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들불레터는 여름이 가기 전 읽으면 좋은 '휴가', '여행' 관련 책들을 준비해봤습니다. 또, 전혜진 작가의 신간 《규방의 미친 여자들》을 소개하며 이와 함께 읽으면 좋은 작품들을 준비해봤어요. 《규방의 미친 여자들》은 고전 다시 읽기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흠뻑 빠져 읽을 수 있을만한 작품이니, 궁금하신 분들은 레터 하단의 '도서 증정 이벤트' 당첨 기회를 노려보시길 바랍니다! 💝
▪️ 들불의 PICK!
- 『바캉스 소설』, 김사과
-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 양재화
- 『여행의 장면』, 고수리, 김신지 외
- 『밤의 여행자들』, 윤고은
-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제니 오델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도서 증정 이벤트)
- 『규방의 미친 여자들』, 전혜진
-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지프 캠벨
-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 모린 머독
-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김혜순
- 『왕관 없는 여왕』, 김라무
-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 법』, 성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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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과 지음 (문학동네)
"저는 자유롭고 싶다니까요. 그게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그걸 원한다고요. 그게 특별하든 사치스럽든 불가능하든 어렵든 모르겠고 나는 그게 좋다구요."
제가 읽은 김사과 작가의 첫 책은 《천국에서》였습니다. 이 책은 뉴욕에서 힙스터 문화를 경험하게 된 '케이'가 한국으로 돌아온 후 주변 인물들에 환멸을 느끼고, 평범함을 경멸하며 힙스터 취향을 통해 자신을 포장하는 한편 그 안에 숨겨진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요. 저는 '케이'의 모습에서 제 일부를, 또 한국 사회의 단면을 목격하곤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경험을 했었어요. 또, 김사과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상대를 향한 경멸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암담한 현실을 비추곤 했는데, 그런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 저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고요.
그렇게 제게 카타르시스를 안겼던 소설가 김사과가 이번에는 《바캉스 소설》이라는, 왠지 산뜻한 제목으로 돌아왔는데요. 제목은 '바캉스'지만 내용은 '담력 훈련'에 가까운 이 책은 저자 특유의 신랄함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세계적 기업에서 일하던 주인공 '이로아'가 주식을 통해 100억이 넘는 돈을 벌어 경제적 자유를 이룬 후 제주도로 긴 휴가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곳에서 이로아는 몇 명의 인물과 가까워지는데요. 밤잠을 설친 어느 날 느닷없이 만나게 된 유령으로 인해 이들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고, 유령의 실체를 파헤치던 중 이들이 숨기고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역시 귀신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돈'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배금주의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갖게 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휴가를 떠나는 일은 자본에 의해 작동하는 산업에 완벽히 스며드는 것으로 그간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일이 되어버렸는데요. 과연 이로아는 100억이 넘는 돈으로 행복해졌을까요? 자본은 정말로 우리에게 행복만을 약속할까요? 해답이 궁금하신 분들은 지금 바로 김사과의 책을 읽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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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화 지음 (어떤책)
"그제야 내가 지금까지 해 온 다크투어는 기실 잊힌 이름들을 부르고 잊힌 얼굴들을 마주 보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익명과 숫자와 망각에 맞서 그 뒤로 사라져 가는 수많은 개인들을 기억하기 위한 일이었음을 나는 깨달았다."
'투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여행사들이 내세우는 각종 패키지 상품들입니다. 패키지 투어는 나라별로 특별하게 진행되는 이벤트에 맞춰 기획되거나 시기별 테마에 맞춰 반복적으로 올라오는 상품들로 낯선 곳에서의 여행이 버거운 분들에게 추천하는 여행의 방식인데요. 그렇다면 '다크투어'는 무엇일까요? 이 여행은 누구에게 추천하면 좋은 여행의 방식일까요?
양재화 작가의 책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에 따르면, 다크투어(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는 넓게는 "인간사의 '어두운' 측면, 곧 죽음과 비극에 관련된 역사적 장소를 여행하는 모든 형태"를, 좁게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쟁이나 학살 현장 또는 대규모 재난이 일어났던 장소를 찾아 그 사건을 기리며 교훈을 되새기는 여행"을 의미합니다. 대표적인 다크투어리즘 목적지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9.11 테러 현장이 있어요.
저자는 제노사이드 현장을 둘러보는 다크투어를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억압에 분노하며 그 이후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자의 여행 기록을 따라가다보면, 다크투어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외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현재에 반영함으로써 공동체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나름의 의식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기억상실이 절망을 빚어낸다고 말했던 리베카 솔닛의 이야기처럼 어쩌면 우리에게 희망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긴 터널을 통과하는 중인 것처럼 막막하게 느껴지는 요즘, '기억'을 통해 또 다른 행진을 시작하길 원하는 분들께 이 책과 함께 다크투어를 떠날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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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크투어, 내 여행의 이름》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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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리, 김신지 외 (유유히)
《여행의 장면》에 수록된 이다혜 작가의 「사라진 감각과 선호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다른 도시를 찾을 때마다 동물원에 가던 자신의 선호를 고백합니다. 이어 저자는 "우리 안에 갇혀서 사육당하는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여행을 다니면서도 우리에 갇힌 존재를 바라보던 기존의 선호가 사라진 자리에 "다른 존재를 착취하는 방식"의 여행을 멀리하는 새로운 선호가 생겨났다고 말하는데요.
사람들은 여행의 이유를 시야의 확장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렇게 확장된 시야 안에는 새로운 공간이나 언어뿐 아니라 비인간동물과 식물도 포함될 수 있을 테죠. 어쩌면 앞서 이야기했던 세계의 평화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날 지도 모르고요. 그렇게 나의 세계를 넓혀가는 일, 이로써 "세계의 안녕과 나의 안녕"을 바라는 일.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여행의 소중한 장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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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지음 (민음사)
주인공 '고요나'는 여행사 '정글'의 수석 프로그래머로, 재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지역을 관광하는 '재난 여행' 상품을 판매하는 일을 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던 중 요나는 사막의 싱크홀 '무'에 고립되면서 예기치 않은 일에 휘말리게 되는데요. "재난의 이미지가 상품이 되는" 세상을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상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세계인 동시에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모종의 사건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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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오델 지음, 김하현 옮김 (필로우)
이 책을 읽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탐독’을 하게 되는 우스운 아이러니에 빠집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러한 아이러니에 대한 호기심 말고도 이 책을 손에 들게 한 이유가 있었는데요. 요즘 들어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산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이 늘 함께했고, 제가 가진 시간과 집중력은 곧 생산성의 재료이기에 동시에 여러 가지에 관심을 쏟아야 했죠. 이런 태도를 누군가는 ‘노력’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무엇을 위한 노력인지 모호했습니다. 오히려 생산성에 대한 집착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생산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가 큰 질문으로 다가왔습니다.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라는 권유에 독자들이 위안을 얻길 바라지만, 주말의 조용한 휴식이나 창의성에 관한 이야기로 기결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내가 말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요점은 상쾌한 기분으로 일터에 복귀하거나 더욱 생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생산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회적 관점에서든 생태학적 관점에서든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의 초점을 관심경제에서 거두어 공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 옮겨 심는 것이다. (p. 15)
이 책은 쉼 없이 많은 곳에 관심을 빼앗기고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는 무심해지게 되는 우리의 현실에 주목합니다. 때문에 ‘관심경제’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관심이라는 자원을 착취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데에 주력합니다. 그리고 ‘관심경제’에 빼앗긴 관심과 현실에 대한 감각을 되찾을 방법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더 생산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휴식하기’나, ‘속세로부터 탈출하기’가 이 책이 제안하는 바는 아닙니다. 저자는 관심을 착취하는 ‘관심경제’의 시스템 안에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즉 거부하는 것 자체로 저항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짚어냅니다.
관심경제는 우리를 끔찍한 현재에 붙들어 놓는 데서 이윤을 얻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의 물리적 현실에 관심을 기울일 기회를 박탈당하는 동시에 역사적 맥락을 보지 못하게 될 위험에 처한다. (...) 장소감을 기르는 것은 관심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관심을 필요로 한다. 즉 서로를 돌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싶다면 장소를 돌보는 방법 또한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p. 278, 299)
또한 물리적인 현실에 대한 관심이자 장소에 대한 감각, 즉 장소감을 통해 맥락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 서로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일으킬 수 있다고 봅니다. 맥락 없이 끊임없이 관심을 빼앗아 가는 SNS의 팝업 메시지와는 달리, 현실의 장소에는 ‘나’와 관련된 경험이 녹아있고 과거-현재-미래라는 맥락을 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듯, 생산성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관심의 방향을 바꾸거나 물리적인 장소를 감각하는 것을 시도함으로써 저항을 실천하고 삶을 향유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무력감에 빠지거나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닌, 의식적 노력을 통해 삶의 감각을 회복하도록 방향을 틀어준다는 점에서 읽어볼만한 책이었습니다. 생산성을 추구하는 가운데에, 그 목적이 무엇인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윤선 읽고 씀
🔍 윤선 : 여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 만나고, '우리'와 맞닿는 지점을 찾아 들불레터에 소개합니다. 미술계에서 주로 활동하며 책을 만들고 미술에 대한 글을 씁니다. 아트북 <[ o o o ]>을 제작하고, 《교-차-점 交叉點》을 공동 기획했습니다. (https://brunch.co.kr/@yunsun-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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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규방의 미친 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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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방의 미친 여자들』, 전혜진 (한겨레출판)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쓴 길버트와 구바는 순종적인 아내, 어머니, 집 안의 천사, 착한 독신 이모 등 인습적 역할을 요구 받았던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삶과 문학을 그들이 만들어 낸 '미친 여자' 캐릭터를 통해 조명합니다. 이들이 만든 인물은 억압적 구조에 갇혀 자아분열을 일으키며 광기에 사로잡히는데요. 이러한 광기는 때로 작가 자신이 타락했음을 보여주는 캐릭터('프랑켄슈타인')로 나타나기도, 또 (물리적인 공간이든 사회구조적인 억압이든) 자신의 감금된 상태를 은유하는 캐릭터('버사 메이슨')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를 탐색하며 19세기 영미 문학의 역사를 여성 작가를 중심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라면, 오늘 소개할 《규방의 미친 여자들》은 담장 안에 갇혀서도 자신을 제약하는 것에 맞서고 뜻을 펼치고자 했던 우리 신화와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을 재조명하는 작품입니다.
《규방의 미친 여자들》은 학창시절, 문학 교과서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고전뿐 아니라 생소한 작품들까지도 꼼꼼하게 다루는 책이에요. '고전'이라고 하면, 중후한 분위기에 다소 딱딱함마저 느껴지는 옛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고전이 이렇게 재밌는 거였다니!"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작가가 덧붙인 현대적 관점과 해석이 그만큼 재미있거든요.
전혜진 작가의 전작 《여성, 귀신이 되다》가 옛이야기 속 여성귀신의 삶을 지금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그들의 억울함과 원혼을 현대에 전하는 데 일조했다면, 《규방의 미친 여자들》은 고전 소설의 낯섦을 해소하며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한편, 고전 속 여성 영웅들의 계보를 현재까지 잇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들불레터에서는 작가의 작업으로부터 출발해 또 다른 작가의 글과 작업으로 이어지는 계보 잇기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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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대왕은 바리공주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바리의 일곱 아들들을 후사로 삼겠다 말하지만 바리는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저승에 다녀오는 동안 가엾고 불쌍한 오갈 데 없는 혼들을,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저는 만신의 왕이 되어 그 불쌍한 혼들을 인도하는 신이 되려고 합니다."
그렇게 바리는 무조신이 되어 언월도와 삼지창, 방울과 부채를 들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인도하게 되었다.
- p.37, 「바리, '여성 잔혹사'를 전복하다 : 〈바리데기〉」 중
'바리'는 불라국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일곱째 아이로, 딸이라는 이유로 바다에 버려진 인물입니다. 이후 오구대왕은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는데, 이 때 길대부인은 바리를 바다에 띄울 때 사용했던 옥함이 서쪽 바닷가에 놓여 있는 꿈을 꿉니다. 그 즉시 바리를 찾은 길대부인은 바리에게 오구대왕을 살리기 위해서는 저승 동대산에 다녀와야 한다고 말하고, 이에 바리는 남자 옷을 입고 저승으로 향합니다. 이 과정에서 바리는 한 할머니를 도와주게 되는데요. 할머니는 자신이 바리를 시험하러 나온 천태산 마고할미라고 밝히며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쓸 수 있는 삼색 꽃이 핀 가지와 금방울을 건넵니다. 바리는 이후 마고할미가 알려준 대로 앞으로 나아가고, 동대산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장승과 혼인하여 일곱 아들을 낳는 등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오구대왕을 살리는 데 성공한 바리는 감복한 오구대왕에게서 나라를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지만 사양하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인도하는 만신의 왕이 되겠다 말합니다.
바리데기는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림 받고, 그럼에도 자신을 키워준 양부모를 떠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고난의 여정을 떠나는 인물입니다. 바리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인 이 여정을 저자는 '영웅의 여정' 관점으로 따라가 보는데요. 이 때, 함께 읽으면 좋은 작품이 바로 조지프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모린 머독의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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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민음사)
이 책은 미국의 신화종교학자이자 비교신화학자인 조지프 캠벨의 대표작으로, 신화의 토대가 되는 영웅의 원형을 분석한 작품입니다. 캠벨은 영웅의 모습이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웅이 어려움을 겪고, 조력자를 통해 도움을 받고, 임무를 수행한 뒤 돌아오는 여정에서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이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거죠.
《규방의 미친 여자들》의 저자는 신이 된 여성 영웅 바리데기의 모험을 캠벨의 영웅 원형, 즉 '출발 - 입문 - 귀환'의 여정을 통해 분석합니다(p.47). 그러면서 캠벨의 영웅 원형 속 '궁극의 은혜'가 바리에게는 자신이 긷던 물, 베어오던 풀, 뒷동산 후원의 꽃처럼 일상 속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을 짚어내며, "삶의 본질은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지혜를 담고 있다고 말하죠. 이러한 깨달음은 삶의 평범성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 의식하지 못한 채 마주했던 순간들이 끝내 내게 귀한 깨달음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요.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역시 옛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시도합니다. 비록 지금 우리는 고난과 역경에 힘들어하고 있지만, 마치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적절한 때 삶의 중심으로 돌진하며 문제를 뛰어 넘는 것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이러한 본질이 영웅의 삶에 반영되어 있다고 말하고요. 즉, 영웅의 뛰어나고 특별한 여정의 중심에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삶의 평범성이 있고, 다만 그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뛰어넘느냐 말 것이냐가 과제로 남아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규방의 미친 여자들》 속 여성 영웅들의 삶에는 삶의 본질과 이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녹아 들어있는지 생각해볼만합니다. 그들이 헤쳐나가야 했던 가부장제의 평범한 차별의 상황들, 그럼에도 비범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앞으로 나아갔던 여성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차별과 억압이 여전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무엇을 느끼고 배울 수 있을까요? 궁금하신 분들은 《규방의 미친 여자들》과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함께 읽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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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린 머독 지음, 고연수 옮김 (교양인)
이 책은 《여성 영웅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도서의 개정판으로, 신화 속 여성 인물들의 여정을 심리학에 기반하여 분석한 작품입니다. 조지프 캠벨의 작품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 남성 영웅의 여정을 중심으로 영웅 서사를 그려냈다면, 이 책은 여성 영웅의 원형을 찾아내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모린 머독은 왜 여성 영웅의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지에 관해 의문을 갖고 조지프 캠벨을 찾아가는데요. 모린 머독의 질문을 받은 조지프 캠벨은 이렇게 답합니다. "모든 신화에서 여성은 전통적으로 '거기', 그 자리에 있습니다. 여성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사람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곳이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에 저자는 또 다시 의문을 갖게 되죠. "왜 여성들은 집에서 영웅을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하고요. 그리하여 시작된 작품이 바로 《내 안의 여신을 찾아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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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지프 캠벨이 분석했던 '영웅의 원형적 여정'과는 다른 여성 영웅의 여정을 제시합니다. 조지프 캠벨의 영웅의 여정은 총 17단계로 모험에의 소명으로부터 출발하여 시련의 길을 지나 귀환 후 삶의 자유를 얻는 단계를 취하고 있습니다. 한편, 모린 머독이 제시한 여성 영웅의 여정은 '여성성 분리'로 시작해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으로 끝을 맺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죠. 캠벨의 여정이 '기승전결'의 구조와 유사한 단계를 거친다면, 여성영웅의 여정은 일생 동안 발달, 성장, 배움이 순환한다는 점이 주목할만 합니다.
전혜진 작가는 《규방의 미친 여자들》에서 바리데기 이야기를 캠벨의 영웅 여정에 접목시켜 이해합니다. 캠벨이 영웅이 거치는 '통과의례'를 주요하게 분석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이 동경하는 이상적 삶을 살아가는 영웅의 모습에 주목한 것처럼, 우리 옛이야기 속의 여성 주인공들 또한 규방 바깥에서 공적 영역을 담당하고 모험을 주도했던 존재로서 당대 여성들의 동경을 받아 마땅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캠벨의 영웅 구조에 의한 분석이 유효하게 작동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한편으로, 모린 머독이 '하강'이나 '상승'과 같은 여성 인물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무의식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적 메커니즘을 분명하게 짚어냈다는 점에서 바리데기 이야기에도 한 번쯤 적용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규방의 미친 여자들》을 읽으며 캠벨의 영웅 원형으로 바리데기 이야기를 읽고, 모린 머독이 만든 여성영웅의 여정으로 또 한 번 읽어보는 걸 추천드리고 싶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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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지음 (문학동네)
우리나라 신화 속의 여성들, 이를테면 유화부인이라든가, 낙랑공주라든가 하는 인물들은 그 시대의 법을 위반함으로써만 그 이름을 기록에 남길 수 있었다. 그들에겐 그 시대의 법에 대한 위반이 그들의 이름을 시간 속에 새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법의 세계 안으로 자신의 아들을, 혹은 자신의 몸을 의탁함으로써, 아니면 문자 기록자의 손에 걸려듦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리데기만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만의 구술세계 안에 몸을 감추고, 늘 연희현장에서 변화를 맞는 텍스트 안에 몸을 내줌으로써 심층적으로 얽힌 텍스트 안에 오히려 자신의 몸을 면면히 둘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바리데기' 속에서 다른 신화 텍스트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비가시적인 세계 안에서 가시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위치를 새롭게 차지한 한 여성시인의 화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p.5-6 「여성이 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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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소개한 두 작품이 '영웅의 여정'을 분석하는 훌륭한 도구였다면, 김혜순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은 우리 옛이야기 속의 여성들이 그 시대의 규율을 위반함으로써 후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와 대비되는 존재로 '바리데기'를 언급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바리데기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만신의 왕이라는 것에서 착안, 현대에 이르러 연희자(말과 동작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사람으로, 탈춤, 풍물, 무속 등 전문 예인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됩니다.)로서의 '바리데기'가 삶과 죽음을 뒤섞어 놓는 과정 속에 놓인 여성시인과 유사한 위치에 놓인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저자는 바리데기 연희자가 경험하는 '들림' (혹은 '들리어짐')을 여성시인 또한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한 여성을 들리게 하는 혼령은 연희자에 의해 명명되는 존재로, 명명의 순간 타자에게 스며들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는데요. 이 때 연희자는 죽음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혼령과 그가 겪는 고통을 명명할 수 있는 '바리데기'의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죽음으로의 들림이 여성시인이 경험하는 '여성성으로의 들림'과 유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여성시인의 삶 역시 들림의 고통을 몸으로 체현하는 과정이며 그렇게 죽음 속에서 건져올려진 기록이 '시'라는 것이죠.
바리데기는 줄곧 문학 혹은 문학을 하는 사람을 설명하는 모티프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앞서 소개한 김혜순은 자신을 바리데기와 동일시하며 시인으로서의 위치에 대해 설명했고, 테레사 학경 차는 자신의 작품 『딕테』에서 바리데기를 받아 쓰며 페르세포네(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여신)와 데메테르, 차학경 본인까지 아우르는 존재로서 바리데기를 조명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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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뇌양현의 조계촌에는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음에도, 가난한 살림에 시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고 3년상까지 치른 효부 막씨가 있었다. 옥황상제는 막씨의 절개와 효를 칭찬하며, "열여섯 해 뒤에 얼굴을 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남해 용왕의 막내딸을 자식으로 점지해주었는데, 그렇게 태어난 딸은 사람이 아닌 커다란 금방울이었다. (...)
- p.230 「당나귀 가죽을 벗는 여성들」 중
- 다시 태어난 소녀의 인생 2회차 모험 : 《금방울전》
동해 용왕의 셋째 아들과 남해 용왕의 막내딸은 혼인하고 귀가하던 중, 요괴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이를 가엾게 여긴 하늘의 은혜로 남해 용왕의 막내딸은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되고, 동해 용왕의 셋째 아들 역시 전생의 인연을 다시 이을 수 있도록 장원의 아들 해룡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한편, 뇌양현의 조계촌이라는 곳에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부 막씨가 살고 있었는데요. 옥황상제는 막씨의 절개를 칭찬하며 그에게 남해 용왕의 막내딸을 점지해주는데 이렇게 태어난 딸이 바로 커다란 금방울이었습니다. 금방울은 타고난 신통력으로 막씨에게 효를 다합니다. 또, 우연한 사건으로 해룡을 잃은 장원의 부인에게 약초를 가져다주어 부인이 기력을 회복하게 되죠. 이후 해룡이 살아있음을 알게 된 금방울은 해룡을 찾아 그를 구해주고, 끝내 해룡이 영웅이 될 수 있도록 조력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해룡은 황제의 외동딸인 금선공주와 혼인하게 되고요.
옥황상제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열여섯살이 되던 해, 금방울은 금방울이었을 때의 기억을 잃은 채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 때의 이름은 금령낭자로, 이후 해룡과 재회하게 되는데요. 금선공주는 금방울이 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세 사람이 함께 부부가 되기를 원했고, 황후가 금령공주를 양녀로 삼아 공주에 봉하는 한편, 해룡과 혼인을 시켜 세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금방울은 기존의 삶(남해 용왕의 막내딸)을 열여섯에 잃고, 목숨을 잃은 나이가 되기까지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새로운 삶(금방울)을 살게 되는 인물입니다. 금방울은 회귀를 통해 규방에서 많은 걸 누리지 못했던 이전의 삶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모험을 떠납니다. 그러면서 남편인 해룡을 성장시키고, 자신의 입지도 확보하며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자리매김하죠.
저자는 《금방울전》을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여성향 웹소설의 하위 장르인 '회귀'의 키워드로 해석합니다. 흔히 '로맨스판타지'라고 불리는 웹소설에서 주인공은 회귀를 통해 과거의 결정들을 번복하며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갑니다. 웹소설의 주인공 역시 일종의 '신통력'을 발휘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1회차에서의 기억입니다. 그 때 습득한 지식으로 역경을 헤쳐나가며 기존의 삶에서 받지 못했던 사랑까지도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금방울전》을 로맨스판타지의 '회귀' 키워드로 분석한 전혜진 작가의 접근법에 감탄하며 로맨스판타지 웹소설·웹툰 매니아인 저 역시 몇 편의 작품을 함께 떠올렸는데요. 오늘은 그 중 두 편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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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전생에 역사학 교수인 60세의 주인공 '정귀남'이 사고를 당한 후 딸이 쓴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으로 깨어나면서 시작되는 웹툰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가진 역사적·미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판타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 벌어졌던 사건과 마주하는 인물 간의 관계에 적절히 대처합니다.
정귀남은 1회차의 인생에서 딸과의 관계에서 불화를 겪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2회차 인생에서는 더욱 당당하고 주체적인 면모를 보이고 주변의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는 등 독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주인공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금방울전》의 주인공인 금방울이 특유의 신통력으로 모두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날 수 있었던 것처럼, 정귀남 역시 '지식'이라는 무기를 활용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 《금방울전》과 유사한 지점이 많은 작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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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드물던 여성 기사였던 에스텔은 자신과 가장 가깝게 지냈던 기사 칼리드에게 죽임을 당한 후 루시펠라 아이딘의 몸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아이딘은 황태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호수에 몸을 던지는 등 수동적인 면모를 보이는 백작영애인데요. 에스텔은 아이딘의 몸으로 빙의한 뒤 '레이디'로서의 삶을 배워나가지만, 기존의 레이디들이 추구하는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인물입니다.
이 작품의 독특한 지점은 억압적인 환경에서 어렵게 자란 등장인물이 자유롭고 모험심이 강한 2회차의 삶을 살게 된다는 기존 웹소설들의 설정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원하던 기사의 삶을 살던 여자가 당대의 차별적인 규율을 따라야했던 레이디의 몸으로 태어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여성이 겪어야하는 차별적인 상황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이동을 제약하는 불편한 의복이나 여성으로서 해서는 안될/해야만 하는 언행에 대한 지적들이 그렇죠.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에스텔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다소 무모하다고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랑받는 주인공'으로서의 모습을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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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규방의 미친 여자들》과 함께 소개한 작품들은 전혜진 작가가 우리 고전을 해석하는 데 접목시켰던 관점을 설명하고, 고전 속 여성영웅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현대 작가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또, 옛이야기 속 여성 영웅의 삶이 현대에 이르러 어떠한 방식으로 스토리텔링되고 있는지 가장 최근의 경향(웹소설 - 로맨스판타지)을 통해 보여주었고요. 《규방의 미친 여자들》과 오늘 소개한 작품들을 함께 읽는다면,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고전을 현대의 관점에서 접근하는데 훨씬 용이할 거란 생각이 들어요. 또, 작품을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하는 좋은 경험이 될 것 같고요.
아울러 《규방의 미친 여자들》에는 오늘 소개한 《바리데기전》과 《금방울전》 이외에도 '정상가족'에 도전한 조선의 레즈비언들의 이야기를 담은 《방한림전》, 유리 천장을 부순 조선의 알파걸 이야기인 《홍계월전》 등 여러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으니 고전 다시 읽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서는 꼭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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