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들불레터에서는 〈몸들의 이야기〉를 담은 두 권의 책과 《자매의 책장》, 그리고 이 책에서 소개된 여러 도서들을 함께 소개하였습니다. 《자매의 책장》과 함께 소개한 도서들은 우리 일상 속 희미하게 반짝이는 순간들을 포착하며 절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희망으로 나아가는 소시민의 삶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지칠 일이 많은 요즘, 모두가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하는 작품입니다. 레터 하단에 《자매의 책장》 도서 증정 이벤트도 준비하였으니, 잊지 말고 참여해주세요! 그럼 오늘의 들불레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들불의 PICK
-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메건 오로크
-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김영옥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도서 증정 이벤트)
- 『자매의 책장』, 류승희
-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축복』, 켄트 하루프
- 『수전 손택의 말』, 수전 손택, 조너선 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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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레터는 78화에서 《우리가 살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을 소개한 바 있는데요. 이후 이 책을 비롯해 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세 권의 도서를 엮어 〈몸들의 이야기〉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세 권 모두 지금 꼭 필요한 이야기를 담았지만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중요성과 의미를 놓치기 쉬운 책이기도 합니다. 질병이나 노년의 삶 모두 지금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당장 나에게 닥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민을 미루게 되니까요. 오늘 들불레터는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문제들을 지금 여기로 데려오고자 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문제가 될 예정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지금 생각하지 않으면 다함께 공멸할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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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건 오로크 지음, 진영인 옮김
"아프면 외롭다. 누가 안쓰럽게 여겨 주고 알아주었으면 하는 어린애 같은 욕망이 생긴다. 그런데 바로 그 알아주는 일이 어렵다. 우리가 아픈 원인이 무엇인지, 증상이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면 고통을 어떻게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 증상이 늘 나타나지는 않는 질병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 p.79
팬데믹 상황이 지속되면서 코로나19 감염 후 여러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점차 늘어났습니다. 의료계는 보고된 사례들을 종합하여 브레인 포그, 두통, 숨이 차는 증상, 복통이나 설사, 생리주기 변동 등의 증상을 '롱 코비드'(Long Covid)의 증상으로 분류하고 이를 바이러스에 의해 유도된 자가면역질환이라고 분석했는데요. 이에 2023년 5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는 자가면역(Autoimmunity) 특별호를 발행하며 "전 세계 인구 약 5%가 80개 이상의 다양한 자가면역 질환을 겪고" 있고, "자가면역질환의 유전적 요인과 외부 요인, 면역체계가 어떻게 조절되는지 등은 과학자들이 밝혀내야 한다"고 밝히며 후속 연구의 중요성과 시급함을 언급했습니다. 이처럼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자가면역에 대한 이해는 전보다 깊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은 저자가 이름 붙일 수 없고, 원인도 알 수 없는 자가면역질환을 앓게 되면서 경험한 일들과 이로 인해 느낀 점들을 10년에 걸쳐 기록한 책입니다. 제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챕터는 1부의 4장 「내가 나인 척」이었어요. 저자는 알퐁스 도데의 《고통의 땅에서》를 인용하며 이 챕터를 시작합니다.
"통증은 언제나 당사자에게는 새로우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참신함이 없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통증에 익숙해질 것이다."
저자는 알퐁스 도데가 말했듯, 이름 없는 만성질환은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기 때문에 환자는 외로울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누구에게도 질병의 경험을 명확하게 털어놓기 어렵기 때문에 고통과 질병이 실재하고 있는 것인지 끝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고도 고백하죠. 이러한 의심이 두려움을 낳는 과정에 대해서도요.
저자의 경우, 극심한 피로로 심신이 쇠약해지는 상황을 의사나 주변인에게 제대로 전하기 어려웠다고 말하는데요. 저자가 살고 있는 뉴욕에서 '피로'는 누구에게나 흔한 일상이기 때문에, 피로를 호소하는 일은 그저 나약한 사람이라는 방증일 뿐인 것처럼 여겨지는 문제가 있었죠. 피로는 몸을 약하게 만드는 것뿐 아니라 의지나 정체성 등의 정신적 감각을 혼미하게 만든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온전한 자의식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피로의 가장 나쁜 점으로 꼽기도 하죠. 이 때, 저자는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에세이인 《아픈 것에 관하여》를 인용합니다.
"영어로 햄릿의 생각과 리어의 비극을 표현할 수는 있어도, 오한과 두통을 표현할 수는 없다. (...) 일개 여학생이라도 사랑에 빠지면 셰익스피어와 키츠로 마음을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환자가 자신이 얼마나 아픈지 그 통증을 의사에게 전달하려 하면, 언어는 즉시 고갈되고 만다." (p.81에서 재인용)
최근 제 주변에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이른바 '병원 투어'를 다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명확한 진단명을 알려주지 않아 허탈함만 가득 안고 귀가하기 일쑤라고 합니다. 그들이 자주 듣는 병명은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자가면역질환'이지만, 치료가 가능한 것인지, 평생 끌어안고 살아가야한다면 어떻게 관리해야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어 막막한 상황에 놓이기도 하고요.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의 저자 메건 오로크는 이후 새로운 진단과 치료를 받게 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말끔한 치유 없이 질병과 함께 살아갑니다. 질병과 함께 하는 삶 속에서 오로크는 "의료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병을 앓는 운 나쁜 환자들"을 자주 생각해요. 그들이 호소하는 고통의 말들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상황을 비통해하면서 말이죠.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경청하는 일이라고 말이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격려하기보다 목적지가 없는 질병의 서사 속에서 누군가가 길을 잃지 않도록 그저 경청해주길, 그들의 불확실성을 이해하고 우리 모두가 상호연결되어있음을 자각하며 그 누구도 '섬'인 채로 내버려두지 않길 당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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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지음
"지금은 늙어감의 다른 길을 상상하고 실제로 구현하는 모험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다른 생애 단계에 비해 사회와 국가의 인정과 지지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노년기에 주어진 제약과 상투적 해석, 빈곤의 두려움과 돌봄 의존의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을 향한 집단적 모험이 필요하다. 이 집단적 모험은 어느 때보다 실험적이고 급진적이어야 한다." - p.235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돌봄과 인권》,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을 쓴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공동대표 김영옥의 인터뷰집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열한 사람을 만나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이 책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저자는 '노인'이라는 말에 달라 붙어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걷어내고, '노인', '늙음', '나이듦'이 아닌 '늙어감'이라는 단어를 통해 우리가 도달할 목적지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늙어감을 제시하며 다른 몸들과의 공존을 통한 새로운 연대를 함께 고민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장애', '노년', '홈리스', '트랜스젠더' 등의 단어들을 이해하는 인터뷰이들의 방식입니다. '최최최중증 장애인'인 조미경은 나이가 들수록 심화하는 장애를 '진화'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홈리스행동 활동가인 이동현과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김윤영은 '홈리스 상태'를 "노령기를 훨씬 더 젊을 때 맞이한 상태"라고 설명하기도 해요. 또, 생애구술사 작가인 최현숙은 "늙음 자체가 일종의 계층 하락을 의미할 정도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 시기에 "엉망진창이고 울퉁불퉁한 빈곤 바닥"을 자기가 머물 자리로 택하며 투쟁하는 노년의 삶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늙어가는 일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적응과 성장을 요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가진 노년에 대한 상투적인 의식을 뒤집는 것으로, 퇴화나 멈춤 등의 단어와 매칭하여 사용되던 '노년'의 이미지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노년을 인생의 결론이 아닌 과정으로서 이해한다면, 우리에게도 '늙어감'은 지금 당장의 상태가 되는데요. 여러분은 지금, 늙어감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아직 고민해본 적이 없다면, 지금 바로 이 책을 읽어보세요. 늙음을 막연하게 먼 이야기로 생각해 온 우리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지침서 역할을 해 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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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들의 이야기〉 북클럽
《우리가 살에 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은 마감되었지만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은 극소수의 자리가 남아 있어요. 오늘 들불레터의 책 소개를 읽고 관심이 생기신 분들은 이번 북클럽을 놓치지 마세요!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 8/24(목) 오후 7시 30분 온라인 진행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 8/31(목) 오후 7시 30분 온라인 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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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자매의 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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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의 책장』, 류승희 만화 (보리)
《자매의 책장》은 '2013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한 류승희 작가의 만화로 아버지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이후 네 계절이 지나는 동안 아버지에 대해 규명할 수 없었던 감정들을 맞닥뜨리며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는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고단한 하루하루와 지난 날의 괴로움을 달래주는 건 다름 아닌 책인데요. 언니 '우주'는 고된 회사 일과 엄마의 병에 괴로워하면서도 책을 읽는 것으로 매일을 위로하고, 동생인 '미주'는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는 동안 자라난 공허함을 안고 살아가지만 우주와 마찬가지로 책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습니다.
자매는 끝끝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서로의 삶 역시 희미하게 짐작할뿐 세세하게 읽어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둘이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건 그들을 연결하는 '책' 덕분입니다. 이들은 책을 통해 소통하고,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서로를 이해하며 그렇게 살아가죠.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우주와 미주가 각 계절마다 읽었던 책들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자매의 책장에 꽂힌 책들은 어딘가 자매의 삶을 닮아 있는데요. 오늘 소개할 작품들과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닮아 있는지 생각해보고, 자매가 책을 읽으며 위로를 얻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 안에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고민해봐도 좋겠습니다.
* 참고 : 아래 본문에 삽입된 이미지는 《자매의 책장》에서 계절의 변화를 나타낸 그림들로 만든 책갈피예요. 《자매의 책장》을 구입하시면 받아보실 수 있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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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미주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의 어느 날, "쌀쌀하니까 다시 읽고 싶어졌다"며 《대성당》을 펼칩니다. 이 책은 우주가 여러 차례 공무원 시험에 낙방할 무렵 미주가 선물한 책입니다. 이 책의 앞표지 뒷 장에는 미주가 적어둔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어요. ('언니에게 - 별 거 아니지만 도움이 되길') 이 메시지를 읽은 우리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대성당》은 리얼리즘의 대가로 불리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입니다. 단편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미국의 평범한 소시민들이에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길을 잃은 것처럼 묘하게 어긋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조금 불편하고 괴롭기도 하죠. 하지만 카버는 괴롭고 절망적인 순간에 사람들을 멈춰 세우지 않습니다. 카버의 글이 좋은 점은 절망을 맞닥뜨린 등장인물을 희망으로 이끄는 방식에 있어요. 카버는 가장 절망적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에 새로운 희망이 찾아올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네 삶에 필요한 하나의 의식, 희망을 위한 "일종의 영성체 의식"을 치르도록 만듭니다.
《대성당》에 수록된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8살 생일을 맞는 아들 스코티와 하워드, 앤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티는 아침 등굣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며칠이 지나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 때, 아이의 죽음으로 정신이 없던 부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오는데요. 바로 스코티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주기로 한 빵집 주인입니다. 부부는 빵집에 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아이가 죽었다고 이야기해요. 사정을 모르던 빵집 주인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척 미안해하며 그들에게 롤빵을 줍니다. 그러면서 말하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고요.
《자매의 책장》의 자매가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맞게 된 봄은 여전히 춥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미소 지을 수 있는 건, 좋아하던 책을 들춰보는 일이나 선물처럼 남겨진 조카의 그림을 간직하는 일처럼 별것 아닌 것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 롤빵을 건네 주는 빵집 주인의 존재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는 한 자매의 봄은 계속 춥지만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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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듯하지만
틀림없이 뭔가가 달라졌다.
아무것도 이동한 게 없는 듯하지만
틀림없이 뭔가가 움직였다.
어둠이 찾아와도 이제는 아무도 불을 밝히지 않는다.
- 「빈 아파트의 고양이」
미주는 남편, 아이와 함께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일상을 보냅니다. 그러다 문득, 일상의 미세한 변화들 속에서 내면의 희미한 균열을 발견합니다. 남편이 아무렇게나 벗어둔 슬리퍼를 보면서 지친 얼굴을 하게 될 때나 아이와 남편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뒷모습만을 지켜볼 뿐이었던 지난 날을 떠올릴 때에 말이죠. 이 때 미주는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을 읽습니다.
《끝과 시작》에 수록된 시 「빈 아파트의 고양이」는 존재했지만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고양이는 어느 날 가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규칙을 위반하고 어지럽혀도 익숙한 발자국 소리를 내는 누군가가 나타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여느 때처럼 비슷한 시각에 무언가가 시작되어야하는데, 그 공간에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자매의 책장》의 미주 역시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문득 공허함을 느낍니다. 공허함의 근원에는 그간 미주가 놓치고 있던 무언가가 있습니다. 장소도, 사람도 그대로지만 조용히 일어나고 있던 일상과 마음의 균열들. 미주는 서서히 벌어지고 있는 균열의 자리를 조금씩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라짐'으로 인해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가만히, 고요한 눈길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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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우주는 엄마의 폐 질환 검사를 위해 찾은 병원에서 엄마의 병처럼 되돌릴 수 없는 빗줄기를 바라봅니다. 끝없이 하강할 뿐인 빗줄기는 왠지 우주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듭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우주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펼치고, 올리브가 기쁨에 대해 언급한 페이지를 읽습니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미국의 작은 마을인 크로스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연작소설입니다. 올리브는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 멀리서 바라보면 매끈해보이는 삶에 돋아난 요철들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죠. 스트라우트는 올리브의 시선을 통해 "일상적인 매일의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존중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 "우리 대부분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실패하고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죠. 이처럼 《올리브 키터리지》는 인생의 고단함을 담아내는 한편, 그렇게 연약하고 어두운 삶에도 희망은 있다고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우주의 삶은 성큼 다가오고 있는 엄마의 죽음을 실감하면서 우산 없이 장마철 빗줄기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어쩔 도리 없이 축축하게 젖어가는 것처럼만 보입니다. 엄마가 오랜 세월 주방에서 일하면서 서서히 몸과 마음의 병을 키워온 것처럼요. 어둠 속에서 우주는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떠올리다 슬픈 표정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엄마의 방으로 가 창문을 닫습니다. 빗줄기가 엄마와 우주의 삶을 적시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두고만 있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단호한 손길로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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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상점 앞에서 내가 울었던 것 말이오. 내가 보고 있던 것은 바로 내 인생이었소. 어느 여름날 아침의 사소한 거래,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 그냥 그뿐이었소. 그런데 그게 전혀 쓸모없는 일이 아니었던 거요."
켄트 하루프는 짧지 않은 작가 인생 동안 단 여섯 편의 작품만을 쓴 작가입니다. 그는 모든 작품에서 가상의 마을 '홀트'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평범한 매일을 그렸는데요. 《축복》 역시 이 '홀트'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이 곳에서 철물점을 운영하는 77세의 대드 루이스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이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약 한 달 간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축복》은 그의 전작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대표작입니다. 어슐러 K. 르 귄은 이 작품에 "일상적 형태의 사랑 - 계속되는 좌절, 충실함에 드는 장기적인 노력, 매일의 애정이 주는 편안함 - 을 탐구하는 용기와 성취로는 내가 아는 그 어떤 동시대 소설도 하루프의 작품을 능가할 수 없다"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자매의 책장》에서 자매가 맞이하는 가을은 녹록치 않습니다. 그들이 맞는 가을은 서서히 말라가는 나뭇잎처럼, 지우개로 대충 지워 흔적만 겨우 남은 엄마의 뒷모습처럼 서늘하고 쓸쓸합니다. 30년 넘게 주방에서 일을 한 엄마의 폐 질환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직장에서 끓어오른 마음은 그토록 좋아하는 책 읽기로도 진정되지 않죠. 남편과 싸우고 아버지를 미워하던 지난 시절에 갇힌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그러다가도 일상 속 작은 발견으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하는데요. 미주는 우주의 책상 앞에서 책장을 한 칸 한 칸 채워나가며 기뻐했던 자매의 지난 날을 떠올립니다. 그 시절의 기억만이 유일한 위로인 것처럼 말이죠.
'축복'이라는 단어에는 으레 기쁨으로 충만한 나날, 반짝거리는 내일이 기다리는 삶과 같은 이미지가 따라 붙습니다. 마치 세례를 받은 듯 행복으로 벅찬 나날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의 삶만이 축복 받은 삶인 것처럼 여겨지죠. 하지만 축복이란 어쩌면 일상 속 순간순간에 잔잔히 스며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조그맣게 빛내고 있을지도요. 미주가 우주의 책상 앞에서 언니의 작은 우주를 발견하고 피식 웃게 되는 것처럼, 켄트 하루프 작품 속 인물들이 고되고 힘겨운 매일을 살다가도 문득 발견하곤 했던 일상 속 작은 기쁨들처럼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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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 『수전 손택의 말』, 수전 손택, 조너선 콧
"세계는 기본적으로 허위로 가득 차 있고, 진실은 언제나 허위를 '거부'할 때 빚어지는 것이죠. 진실은 어떤 면에서 몹시 공허하지만, 이미 허위를 모두 떨쳐낸 환상적인 해방이에요."
"저는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들과 있으면 즉각적으로 제가 딱 어린아이 같다고 해명하려 들어요. 그런 강박을 느끼는 이유는 제가 그들과 동물적인 관계를 원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굳이 말을 계속하고 싶지가 않은 거죠. 이건 거창한 형이상학적인 관념 같은 게 절대 아니지만, 전 사람들 간에는 오로지 침묵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해요."
미주는 끝까지 읽지 못했던 아버지의 편지를 펼칩니다. 그리고 편지 어디에도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죠. 비슷한 안부로 시작해서 비슷한 당부로 끝나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아버지의 편지 속에서 미주는 영원히 읽지 못할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수전 손택의 말》의 문장을 옮겨 적는 우주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우주는 "전 사람들 간에는 오로지 침묵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옮겨 적습니다.
《수전 손택의 말》은 파리와 뉴욕에서 진행된 수전 손택의 인터뷰를 담은 책입니다. 총 12시간에 걸쳐 진행된 이 인터뷰는 〈롤링스톤〉의 창립 공신이자 에디터인 조너선 콧과 진행된 것으로, 1979년 10월 발행된 〈롤링스톤〉에 3분의 1 정도가 공개되었다고 하는데요. 이후 인터뷰의 전문을 담은 것은 이 책이 최초라고 해요. 이 인터뷰에서 수전 손택은 삶과 철학, 사랑에 대해 군더더기 없고 꾸밈 없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주가 그랬던 것처럼,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문장을 필사했었어요. 아마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문장을 마음에 새겼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오래 곱씹을 만한 말이 여러 번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우주가 옮겨 적은 손택의 말은 아버지와 자매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였을 거예요. 불가해한 존재, 끝끝내 읽을 수 없는 존재가 남기는 것은 허망함이나 쓸쓸함이 아니라 또 다른 이해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주에게 전하고픈 우주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이죠. 미주는 마치 손택의 말을 듣기라도 한듯 또 다른 봄을 맞이하며 "빈칸은 빈칸인 채 남겨두기로" 결심합니다. 이 때 미주는 조금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요? 독자 역시 마음의 결정을 내린 미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매의 내일을 그저 빈칸인 채로 남겨둘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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