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들불레터에서는 들불이 최근 읽은 신간 두 권을 소개하고, 크리스틴 해나의 신작 장편소설 『사방에 부는 바람』을 리뷰하였습니다. 쌀쌀한 가을 바람과 잘 어울리는 세 권의 책과 함께 무탈한 가을 보내시길 바라며, 오늘의 레터 바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 들불의 PICK!
- 『후예들』, 심아진 지음
- 『목록』, 로라 베이츠 지음, 황가한 옮김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 『사방에 부는 바람』, 크리스틴 해나 지음, 박찬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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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헝가리, 터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세 여성의 신화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이야기 안에는 이들의 영혼을 중재하는 '혼어미'라는 화자가 등장한다는 점이 이 작품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지점인데요. “한때 우리의 어머니이고 누이이고 연인이며 스승이었”던 자, 그러나 지금은 우리 주변에 머무는 노인의 모습을 한 자로 등장하는 혼어미는 '영웅의 후예'인 세 여성의 삶을 조망하며 그들이 겪는 혼란과 그럼에도 계승되는 후예의 정신을 매개합니다.
귀연, 요세핀, 효령이라는 세 여성, 그리고 영웅의 후예들은 홀로인 자신을 추스르며 쉽지 않은 삶을 부지런히 일궈 온 인물들입니다. 각기 다른 문화적,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들의 처지는 여전히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지켜내고자 분투합니다. 이 책의 매력은 시간이 교차되며 이들의 삶을 따라가는 재미뿐 아니라, 한국과 헝가리, 터키 세 나라의 뿌리와 역사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 훗날, 홀로여서 더 탄탄해진 사람들은 채 아물지 않은 상처를 쓰윽, 한번 문지르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피부가 갈라지고, 고름이 쏟아지고, 때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서도, 그렇게 많은 걸 잃고서도 여전히 남은 ‘혼자’를 추슬러 걸음을 옮겼다. 경계도 없고 한계도 없고 따라서 후회도 미련도 남지 않을,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의 자리를 향해서였다." (p.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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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로라 베이츠 지음, 황가한 옮김 (RHK)
2012년, 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성차별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던 장본인 로라 베이츠의 작품입니다. 사이트를 통해 세계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온 온갖 불평등 이야기들, 성차별적인 농담,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성희롱, 직장 내 차별, 성추행 등의 사건이 이 책에서 말하는 각자의 ‘목록’인데요. 《목록》은 여자로 살아가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기록한 목록인 동시에 그것이 개인의 일상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선언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이 개인의 문제라고, 사적이고 우연한 목록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말은 우리가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라는 뜻이었다" (p.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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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부는 바람』 크리스틴 해나 지음, 박찬원 옮김 (은행나무)
프랑스 사상가이자 노동운동가인 시몬 베유는 "나의 시련이 쓸모 있기에 사랑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나의 시련은 존재하기에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며 구원을 강조하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고난이야말로 신의 사랑의 표지이며 우리는 고통과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인간의 불행은 중력 법칙처럼 필연에 의해 구속 받으며, 이에 대한 예외로써 은총은 받아들이기 위한 빈 자리가 있는 곳에만 들어오는 빛이라고 이야기합니다(『중력과 은총』). 베유의 사상은 일견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유가 말한 '중력'이 나를 억압하고 (내가 원치 않는 걸) 강제하며 나를 어딘가에 '붙들리게' 만드는 일상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만이 은총의 빛을 들어서게 한다면, 그의 사상은 많은 영역에서 새롭게 적용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베유의 사상을 자주 떠올리게 만드는 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할 작품 『사방에 부는 바람』을 쓴 작가 크리스틴 해나입니다. 위대한 역사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작가의 전작, 『나이팅게일』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베유의 사상을 떠올렸다는 제 감상이 어떤 건지 아마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팅게일』은 2차 세계대전의 현장에서 전쟁의 공포와 비참함을 경험하며 생존을 위해 점차 강인해져갔던 여성의 이야기로, 극한의 상황 속에서 '생존'이라는 무거운 과업에 붙들린 인간이 한계를 딛고 '강인한 여성'으로서의 새로운 자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그립니다. 읽는 내내 괴롭지만, 그만큼 감동도 큰 작품인데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 여성이 (어떠한 계기로) 용기를 내고, 점차 강인해져가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기로 결심하는 서사는 크리스틴 해나가 즐겨 쓰는 스토리텔링 방식입니다. 종교적 구원 혹은 타자에 의한 위안을 구하기보다 고통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헤쳐나가길 택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는 어딘가 베유의 사상을 닮아 있습니다. 이렇듯 잔인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역사의 어느 한 시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은총의 빛을 향해 나아갔던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 온 크리스틴 해나가 이번에는 『사방에 부는 바람』을 통해 대공황기 텍사스를 배경으로 '엘사'라는 여성의 일대기를 다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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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역시 그의 전작들이 그랬듯 여성의 시선으로 역사를 좇으며 재해석합니다. 거시사의 타임라인을 그대로 따라가며 답습하지 않고,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되어 대문자 역사가 주요하게 다루지 않았던 미시사를 조명하며 개인적 상황이 시대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연결점을 정확히 짚어내는데요. 이 때문에 『사방에 부는 바람』은 당대의 여성인 '엘사'가 처했던 부당한 현실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엘사'는 어릴 적 앓았던 병으로 집에 갇혀 지내는 신세입니다. 스물다섯이 된 엘사는 '아직 안 팔린' 노처녀 취급을 받으며, 동정의 시선을 한 몸에 받습니다. 부모는 누구보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중시하는 인물들로, 너무 크고, 너무 마르고, 너무 창백하고, 아름다운 구석이 없는 엘사의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미래를 함께 고민해주는 대신, 그를 집안에 가둬 그저 존재할 뿐인 사람으로 만들죠. 엘사는 자신을 히스테리 환자 취급하는 아버지와 외모로 판단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지금은 떠나고 없는 할아버지 월터의 말을 떠올립니다. "죽는 건 걱정하지 마라. 엘사. 제대로 살지 않는 것을 걱정해라. 용감해져라."
그러던 어느 날, 엘사는 시칠리아에서 온 남성 '레이프'를 만납니다. 그와의 짧은 만남 이후 임신을 하게 된 엘사는 분노한 부모의 손에 이끌려 레이프의 집으로 향하게 되죠. 부모는 혼전임신을 한 엘사를 수치스러워하며, 그를 레이프의 집에 버려두고 떠납니다. 레이프의 부모는 레이프가 대학에 갈 채비를 하고 있던 중 찾아 온 엘사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엘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집과 땅을 돌보는 일을 가르칩니다.
레이프의 가족(마르티넬리 집안)은 고작 17달러만을 가지고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온 이주민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사히 정착하여 대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 '땅' 덕분이었다고 말합니다. 레이프의 아버지인 마르티넬리 씨는 이 때문에 땅에 대한 애정이 남다릅니다. 가족을 결속시키는 존재, 가족의 생존을 책임졌던 존재로서 땅은 각별할 수밖에 없죠. 엘사는 점차 이들이 땅에 대해 가지는 애정을 이해하며, 자신 역시 땅을 자신과 아이들의 역사를 이어주고, 결속시켜주며 조건 없이 받아들여주는 소속감의 토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집 안에 갇혀 있으면서 가족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겪어본 적 없는 엘사에게 이러한 소속감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땅'은 엘사에게 누구보다 각별한 존재로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수년간의 가뭄과 대공황으로 땅은 무릎을 꿇고 맙니다. 오래 이어진 빈곤과 가뭄은 가족을 망가뜨립니다. 특히 레이프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상실한 채 술만 퍼먹게 되죠. 엘사는 두 아이를 위해서 노력하지만, 레이프의 꺾인 마음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텍사스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뭄뿐 아니라 끔찍한 먼지 폭풍이 마을을 강타하면서 상황은 점차 악화되죠. 이로 인해 둘째 아이의 건강은 점차 나빠집니다.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른다는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고, 텅 빈 마을에는 검은 먼지만이 휘날릴 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사에게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 옵니다. 더 이상 텍사스에서 두 아이를 건사하며 살 수 없는 처지가 된 거죠. 끝내 이들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로 마음을 먹고, 긴 여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역시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이주민들은 '오키(대공황 때 오클라호마를 떠나온 사람들을 부르던 호칭)'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혐오의 대상이 됐고, 노동 착취를 당하지만, 극심한 빈곤으로 인해 부당함을 호소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죠. 낙인으로 인해 집도 구할 수 없고, 이주민들이 모여 지내는 캠프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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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Migrant Mother(1936), Dorothea Lan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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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겪는 수모를 묘사한 장면에서 미국 대공황기에 서부로 내몰린 이주 농업 노동자 가족의 참상을 담았던 사진작가 도로시아 랭Dorothea Lange의 유명한 작품, "Migrant Mother"가 떠오릅니다. 사진 속 지친 얼굴을 하고 있는 플로렌스 톰슨은 대공황기의 시련 속에서도 강렬한 의지가 돋보이는 얼굴을 한 채 고개를 파묻은 아이들을 묵묵히 지탱해주고 있죠. 엘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년 시절,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용감해져라'라는 말을 되새기며 아이들을 위해 고난을 끈기로 이겨냅니다. 이 과정에서 엘사는 땅이 자신을 받아들여주었던 것처럼, 캠프에서 동고동락한 이웃들을 돕고 받아들이며, 이주민을 멸시하는 캘리포니아 주민들에 맞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를 딸 로레이다에게 이어주죠.
"나의 시련은 존재하기에 사랑해야 한다"는 시몬 베유의 말에는 아직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엘사가 걸어온 역경의 길과 그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사랑의 힘은 시련이 사랑을 발견하도록 만드는 조건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땅이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키며 떠나온 사람을 맞아주고 받아들여줬던 것처럼, 엘사를 붙들어 온 시련 역시 아주 고약한 모습을 한 채 그가 용기를 내는 바로 그 순간, 사랑으로 변모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엘사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 속 고난의 현장에서 분투했던 여성들을 떠올립니다. 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생존을 위해 감수했던 고통과 처절하게 발휘했던 용기가 땅에 새겨져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그 기운이 제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만 같아요. 용기 있는 여성의 일대기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고, 감동을 느끼고 싶은 분들께 『사방에 부는 바람』을 적극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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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에 부는 바람』 북클럽
들불에서는 10월, 가을 바람과 함께 찾아 온 크리스틴 해나의 신작 장편소설, 『사방에 부는 바람』을 읽습니다. 시대적 상황과 개인의 삶이 얽히는 모습을 조명하고, 고난과 역경의 땅에서도 희망을 찾고자 분투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용기와 희망을 발견해 봅니다.
- 프로그램 진행일 : 10/29(일) 오후 8시
- 프로그램 방식 : 온라인 진행
- 참가비 : 20,000원 (정가 18,500원의 도서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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