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계절이 변화하는 길목에서 모두 안녕히 지내셨나요? 저는 9월 한달간 여러 고민들로 인해 작은 슬럼프를 겪었어요(슬럼프에 대한 이야기는 레터의 하단 <들불 비하인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답니다). 그간의 휴식을 만회하고자 한동안은 독자분들의 메일함에 자주 노크할 예정이니, 그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전주환 사건'이 왜 '여성 혐오범죄'로 호명되어야 하는지 살펴보며 '여성 혐오'에 대한 정의를 되짚고, '여성 혐오' 논쟁을 불러왔던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이어져 온 다양한 논의들을 담은 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근 발생한 전주환의 스토킹 살인사건을 두고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해당 사건을 여성 혐오 범죄로 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남성과 여성의 이중 프레임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또,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지냈으며 윤석열 측 핵심 관계자인 권성동 의원은 이 사건이 여성 혐오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전주 원룸 살인사건 및 계곡 살인사건 등을 '남혐범죄'라고 부르지 않는데 이 사건을 여성 혐오로 규정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오독"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정치권에서는 위 사건을 언급할 때마다 '여성'을 함께 호명하길 극도로 꺼리고 있는데요. 이 사건은 과연 정치권의 주장대로 '여성 혐오범죄'가 아닌 걸까요? 이 사건을 '여성 혐오범죄'로 명명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오늘 레터를 통해 우리 사회가 이 사건을 호명하는 방식에 대해 다시 한 번 고찰해보면 좋겠습니다.
🤝 들불이 만난 이야기
-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이나영 엮음, 김민정, 김보화 외 지음
- 『폭력의 진부함』, 이라영
-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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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김민정, 김보화, 김세은, 김수아, 김홍미리, 손희정, 오찬호, 이나영, 추지현, 허민숙, 홍지아 지음 이나영 엮음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는 '여성살해'를 키워드로 총 11편의 글을 엮어 낸 책입니다.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사회 곳곳에 자리한 '여성 혐오' 에 주목하고, 강남역 사건 이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검토하며, 앞으로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제안합니다.
먼저, 1부 <여성살해를 목격하다>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혐오범죄'로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한 고찰부터 남성 중심적 지식과 그 권위에 따라 누군가의 죽음이 명명되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점을 밝히고, 이를 통해 사회가 ''여자'라는 위치를 할당하는' 현상을 살피며 변화를 촉구하는 글 등을 담고 있습니다.
2부 <여성살해를 묵인하다>는 그간의 한국 영화가 "남성을 과대 재현하고 여성을 상징적으로 소멸시켜 온 역사에 주목"하고, 한국 영화의 여성 혐오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글부터 뉴스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보도하는 방식에 주목하며, 여성 혐오에 관한 해석이 갈리는 중요 지점인 '언론 보도'에 대해 살피는 글까지 미디어의 여성 재현을 분석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3부 <여성살해에 맞서다>에서는 피해자의 '스피크 아웃Speak Out'과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를 살피며, 앞으로 이어질 싸움들을 더 '잘' 해낼 수 있기 위한 토대를 다집니다.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에 담긴 11편의 글 중 '전주환 스토킹 살인사건'과 대한민국의 현재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글 몇 편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 여성에 대한 폭력은 혐오범죄인가, 허민숙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시선 그리고 그 사건을 특정 범죄로 분류하고 명명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언어 등은 모두 권력의 영향을 받는 제도권의 도구입니다. 여기에서 '권력'과 '제도'란 오래 전부터 남성 중심적으로 촘촘하게 짜여 온 성차별의 근간이죠. 우리가 마주하는 현상은 그것이 여성혐오적이라 해도, 남성중심적인 시각에서 규정되며 여성 혐오적인 맥락을 삭제하려는 과정을 통과하기 때문에 '여성 혐오'로 명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번 '전주환 스토킹 살인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규명해서는 안된다는 의견 역시 남성의 권력이 작동한 사례로, 우리 사회가 여전히 권력의 시각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혐오범죄인가」에서 저자는 "여성을 향한 폭력이 젠더에 의해 동기화된 범죄라는 주장이 논란이 된 이유는 '사실을 발견하는 자'가 누구여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혐오범죄에서 "범죄적 행동을 규정하는 권력을 남성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글에서 저자는 "가정폭력,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혐오범죄로 보는 이유는 이 폭력의 의도와 효과가 여성 종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의 동기 중 하나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여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폭력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폭력이 목표하는 바가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를 유지시키기 위한 데 있다는 것이죠. '전주환 스토킹 살인사건' 역시 자신의 잘못(스토킹) 때문에 재판을 받게 되었음에도 수차례 반복된 합의 요구에 피해자가 응하지 않자 살해를 계획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남성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 폭력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성차별적 인식과 실천이 혐오범죄와 맥락적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여성 혐오범죄로 보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 '저 남자는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저런 범죄를 저지른 것인데 웬 여성 혐오냐'와 같은 포털사이트의 기사 댓글들은 현상을 오독함으로써 범죄의 명명 권력을 유지하고, 여성이 자신의 언어를 통해 범죄를 호명하는 일을 무가치한 과정으로 폄하하며 권력 불균형을 유지하고자하는 행태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작성자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든 인지하지 못하고 있든 말이죠.
저자는 "젠더폭력이 혐오범죄로 조명되지 못하는" 동안, 우리 사회가 "가해자를 옹호하며 그들의 앞날을 걱정하고, 가해자 처벌을 망설이고 주저하는 차별적 태도"를 통해 "젠더폭력이 범죄라는 인식을 방해해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여성을 향한 폭력이 혐오범죄로 재정의 되면, 범죄를 다루는 데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죠. 이를테면, "여성을 상대로 권력을 부리려는 동기, 그래도 된다는 믿음, 통제 성향 발현의 성별 격차와 이유, 이 모든 것의 기저에 깔린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면밀히 관찰할 수"(p.57)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제약이란 "이미 주어진 구체적 조건하에서 움직이는 개인의 행위가 결합을 통해" 발생하고, 이에 따라 사람들 삶의 이익과 불이익이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암묵적으로 강요되는 사회적 규칙에 다른 "일상적이거나 습관적"인 행동의 반복과 축적이 다른 이의 사회적 위치와 "행위 조건에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취약성을 심화시킬 수 있다." - p.54
📗 하나의 사건을 보는 두 가지 시선, 홍지아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의 대부분을 뉴스와 신문기사로부터 전달 받습니다. 이 말인즉,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알게 모르게 보도 주체의 영향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뉴스를 비판적으로 읽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만, 가짜뉴스를 맹목적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요즘, 그러한 주장에는 영 힘이 실리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독자의 '비판적 해독'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해내야 할 실천입니다. 요즘에는 '미디어 리터러시'*라고도 부르는 이러한 실천은, 언론이 보도 윤리 준칙을 보다 더 분명하게 만들고 실천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니까요. 2부 <여성살해를 묵인하다>의 글, 「하나의 사건을 보는 두 가지 시선」은 이러한 시민의 역할을 한 번 더 강조한 글입니다. '여성 혐오'가 한국 사회의 주요 어젠다로 부상했던 '강남역 살인 사건' 발생 이후 "뉴스가 젠더화된 폭력을 어떻게 보도했는지" 분석하고, "성폭력 피해자의 2차 피해를 야기하는 선정적 보도의 문제점에 관한 지적이 대안적 뉴스 생산에 대한 고민과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길" 기대하며 "언론 보도에 시민의 비판적 해독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한 글이죠.
아마 여성 혐오범죄를 설명하는 기사 중 가해 남성을 '괴물', '악마' 등으로 묘사한 제목을 보신 적이 있을 텐데요. 저자는 이러한 보도 방식에 대해 "가해자의 파괴적인 가정 환경, 유년 시절의 학대, 정신병력 등을 언급하며 가해 남성을 사회 일반과 구분된 괴물로 재현"함으로써 "사건 자체를 정신질환자나 불행한 개인에 의해 벌어진 개인적이고 엽기적인 사건으로 프레이밍하여 여성을 향한 폭력의 일상성을 축소"하고,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돌아다니는 외부 세계에 대한 공포를 조성하며 여성 개인이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해야하는 일이라고 정당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미디어는 기호의 조합으로 우리가 사는 현재를 설명하며, 정의와 비정의, 상식과 비상식을 경계 짓는다. 하나의 사건이나 현상이 다른 기호로 호명되는 것은 사회적 정의를 겨루는 정치적 행위다. 사건의 원인과 본질에 대한 해석은 결국 한정된 사회적 자본의 사용과 제도 개선에 영향을 미치며 시민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 짓는다. 언론 보도에 시민의 비판적 해독이 필요한 이유다." -p.167
* 미디어 리터러시 : 미디어(Media)와 리터러시(Literacy)의 합성어로,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고 미디어 작동 원리를 이해하며 미디어를 비판하는 역량을 넘어, 미디어를 적절하게 생산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합니다.
📗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김홍미리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은 강남역 사건 이후 거리로 쏟아져나온 여성들, 광장으로 모여드는 '잃어버린 목소리Subaltern*'가 역사history를 새로운 역사her-story로 바꾸는 과정에서 드러난 양상들을 분석한 글입니다.
먼저, 저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 범죄를 근절하라는 여성들의 구호가 '안일하게 대처한 국가가 살인자다', '정부는 여성의 죽음을 더 이상 방치 말라'였던 것에서 강남역 사건 이후 '여자라서 죽었다', 'Men, STOP Killing Women'으로 바뀐 것에 주목합니다.
저자는 1990년 철학자 바우만의 말, "나치의 유대인 집단 학살이 문명사회의 일탈적인 광기나 문명화가 덜 진행되어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전형적인 근대적 현상임을 밝힌 바"가 있음을 인용합니다. 이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폭력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를 잘 나타내주는 말이기도 한데요. 저자는 이러한 문명화된 사회, 즉 "'잘 가꾸어진 국가'라는 아이디어 속에서 정돈되지 않는 잡초들을 제거하는 일은 창조적인 활동이지 파괴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여성은 이 과정에서 '온실'에 머물기를 강요받으며, 이러한 "관리와 보호를 뿌리칠 경우 위험을 감수하라고 요구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성살해를 '여성 문제' 또는 '자연재해처럼 어쩔 수 없다'고 여깁니다. 국가는 '온실'에 여성을 가둠으로써 그들의 책임을 다했다고 믿었고, 온실 바깥으로 나가 위험을 감수하는 건 오로지 여성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즉, 바우만의 말과 '잘 가꾸어진 국가'라는 개념을 토대로 정리해본다면, 여성은 국가적 기획에 의해 온실 속 보호의 대상으로 지정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통제를 위한 방침이었을 뿐 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여성이 살해당한 것은 여성 개인에게 일어난 '자연재해처럼 어쩔 수 없는'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회 문제'도 아니고 '젠더 문제'도 아닌 '여성 문제'가 되어 정작 드러나서 보여야 할 것들이 통째로 빠져나가버린" 여성 살해를 우리 사회도 드디어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했는데요. 그 계기가 바로 '강남역 살인 사건'입니다. 여성으로부터 계속해서 "조심해서 들어가, 일찍 들어와, 늦게 다니지 마"라고 쉴 새 없이 다짐받으며 "여성에게 조심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했던" 사람들은 여성들이 나서서 '이 사회는 여성에게 안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여성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광장으로 나가 자신들의 온전함bodily integrity에 대한 감각을 복구하기 위한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죠.
이 글은 위 내용 이외에도 여성들이 '메갈리아'를 만난 이후 디지털 네이티브가 된 과정, 그리고 이들이 강남역 살인 사건 직후 '강남역 살인사건 공론화' 트위터 계정을 만들며 일사불란하게 여성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모으기 시작한 배경을 소개하는데요. 이 책의 글들 중 제가 특히나 재미있게 읽은 글이니, 꼭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서발턴Subaltern : 단순히 하위주체나 하위계급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라 “전(全)지구상에 다양한 형태로 흩어져 있으며, 자본의 논리에 희생당하고 착취당하면서도 자본의 논리를 거슬러 갈 수 있는, 저항성을 갖는 주체”를 말한다. 이에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세계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제3세계라는 공간적 조건과 계층적 하위성, 그리고 젠더 문제를 결합’하여 서발턴이란 개념을 재의미화 했다. - 《김재영의 『코끼리』를 통해 본 서발턴의 서사》 인용
"희망이 있다면, 덕분에 낙후된 사회를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공동의 책임감이 두텁게 쌓여 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정치적 책임감으로 연결된 이 목소리('내가 너고 네가 나다')는 달라진 우리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 선언한다. 여성학자 마정윤은 박노해 시인의 시 「아직과 이미 사이」를 인용하며, '희망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는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에 있다'라고 말한다.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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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제8조의2(피의자의 얼굴 등 공개)의 내용에는 특정강력범죄사건의 피의자의 얼굴, 성명 및 나이 등 신상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는 조건 네 가지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특정강력범죄사건일 것, 피의자가 그 죄를 범하였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을 것, 국민의 알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방지 및 범죄예방 등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할 것, 피의자가 <청소년 보호법> 제2조제1호의 청소년에 해당하지 아니할 것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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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진부함』를 쓴 이라영 작가는 4장 「너는 누구냐」에서 '범죄자 신상 공개'의 기준이 공정하지 않으며, "아내를 죽이거나 수많은 여성들을 연쇄 강간하고 살해한 남성의 얼굴은 쉽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저자는 자신이 "범죄자의 신상공개와 얼굴 공개에 늘 동의하지 않았"으며, "옳지 않음은 물론이고 실효성에 의구심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n번방 사건'의 경우, "가해자들이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로 다른 사람의 신상 정보를 손에 쥐고 착취를 일삼았다는 점", "성착취물 피의자들 중에서 실제로 잡힌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다수의 가해자들이 여전히 우리 일상에서 법망을 피해 존재한다는 점", "실제로는 경찰에 잡힌 극소수조차 매우 경미한 처벌을 받으며 다른 누구보다 가해자 자신들이 이 사실을 잘 안다는 점"을 들어 신상공개에 동의한다고 이야기하는데요. 즉, 사법부가 강력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에게 제대로 된 형벌을 선고하고 처벌을 내린다면 사법적 정의에 대한 믿음으로 '신상공개'가 불필요하다고 느꼈겠지만, 실제로 피의자 중 상당수는 터무니없이 낮은 수위의 처벌만을 받게 되므로 신상공개를 함으로써 "그들의 평범함을 드러내"고, "일상의 범죄자들을 알아내어 예방의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주도 펜션 살인사건처럼 여성이 남성을 살해한 사건은 비교적 신상공개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데에 반해 남성이 여성을 살해한 사건, 그 중에서도 특히 '아내를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는 유독 신상공개가 더디거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신상공개' 또한 그 기준이 공정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단서가 되는데요.
최근 트위터에서는 강력범죄사건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태형을 부활시켜야 한다' 트윗들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만약 '태형'이라는 형벌이 생긴다면, 그 형벌을 더 많이 받게 될 대상은 누가 될까요? 과연 '태형'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얼굴 드러내기'(신상공개)에 대한 생각과 '처벌의 공정함'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정리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잔혹한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얼굴 공개는 그 실효성도 검증되지 않았거니와 공개의 기준이 공정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더구나 피의자의 가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건강한 경각심은 더욱 찾기 어렵다. 제주도 펜션 살인사건의 경우 단지 여성에 대한 공식적 망신 주기에 불과하다. 그것이 정의라면 우리는 얼굴이 공개되어야 할 수많은 남성 살인범의 목록을 매우 길게 작성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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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상단에 뜨는 책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페미니즘 입문서로 많이 거론되는 책입니다.
이 책은 2012년 출간 이후 꾸준히 사랑받다가 올해 6월 개정 출간되었어요. 저자는 「개정 한국어판을 내며」에서 "여성 혐오의 이유와 메커니즘을 밝힌 것이 바로 이 책"이며, "여성 혐오의 원전이 된 책은 이브 세지윅이 쓴 《남성 간 유대Between Men》이지만, 나(우에노 지즈코)의 책이 세지윅의 책보다 이해하기 쉽고 응용 범위가 넓다"고 자신있게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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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노 지즈코가 이토록 자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정말 쉽게 읽히는 재미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론서라고 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과 난해한 번역체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우에노 지즈코의 책은 용어의 설명이 어렵지 않고, 용어마다 그 사례를 들어 명쾌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 놀라운 책입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에 대해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죠. '여성 혐오'의 정의를 밝히며 시작하는 이 책은, 비인기남, 아동 성학대자, 황실, 춘화, 어머니, 아버지, 여학교 문화, 병든 여자 등과 여성 혐오의 관계를 낱낱이 분석합니다. 제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챕터는 제16장 「여성 혐오는 극복될 수 있는가」로, 여성 혐오를 극복하는 두 가지 시나리오(여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 남성이 극복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한 부분입니다.
책의 서두에서 저자는 '여성 혐오란 남성에게 있어서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 있어서는 자기혐오'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본 챕터에서 저자는 자신이 언급했던 여성 혐오의 정의에 대해 다시 한 번 서술하며, '모리오카 마사히로'*의 잡지 인터뷰 내용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남성의 자기혐오라는 문제가 아닐까요">를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남성에게도 자기혐오는 있겠지만, "하나는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것, 또 하나는 자신이 충분히 남성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것"일 것이며, 모리오카의 논의 속에 이 두 가지 자기혐오가 구별되어 있지 않은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규격에서 벗어난 남자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으며 점점 고독해지는 것도 호모소셜한 집단으로부터 배제된 '남성이 되지 못한 남자'에게 연대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신체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최초의 타자이며, 자기 신체의 타자성을 받아들인다면 타자의 중심에 있는 여성을 지배나 통제의 대상, 위협이나 공포의 원천으로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말하죠. 여러분은 우에노 지즈코의 이러한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여성 혐오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논의들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매개이자 페미니스트인 나 자신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을 확인하고 보다 더 명확히 규정하도록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책입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 모리오카 마사히로 : 1958년생, 현재 와세다 대학 교수이며 『남자도 모르는 남성에 대하여』를 썼습니다.
"마르크스는 '다가올 공산주의 사회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계급사회에 오염돼 자란 역사적으로 피규정된 존재다. 미래의 인간상은 그 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인간만이 알 수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나'란 존재는 언제나 중간적인, 과도기적인 시대의 산물이다.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며 살 필요는 없다. 과거 자신의 한계, 실수, '병듦'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과거의 나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품에 끌어안으면 된다." - p.3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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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 많은 글을 읽는 요즘입니다. 최근에는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읽었고, 알라딘 북펀드를 통해 받은 실비아 플라스의 책 『에어리얼』을 읽었어요.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책을 레터에 소개한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병렬독서꾼이라1) 여러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데요. 이렇게 읽다보면, 여러 생각이 뒤엉켜 정리가 필요한 순간이 옵니다. 그러면 메모장2)을 켜 아무 말이나 적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감정부터 내용상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 또는 꼭 남겨두고 싶은 문장 등 메모의 종류도 다양하죠. 이렇게 한참을 적다보면 이 책을 들불레터에서 다루겠다는 마음을 먹고 읽기 시작한 것이 아닌데도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 이 책.. 좋긴 좋은데 시의성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네.'
'시의성'은 '그 당시의 사정에 알맞은 성질'입니다. 들불레터를 시작한 이후, 저는 줄곧 이 '시의성'이란 것에 집착해왔어요. 제가 생각하는 '그 당시의 사정'이란, 정확히는 '레터를 발행할 당시의 사정'으로 1) 출간된 지 6개월 이내의 신간일 것 2) 발행 시점 전/후로 발생한 일을 설명 또는 반박할 수 있는 책일 것이라는 조건에 맞는 책을 찾아 소개하는 일을 의미했습니다. 가끔 시의성이 떨어지더라도 들불레터에서 반드시 다뤄야하는 중요한(필요한) 이야기가 있다면 다뤘지만, 대체로 위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책을 소개하곤 했어요.
'시의성'에 집착하는 저의 태도는 독서의 즐거움을 반감시켰고, 자연히 뉴스레터에도 소홀해지게 되었습니다. 뉴스레터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책에만 푹 빠져 읽는 경험을 통째로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생각해보면 '시의성'이라는 건 결국 자의적인 기준에 의한 것일 뿐인데도 '필요한 정보', '신속한 정보' 를 제공해야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생각의 배경에는 FOMO 증후군3)이 자리하고 있단 걸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 아는 것을 부지런히 좇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고, 뉴스레터의 특성상 전달하는 정보들이 다른 레터에 비해 한 발 늦은 소식일까봐 초조해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러한 생각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의 방법을 고안해보았는데요. 바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내가 지금 집중하고 싶은 키워드'로 검색하여 찾아 읽는 일입니다. 이것도 쉬운 작업은 아니더군요. 검색하다보면 끝내주게 멋진 큐레이션으로 저를 현혹시키는 글들을 발견하게 되고, 제가 집중하는 키워드가 '시의적절하지 않음'을 출간연도를 통해 자꾸만 확인하게 되니까요.
그리고 들불레터의 방향 또한 조금 달리 해보려고 마음 먹었어요. 시의성보다는 큐레이션 자체에 좀 더 집중하기로요. '때'에 맞추기 보다는 '키워드'에 맞추고, 레터의 맥락과 흐름을 보다 더 뾰족하게 하는 거죠. 어디에 포커스를 두느냐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 궁금하시다고요? 앞으로 발행될 레터를 통해 변화를 체감하실 수 있도록 열심히 만들어볼게요.
1) 병렬독서꾼 : 사실 저는 책을 전문적으로 다룬다기보단 제 입맛에 맞게 다루기 때문에 '-꾼'보다는 '-잡이'가 더 맞는 표현이겠으나, 병렬독서잡이라는 말은 영 어감이 이상하므로 글에선 병렬독서꾼으로 표기하였습니다
2) 메모장 : 요즘에는 노션보다는 베어를 더 자주 사용합니다.
3) FOMO 증후군 : Fearing Of Missing Out의 줄임말로, 유행에 뒤쳐지는 것에 대한 공포심리, 소외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나타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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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레터, 어떠셨나요? 들불은 여러분의 의견과 이야기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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