오들. 뉴스에서 자주 보이는 장면 아닌가요?
이외에도 임상심리사인 자신이 상담에 활용하거나 활용하지 않는 용어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저자는 '자기긍정감'을 상담에서 활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담자가 부정적인 사고에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아 자체를 나타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실패와 좌절, 친구관계에서 일어나는 충돌의 이유와 배경 등을 고민할 때, 신자유주의의 회로는 마치 부메랑처럼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도록 짜여 있다. 자기긍정감이라는 말은 바로 이를 상징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모든 실패와 고통은 결국 '자기 탓'이다. 자기긍정을 하지 못하는 내 탓인 것이다. 이렇듯 막다른 곳에 들어선 느낌이 '자기책임론'의 근본 토대를 이룬다." -p.203
이처럼 저자는 일본 내에서의 가족폭력에 대한 여러 문제들을 거시적·미시적 관점으로 짚어내는 동시에 그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하는데요. 책에서 제시한 여러 쟁점들이 한국 사회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는지 그 양상을 함께 살피며 읽으면 더욱 재미난 독서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 어덜트 칠드런 : 부모에게 입은 학대 경험이 피해임을 자각한 사람으로서, '가족 폭력의 피해를 표면화하는 데 앞장선' 사람 |
|
|
*(광고) 메멘토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급 받아 작성한 원고입니다. 레터 하단에 도서 증정 이벤트가 있으니,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
|
|
『정상은 없다』
로이 리처드 그린커 지음, 정해영 옮김
오늘 들불이 만난 이야기는 22년 7월에 출간된 로이 리처드 그린커의 『정상은 없다』입니다. 이 책은 자본주의, 식민주의 등 특정 집단에게 유리한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정신 질환을 낙인 찍어 온 역사를 그리는 책입니다. 책에서 저자는 정신 질환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이상적인 사회, 이상적인 사람'에 대한 정의와 기준으로부터 나왔으며, 이러한 정의와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자들을 의도적으로 배척한 사회적 과정이 바로 낙인이라고 설명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은 1700년대 말, 철저한 사회적 기획에 의해 ‘비정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시기, 정부와 자본가들은 남성이 노동자로서 건강과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그들을 돌볼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겼고, 이에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적 구실을 ‘집에만 머무는 역할’에 고정시킵니다. 또,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은 그 자체로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노동력을 생산해낼 수 있는 여성들의 몸을 '보호'라는 명분에 의해 남성에게 종속화했죠. 이러한 종속화과정에서 여성은 강하고 독립적인 남성 노동자에 배치되는 존재가 되어야 했고, 이에 여성은 '히스테리와 정신이상처럼 정신 질환에 걸리기 쉬운 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낙인 찍히게 됩니다.
1798년에 활동했던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장 조르주 카바니스의 주장을 보면 당대의 사회구조가 여성에게 어떠한 낙인을 덧씌웠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에르 장 조르주 카바니스가 여자는 남자보다 물리적으로 약해 보이고 뇌의 부피가 작은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항상 건강이 위협받고 일상생활에서 ‘고통이 지배적’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여성은 집에만 머물면서 “자신처럼 이성이 덜 발달되어 있고 구속받으며 살 운명인 노약자와 아이를 돌보기에 가장 적합하다”. 카바니스는 미혼 여성이 치매와 정신지체에 더욱더 취약하다고 확신했다. 결혼은 이런 질병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수용소와 같았다.”
- p.89, 『정상은 없다』
한편, 저자는 '조현병'이 어떻게 '인종주의적 낙인'으로서 기능하게 되었는지를 역사적 맥락과 함께 보여줍니다. 저자는 백인 의사들이 흑인들을 조현병으로 오진하는 전통을 만들기 시작했음을 지적하면서, 그들이 흑인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조현병을 '저항 정신병', '흑인병'으로 이름 붙이고 인종주의적 낙인을 찍은 과정에 대해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낙인이 사회구조적, 문화적 배경을 배제한 잘못된 인식임을 지적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의 우울증 및 다양한 상태를 조현병이라고 진단하는 전통이 여전한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인류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에이브럼 카디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자가 뚱하고 화를 잘 낸다는 고정관념이 현실에 기반한 것이지만, 그 현실은 생물학이 아닌 문화적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흑인의 성격'이 어릴 때 시작되어 미국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영속되고 반복되는 충격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모욕의 결과라고 말했다. 인종주의적 편견은 (오늘날 우리가 자기 낙인이라고 말하는 현상처럼) 자신이 열등하다고 믿는 사람이 스스로를 소외하며 마땅히 신뢰하지 않는 세상에서 한발 물러나, 랠프 엘리슨이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고 말한 존재가 되도록 만들었다."
- p.103, 『정상은 없다』
이외에도 저자는 정신 질환에 대한 낙인을 소개하며, '건강과 질병은 우리가 남들을 우리 문화의 기대에 부응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건강하지 못하거나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폄하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계속 변하는 이데올로기적 태도임을 지적합니다.
이처럼 사회구조적 통치, 규제, 구속을 위한 수단으로서 특정 집단을 정신 질환자로 낙인 찍고 무력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은 이후 문학작품과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강화되거나 폭로되어왔는데요. 『정상은 없다』의 내용을 보다 더 쉽게 이해해보기 위해, 정신병원에 수용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두 편을 소개해보겠습니다. |
|
|
독립성과 생산성이라는 이상, 그리고 낙인
1999년에 개봉한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는 여성 주연의 작품 중 특히 제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위노나 라이더, 안젤리나 졸리, 우피 골드버그 등 걸출한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점도 매력적이지만, ‘정신병’ 진단을 받고 타의에 의해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그들이 병원에서 만난 다른 여성들과 우정을 나누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면서, 병명이 아닌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 좋았기 때문인데요. 그동안 정신질환을 가진 여성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많았지만, 그런 영화들은 대체로 어떤 사건을 계기로 미쳐버린 여자가 자신의 삶을 파멸로 이끌고가는 모습을 포르노적으로 노출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처음 만나는 자유>의 경우 더욱 애착이 갔던 것 같습니다. |
|
|
이들은 생물학적 또는 신경학적 원인이 그들의 이상 행동을 유발했다고 믿는 의사와 가족들에 의해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신병원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여성들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의 문제를 이해하려는 시도 없이 이들을 의도적으로 소외한 결과이기도 한데요.
주인공인 수잔나의 경우,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는 코스를 거부하고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고, 그러던 중 자살을 시도하여 정신 병원에 수용되어 감시를 받게됩니다. 이 과정에서 수잔나는 의사와 반복적인 상담을 진행하는데, 이 과정이 조금 의아합니다. 의사가 계속해서 수잔나가 본인에게 정신병이 있음을 인정하길 바라며 수잔나가 미쳤음을 상기시키는 말들을 하거든요. 수잔나가 내면에 어떤 고민을 품고 있는지, 그를 둘러싼 환경은 어떤지 파악하려는 시도 없이 그저 '미쳤다'는 말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는 듯이 말이죠.
『정상은 없다』는 사회적, 경제적 삶의 규칙을 따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수잔나를 향한 이러한 낙인의 배경에 '자본주의'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자본주의하에서 게으르고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 생산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척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배척의 결과로 그들은 정신병원 또는 수용소에 감금되었죠. 이들을 감금한 목적은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을 크게 벗어난 사람들을 수용할 공간을 새로 만드는 것'(p.68)이었는데요. 이는 수잔나의 부모가 수잔나를 입원시킨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전쟁으로 인해 남성들이 무작위 추첨으로 징병되었던 때로, 노동력의 일부를 전쟁을 위해 차출해야하는 상황이었기에 개개인이 '정상적'인 삶의 궤도를 밟아 경제적 생산성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렇기에 사회는 수잔나가 무사히 대학에 진학하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길 강요하지만, 수잔나는 이를 거부하고 당대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직업인 '작가'의 길을 택하죠. 부모는 이러한 수잔나를 자본주의적 개인으로 개조하기 위해 보호라는 명분 아래 통제가능한 시설로 보내버립니다. 이 과정에서 수잔나가 겪게 된 심리적 경험은 누군가의 이해를 통해 해소가능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낙인이 찍힘으로서 수잔나는 이제 엄격한 규칙과 일과가 있는 시설에서 증상이 개선되어야만 사회에 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합니다.
"자본주의와 함께 '질서', '법', '규제' 등 통제를 나타내는 새로운 정신의 어휘가 등장했다. (...) 수용소 안에서든 밖에서든, 규제와 분류는 사회가 적절히 기능하는 데 핵심적이었다. 산업혁명 태동기에 자본주의 신봉자들에게는 인간을 포함한 사물의 세계에 자연의 질서가 있었다. 그것은 어떤 사람과 공동체가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종속되며 육체가 관리되고 조직되도록 요구하는 위계적 질서였다." - p.73-74, 『정상은 없다』
"1871년, 당대 의료계의 유명 인사였던 영국의 정신과 의사 헨리 모즐리가 「정신이상이 증가하고 있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 그는 수명 증가와 집계 방법 개선 같은 이유와 함께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가족 구성원이 자유롭게 생산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개인을 가정 밖에서 관리하려는 정부의 지원이 증가했다고 강조했다. (...)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노동하지 않는 자들을 추적하고 재활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 p.96, 『정상은 없다』 |
|
|
정상성 밖의 사람
1990년에 개봉한 영화 <내 책상 위의 천사>는 뉴질랜드 출신의 작가 자넷 프레임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주인공 자넷은 소심한 성격 탓에 사람들과 부대끼길 꺼리고, 이러한 행동에 오해를 한 사람들은 자넷에게 정신병원에 들어갈 것을 강권합니다. 이에 자넷은 병원에 수용되어 ‘정신분열증’(지금의 조현병) 진단을 받고 8년간 200번이 넘는 전기충격요법을 받게 되는데요.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서 나오게 된 이후 심각한 자살 욕구로 다시 정신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는 조현병이 오진이었음을 알려주며, 자넷의 증상이 병원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임을 확인해줍니다.
자넷이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된 사건은 교사인 그가 고위관료가 참관하는 공개 수업을 진행하면서였습니다. 자넷은 공개 수업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수업 중간에 학교를 이탈해버리고 말죠. 이러한 행동이 현재에는 대인기피증 또는 사회공포증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그저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분류될 따름이었고, 이에 정신 병원에 수용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영화 속 사람들은 타인과 관계 맺기를 주저하고 불안해하는 자넷의 모습을 '덜 떨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어른이 보여서는 안될, 어린아이 수준에서 해소되어야했을 문제로 여겨지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조현병'이라는 진단은 당혹스럽게 느껴지는데요.
『정상은 없다』의 저자는 1890년대에 활동했던 정신과 의사가 조현병을 '감소', '쇠퇴' 같은 말로 표현하며 신체적, 정신적 퇴행을 보인다고 이야기한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조현병의 병증(정신적 쇠퇴)을 ''미개민족'의 관습과 아이들의 '비굴함', 여자들의 불안한 감정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이러한 책의 내용과 자넷의 상태(불안이 높은 여성)를 고려한다면, 그가 정신 병원에서 '조현병'으로 진단을 받게 된 것은 낙인의 산물로서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상적인 사람(백인 성인 남성)이 진화와 발전, 권력과 힘의 정점을 보여주는 본보기인만큼 조현병은 네거티브 사진 이미지처럼 퇴화와 나약함의 표현으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조현병은 쓰임새 많은 도구가 되었다. 우생학자는 이것을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집단의 성생활, 결혼과 출산 규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고, 생물학자는 유색인종을 '원시적'이라고 비하하는 진화론을 뒷받침하려고 이용했으며, 정치인은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및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용했다. 이것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전형적인 예였다."
- p.115, 『정상은 없다』 |
|
|
그럼에도 세상은 진보한다
저자는 사회가 충격적인 퇴보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진보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를 위해 필수적인 과정은 바로 '스펙트럼'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신 질환이 모두 하나의 스펙트럼에 존재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수록' 질환명과 관련된 낙인이 무력해질 수 있다는 믿음, '문화가 낙인과 정신 질환을 함께 묶었다면, 그것은 분명 그 둘을 분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죠.
여러분은 삶 속에서 어떠한 낙인을 목격하고 계신가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거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 놓치고 있는 낙인이 있지는 않은가요?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도서 『정상은 없다』를 읽고 '낙인'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사회 안에 내재된 차별과 편견의 시선을 발견해보세요. 낙인이 '낙인찍힌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은 판단임을, 그것을 찍는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있음(p.487)'을 알고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진보할 수 있을 거예요. |
|
|
스펙트럼은 일종의 초대다. 그것은 우리에게 정신적 고통의 연속선상에서 더 넓은 세계에 합류할 것을 요청한다. 신경다양성 옹호자들과 함께 정상성과 비정상성은 실제로 아무도 살지 않는 허구의 땅이라고 말할 것을 요청한다.
- p.479, 『정상은 없다』 |
|
|
들불레터, 어떠셨나요?
들불은 여러분의 의견과 이야기가 궁금해요.
아래 버튼을 클릭하시면 익명으로 의견을 남기실 수 있답니다! |
|
|
들불레터 지난화 다시 보기
친구에게 들불레터 추천하기 아래의 링크를 주변에 공유해주시면, 들불의 내일에 큰 보탬이 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