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들불레터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은 여성들이 경험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를 고전 속에서 발견하는 동시에 남성들에게 주어진 명예와 자유, 초월적 지위가 '예술'이라는 미명 아래 획득된 것임을 고발하고 이러한 예술적 성취가 여성을 모욕해 온 역사를 지적한 작품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만의 기준으로 '고전'을 새로이 분류하고 그 리스트를 작성해보는 시간을 가졌어요. 이 때 가장 먼저 떠오른건 바로 19~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작가들, 에밀리 디킨슨,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이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고전'에 걸맞는 작가로 이들을 떠올리실 것 같은데요. 오늘은 국내에서 여전히 자주 거론되고 번역되는, 빛나는 고전을 썼던 여성작가들의 삶을 다룬 신간들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이들의 삶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다시금 조명하고, 이들이 경험했던 세상과의 불화를 삶의 구석구석에서 면밀하게 살피며 '고전'과 '위대한 작가'의 조건에 대해 되묻는 시간을 가져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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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 가드너 지음, 최지원 옮김
얼마 전 19세기 여성 작가의 작품을 함께 읽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완독했습니다. 정희진 작가가 추천사에 썼듯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젠더가 역사를 작동시키는 주된 원리임을 보여"주는 작품인데요. 이 책을 읽는 동안 역사가 여성 작가를 어떻게 오해했고 또 사라지게 만들었는지 확인하면서, 이 작품과 같이 여성 작가의 계보를 발견하고 정통성을 부여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론,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그들의 삶이 좀 더 궁금해지기도 했어요. 내가 경험해본 적 없는 19세기의 그 시절, 그들은 어떤 기쁨과 좌절의 순간들을 경험했을까요? 그들은 매일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았을까요? 그들의 일상은 작품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요? 너무 많은 물음표가 생긴 저는 그들에게 당장 편지라도 부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다 만난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는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에 온 반가운 답장 같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브론테 자매의 유년 시절부터 작품을 출간해내기까지의 생애를 자매의 편지와 일기, 주변인의 증언 등의 기록을 꾹꾹 눌러 담은 작품인데요. 기록 사이사이로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빅토리아 시대의 삽화가 실려 있어 미지의 과거조차실감 나는 풍경으로 다가오도록 만든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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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여행길의 길동무>, 오거스터스 에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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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당시 자매의 삶에 주요한 영향을 미쳤던 사회적 변화들을 언급한 지점들도 인상 깊습니다. 예를 들어, 브론테 자매가 첫 시집 출판 이후 런던에 가게 된 일을 이야기하며 1840년대 영국에서 일어났던 '철도 투자 붐'을 언급하는 부분이 그러한데요. '철도'가 브론테 자매들의 삶에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 사실을 짚어주는 지점은 《망고와 수류탄》을 쓴 기시 마사히코가 이야기했듯 (개인의) 생애사가 "어떤 것의 대표도 전형도 평균도 아닌 개별의 개성적인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거대한 사회변동과 역사적 상황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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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파트는 작품이 출판되기까지의 여정을 구체적으로 담은 Part5. 「커러, 엘리스, 액턴 벨」 이었는데요. (챕터의 제목이기도 한)커러, 엘리스, 액턴 벨(각각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이라는 필명을 써야 했던 자매의 사정을 읽을 때는 '조지 엘리엇'으로 활동했던 메리 어번스나 '히구치 이치요'로 활동했던 히구치 나츠 같은 작가들의 슬프지만 결연한 얼굴들이 함께 떠오르기도 했어요.
"이처럼 모호한 이름을 선택한 것은 우리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성적 색채가 강한 기독교식 가명을 쓰는 건 양심상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딱히 우리가 글을 쓰고 사고 하는 방식이 흔히 말하는 '여성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자. 다만 여성 작가들은 편견에 좌우되기 쉽다는 막연한 인상이 있었고, 비평가들이 때때로 비판을 위해 인신공격을 하며, 보상을 위해 진정한 칭찬이 아닌 아첨을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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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브론테 자매의 삶을 그들이 만든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는 점인데요. 샬럿이 제인 에어의 눈을 통해 묘사한 가난과 학창 시절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자매들의 아버지인 패트릭 브론테는 적은 연봉으로 자녀 여섯 명을 부양해야했습니다. 그래서 딸들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을 '궁핍한 교역자의 여식들'을 위해 설립된 코완브리지 학교에 보내기로 하죠. 이 학교에서 자매는 엄격하고 가혹한 일상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이들은 당시의 상황을 《제인 에어》에서 "겨울철에 일요일은 우울하기만 했다. 우리는 브로클브리지 교회까지 2마일을 걸어가야 했다. 추위에 떨며 출발해 교회에 도착할 때쯤엔 뼛속까지 시렸으며.." 와 같이 묘사했어요.또, 이후 학교에 찾아 온 '티푸스'(전염병)의 그림자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봄기운이 활발해지자 역병은 더욱 활기를 띠며 이 '보육원'으로 스며들어 와 학생들로 북적이는 교실과 기숙사 구석구석에 티푸스를 퍼뜨렸고..") 작품에 담아냈죠. 이렇듯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는 브론테 자매가 경험한 삶의 단편들을 작품 속에 어떠한 방식으로 녹여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브론테 자매의 팬들에게 특히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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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넬러피 휴스핼릿 지음, 공민희 옮김
오늘 소개한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는 허밍버드 출판사의 '일러스트 레터' 시리즈 중 세 번째 책인데요. 앞서 같은 시리즈로 출간된 작품으로 19세기를 대표하는 또 다른 작가, 제인 오스틴의 삶을 담은 『제인 오스틴, 19세기 영국에서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72통의 편지와 170여 점의 삽화를 수록한 이 책에서 우리는 제인 오스틴의 필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나 《이성과 감성》에서 드러났던 제인 오스틴의 스토리텔링 실력이 그가 쓴 편지에도 유감없이 담겨 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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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엘리엇(본명 : 메리 앤 에번스) 지음 이가형 옮김
1830년대 영국 가상의 지역인 '미들마치'의 이야기를 담은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는 제인 오스틴이나 브론테 자매의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입니다. 방대한 분량만큼 등장인물 역시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 책은 로맨스를 주요 서사를 이끌어가는 한편, 결혼이라는 제도와 선거법, 곡물법과 같은 농촌 개혁 이슈들도 함께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엘리엇은 이 책에 '지방 생활의 연구'라는 부제를 달았다고 하는데요. 독자들이 이 책과 함께 조지 엘리엇의 본명도 기억해두길 바라는 마음으로 짧게 소개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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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밍버드 출판사에서 들불레터 독자들을 위해 총 6권의 도서를 증정해주시기로 하셨어요! 👏 이에 증정 이벤트를 오픈하니 많은 관심과 응모 부탁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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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포르티에 지음, 임명주 옮김
얼마 전 읽은 하재영 작가의 책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의 제목,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가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썼던 유명한 문장임을 알게 되면서 부쩍 디킨슨의 삶이 궁금해졌습니다. 특히 에밀리 디킨슨과 어머니의 관계가 궁금했죠. 검색해보니 한국에는 디킨슨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하재영 작가의 책과 검색을 통해 그의 어머니가 쓰러진 후 그가 아픈 어머니의 곁을 7년동안 지켰다는 것, 어머니의 부고를 전하는 편지에서 어머니를 "우리 최초의 이웃"이라고 지칭했던 것, 그가 "어머니의 시대를 넘어서고, 나를 낳은 여자의 분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기 위해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와 같은 선언을 했다는 것 정도를 알게 되었어요. 분명 디킨슨의 삶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그에게 중요한 삶의 계기나 동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들 모녀의 서사에 주목했던 것 같고요. 하지만 디킨슨의 모녀 관계만을 조명하기엔 여전히 디킨슨의 삶에 아리송한 공백들이 많았습니다. 은둔하는 동안 그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가 '글'을 통해 세상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자 했는지 그 속마음이 궁금했죠.
이 때 발견한 책이 바로 도미니크 포르티에의 《종이로 만든 마을》입니다. 이 책은 기존의 전기문학과 달리 에밀리 디킨슨의 일상과 소설가이자 에밀리 디킨슨 연구가인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포개어 놓으며 두 사람이 실제로 교감하고 있는 듯 이야기를 전개한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전개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어요. 표지에 '에밀리 디킨슨이 사는 비밀의 집'이라고 쓰여져 있기 때문에 디킨슨만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집어드는 분도 많을 것 같단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저자가 채택한 이 낯선 형식이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치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입장에서 그가 지어 올린 '종이로 만든 세계'를 함께 체험하며 교감하는 읽기를 통해 마치 친구와 교환일기를 주고 받으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푹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세상. 세상은 오렌지만큼 작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복잡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글은 세상을 대체하기도, 재창조하기도, 파괴하기도 한다. 세상은 창문 너머에 있다. 다시 말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 세상은 어둡고 방은 환하다. 시들이 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p.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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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제목을 클릭하시면 을유문화사 인스타그램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을유문화사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대표 시 선집이 출간된다고 합니다. 여러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이 출간되고 있지만, 저는 그 중에서 특히 을유세계문학전집을 좋아해요. 그래서 이번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의 출간이 더욱 기대됩니다.
5월 14일까지 을유문화사 인스타그램에서 서평단 신청을 할 수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참여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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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지현 옮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아직도 읽지 않은(또는 처음 보는) 작품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합니다. 현재까지 한국에 소개된 울프의 책만(중복 포함) 200권이 넘는데다 작품집이 출간될 때마다 다른 작품에 수록된 글과 중복되는 글이 여럿 실려 있으니 웬만한 작품은 다 읽었다고 착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블루 & 그린》이 출간되었을 때에도 조금 심드렁한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웬걸, 한 번 가볍게 살펴보자는 생각으로 출판사 소개글을 읽는데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글도 수록되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또 한 번 놀라버렸고,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8권이나 갖고 있음에도 또 한 권을 구매하고야 말았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가 겪었던 정신 질환과 생의 마지막 선택 때문에 '우울한 글', '어두운 글'을 쓰는 작가라는 편견에 갇혀 오독되는 작가 중 한 명인 것 같아요. 이러한 세간의 평가 때문에 울프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고요. 이 책은 여태 그의 작품 세계를 오독해왔거나 새로운 독해를 시도하고픈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은 책입니다. 유머와 위트, 감동이 담긴 세심한 묘사와 풍부한 감정적 서술을 통해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다양한 삶의 색채를 함께 경험해볼 수 있을 거예요.
"커튼이 젖혀진 창문을 통해 보랏빛 저녁 하늘이 보였다. 음악실에 있는 갓 없는 전등에 불을 밝히니 창문 밖에 펼쳐진 보랏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꽃을 쥔 채 몸을 조그맣게 말아 앉은 줄리아 크레이는 마치 망토를 뒤로 펄럭이듯 런던의 밤을 벗어던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채 홀연히 앉아 있는 그녀의 둘레에는 영혼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기운, 그녀가 만들어 자신을 둘러싸게 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p.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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