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요 지음
종종 차별과 혐오가 사라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봅니다. 상상일 뿐인데도 쉽지 않습니다. 타인을 밀어내고 배제하기 위한 기준들로 꽉 채워진 세상만을 살아왔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차별과 혐오가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기엔 아직 제 상상력이 빈곤한 탓일까요? 아니, 그 전에 차별과 혐오가 사라진다는 건 가능한 일인 걸까요? 스스로에게 끝없는 질문을 던지며, 저는 차별과 혐오를 만들어내던 기준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어김없이 그것을 대체할 또 다른 기준이 자리하게 될 거라는 불안감을 가진 채로 상상에 실패하곤 합니다.
여기, 인종, 성별, 민족과 같은 개념이 사라진 어느 미래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교육은 가상 서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공간에는 겉모습만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재단하던 기준들, 우리가 매일 목이 터져라 '평등'을 외치며 사라지길 바라왔던 바로 그 기준들이 없습니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이 공간을 영영 비워둔 채 살아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학교는 빈칸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인종, 성별, 민족이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 효율과 능력주의가 채우죠. 공정한 과정을 통한 평등한 경쟁, 그것이 바로 이 세계를 유지하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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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가 되는 주문》은 '능력, 합리, 혁신'이라는 슬로건이 지배적인 힘을 가지게 된 학교를 다니는 청소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다니는 학교의 학비는 수업료뿐 아니라 먹고 자고 생활하는 모든 비용을 합산한 금액이기 때문에 무척 비쌉니다. 이 비용은 졸업할 때까지 모두 유예되는데요. 대신 졸업 전까지 학비를 대납해 줄 후원사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싼 학비를 학생이 전부 끌어안게 되죠.
'확실한 미래'를 보장해준다는 학교는 학생들의 가능성과 미래에 투자한다는 명목으로 연구소나 기업과 결탁하고, 학생들의 인생을 담보 삼아 돈을 법니다. 이러한 시장 논리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누군가는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가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한 순간 떠안게 된 빚을 오랜 시간 갚으며 매일을 버티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테고,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하지만 세상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탓으로 돌립니다. 출발선을 동일하게 만들어주었으니 훌륭한 목적지로 내달리는 일 역시 개인의 몫이라고, 제대로 달리지 못한 개인은 불행한 결과를 자초하게 될 따름이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이러한 학교의 모습은 왠지 낯설게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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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짓눌린 학생들은 대피소로 모여듭니다. 그 곳은 바로 '게임' 속 가상 공간인데요. 이 게임은 15년 전, 게임 속 괴물에 의해 잡아 먹힌 학생들이 현실에서도 죽는 버그가 발생했던 위험천만한 게임입니다. 게임 속 버그는 고치지 못했지만, 15년 전과 다른 점은 버그를 공략할 수 있는 '마법소녀'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산학협력창의인재육성학교'의 3학년생인 '서아'는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며 죽는 연습을 해 봅니다. 정말 죽기로 결심했을 때에 조금은 덜 무서울까 하는 생각으로 옥상 난관을 붙들고 선 것이죠. 하지만 서아의 마음 한 켠에는 잘 풀릴지도 모르는 미래에 대한 기대 역시 웅크리고 있기에, 오늘은 죽는 연습 정도로 멈춥니다. 이 때, 서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이 나타납니다. 자신을 사람을 살리는 마법소녀라고 소개한 현은 게임으로 서아를 이끕니다. 그리고 '마법소녀'로서 괴물을 밟고 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아직은 여기가 필요한 학생들이 있으니까, 앞으로도 많이 들어올 테니까,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하니까―나는, 새로운 마법소녀를 찾고 있어."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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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는 가상공간 속 현이 새까만 고깔모자와 망토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고 마법소녀보다는 마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법소녀는 좋은 거, 마녀는 나쁜 거"(p.19)라고 말하죠. 현을 바라보는 서아의 관점은 《마녀가 되는 주문》 속 세계의 지배적인 논리를 보여 줍니다. 공정의 논리로 둔갑한 돈의 세계에서 만들어 낸 이분법적인 문제들, '성공과 실패', '생존과 죽음'과 같은 '이것 아니면 저것' 뿐인 세상의 논리를 말이죠. 냉혹한 돈의 세계에서 그 외의 모든 것은 세계 바깥으로 밀려납니다. 희망, 사랑, 따뜻함, 온정과 같은 가치들은 확실한 재화를 생산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점차 잃어버리죠.
이처럼 냉혹한 세계에서 학생들은 사회가 정한 확실한 미래에 도달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다 자신의 상황이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고 여기는 누군가는 불확실한 미래보다 죽음이 낫다고 생각하며 일부러 게임에 접속하기도 합니다. 누구도 이들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때 분투하는 존재, 그 과정에서 희생 당하는 존재는 오직 아이들일 뿐이니까요. 사회는 아이들을 돈으로 속박한 채 쓸모에 대한 강박과 불안만을 야기하며 아이들의 희생에는 침묵합니다.
마주한 진실 앞에서 인물들은 반으로 딱 잘라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죠. 탈락된 자들에게 실패와 죽음이라는 제한된 선택지만 남는 세계에서, 괴물을 밟고 서는 '마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나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존재, 누군가에게 남은 최선의 선택지가 오직 죽음 뿐일 때 그를 방관하는 존재, 위험을 무릅쓰지 못하고 비겁해지는 존재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어느 쪽이 좋고, 또 어느 쪽이 나쁜가요?
"사육장에서 일하는 수의사는
가축을 돕는 걸까, 사육장의 주인을 돕는 걸까?
그걸 분리할 수 있을까?" (p.174)
"다정한 마음은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구해야 하는 게 세상의 모든 한 사람이라면, 그 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세상이라면 어떨까. 다정과 이해도, 곁에 있어 주는 시간도, 도피처가 되는 꿈도 모두 그 세상 안에만 있는 거라면. 학비도 대신 내 주지 못할 용기만을 껴안은 채 세상을 깨고 밖으로 나아가라고 할 수 있을까."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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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현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비극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슬픔이 차오릅니다. 하지만 작품이 그저 슬픈 비극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녀가 되는 주문》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인간성이 배제된 냉혹한 세계 저 너머를 상상하고, 바깥의 세계를 상상하는 다른 존재들을 알아보며 우정이라는 희미한 가능성을 만들어내기 시작했거든요. 《마녀가 되는 주문》의 아이들은 너무 멀어지지 않기로, 서로를 기억하기로 약속하며 서서히 어디론가 향해 갑니다. 그 끝에서 누구도 일러준 적 없는 희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죠. 지금 당장 현실에서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지라도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성장'이란 건 어쩌면, 타인에게 먼저 손 내미는 마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가운데에서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희망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고도 생각하게 되고요.
분투와 희생이 아이들의 몫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희망의 주문을 외는 존재 역시 아이들이라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또, 지금의 한국과 소설의 세계를 겹쳐 인식하게 되면서 우리가 지금 해야할 최선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만들죠. 어떠한 문제들은 단지 좋고 나쁜 것으로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기도 하고요. 재밌기도 하지만, 여러가지 철학적 고민들 역시 한데 담긴 소설 《마녀가 되는 주문》. 이 책을 읽고 우리의 현재를 성찰하며 아이들과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의 주문을 함께 속삭여봐도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