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레터는 오늘부터 새로운 코너인 '들불 캐비닛'을 선보입니다. 들불 캐비닛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요 사건을 다루면서, 해당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도서와 기사를 소개하는 코너인데요. 오늘은 그 중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자신을 '남성 연대'라고 밝힌 20대 남성이 '숏컷'을 한 여성 아르바이트생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사건을 다루고, 이와 관련한 도서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에서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농성을 다룬 작품,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을 소개하고 이와 함께 읽으면 좋을 작품을 소개합니다.
▪️ 들불 캐비닛
- 『인셀 테러』, 로라 베이츠 (위즈덤하우스)
- 『다운 걸』, 케이트 맨 (글항아리)
-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 허민숙 외 (돌베개)
-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은행나무)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기선, 랑희, 슬기, 이호연, 타리, 희정, 전주희 글 치명타 그림 (한겨레출판)
- 『회사가 사라졌다』, 싸우는여자들기록팀 또록 (파시클)
- 『로지나 노, 지나』, 이란주 (우리학교)
|
|
|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페미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노골적인 여성혐오와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데요.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4일,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숏컷을 한 여성 아르바이트생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사건입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20대 남성은 아르바이트생에게 "페미니스트는 맞아도 된다"고 말한 후 폭행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피의자가 "머리가 짧으니 페미니스트가 분명하다. 나는 남성 우월주의자고 페미니스트들은 폭행을 당해 마땅하다."고 언급한 사실을 전하기도 했는데요. 아르바이트생과 폭행을 말리려던 50대의 편의점 이용객은 부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지만,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있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여성단체들을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은 폭행을 저지른 20대 남성에 대한 강력처벌을 촉구했습니다.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진행하고, SNS 상에서 #여성_숏컷_캠페인이라는 해쉬태그 운동을 벌이는 등의 운동으로 이어졌죠.
이 사건의 피의자는 자신을 '남성연대'라고 밝혔는데요. 최근 빈번하게 자행되는 남초커뮤니티 발 여성혐오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외국에서는 일찌감치 이들을 '인셀(비자발적 독신주의자)'로 칭하며 매노스피어 등의 남초커뮤니티를 '새로운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분석하고 있죠. |
|
|
로라 베이츠는 총기난사, 차량 테러 등 현실에서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남초커뮤니티인 '매노스피어'의 모든 것을 분석한 영국 페미니스트 작가입니다. 《인셀 테러》에서 저자는 가상의 인물 '알렉스'로 위장하여 여성혐오 커뮤니티를 집요하게 추적하는데요. 저자가 인셀 포럼을 분석하기 위해 취한 페르소나인 '알렉스'는 "환멸에 빠진 20대 초반의 젊은 백인 남성"으로, 자신이 특권을 누린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에게 '너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말하면 성질을 부리는 사람입니다. 또, 그는 '강경 여성혐오자'는 아니었지만, 돈이 별로 없고 외로움에 시달리는 남성입니다. 그래서 유튜브 등에서 "외모를 향상시키는 팁"을 찾아 배회하죠.
알렉스는 우연히 한 인셀 포럼에 가입하게 되는데, 그 곳에서 이 사회의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진짜 특권을 가지고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여자들"이며, "피해자는 남성"이라는 라는 '진실'이었죠. 알렉스는 이들이 말하는 진실에 매료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글을 쓰진 않았지만, 커뮤니티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 '나는 왜 강간 합법화를 지지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읽으며 압도당합니다. |
|
|
'인셀'의 시작은 1990년대 중반, 알라나Alana라는 여성이 만든 웹사이트였습니다. 알라나는 '알라나의 비자발적 독신 프로젝트Alana's Involuntary Celibacy Project'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했고, 이는 성별과 관계없이 모두가 각자의 외로움과 불행을 공유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로 발전하게 됩니다. 정작 웹사이트를 만든 알라나는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이 커뮤니티와 멀어졌죠. 20여년 뒤, 이 커뮤니티는 초기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좌절감을 선사한 여자를 혐오하는 남자들의 커뮤니티로 변모해 있었죠.
이 책의 각 챕터는 '여성을 OO하는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혐오', '사냥', '괴롭히는', '탓하는', 해치는' 등을 OO에 배치함으로써 남성계 커뮤니티가 갖고 있는 의식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폭력적인 행동들을 자세하게 서술하죠. 이들이 가지는 공통점으로는 '자기 연민', '소속에 대한 갈망', '섹스에 대한 광적인 집착', '(섹스를 거부당한 데에서 오는) 분노'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극단적인 여성혐오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여자들을 죽입니다. '정당한 응징'이라는 착각으로 말이죠.
이 책에서 묘사하는 '인셀'들의 모습은 여성혐오 범죄자들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남초 커뮤니티가 계속해서 여성혐오자를 배양하는 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는 그칠 줄 모를 테니까요. |
|
|
케이트 맨 지음, 서정아 옮김 (글항아리)
《인셀 테러》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 케이트 맨의 《다운 걸》이 있습니다. 두 책에서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사건 중 하나는 2014년 5월에 발생한 '엘리엇 로저의 총기 난사 사건'입니다. 엘리엇 로저는 '심판의 날'을 예고하는 영상을 업로드합니다. 그 영상에서 로저는 자신이 "외롭고, 거부 당했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을 견디도록 강요받아왔으며 그건 다 젊은 여자들이 나한테 매력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어 "여학생회 회관에 있는 여자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몰살"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세 여학생을 쏘았습니다. |
|
|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지난 7월, 온라인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에 "신림역에서 한국 여성 20명을 죽일 거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20대 남성이 있었거든요. 그는 흉기를 구매한 내역 등을 첨부하기도 했는데요. 조사에 따르면 그는 약 5개월간 커뮤니티에 여성을 혐오하는 글 1,700여건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미수에 그쳤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성혐오가 의식 수준에서 머무는 것이 아닌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
|
《누가 여성을 죽이는가》는 들불에서도 몇 차례 언급한 적 있는 책인데요. 오늘은 그 중에서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의 글을 인용해보려고 합니다. 허민숙은 「여성에 대한 폭력은 혐오범죄인가」라는 글에서 혐오범죄가 초래하는 사회적 해악을 총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합니다. 첫째는 개인이 입는 피해로, 역사적으로 차별받아 온 집단에게 가해지는 편견을 개인에게 부과함으로써 물리적 피해뿐 아니라 감정적 피해(굴욕, 모욕, 고립, 자기 증오)를 입히는 문제를 수반합니다. |
|
|
두 번째로는 피해자가 속한 그룹 구성원에게미치는 '간접적 피해'로, 구성원들은 피해자와 유사한 범죄를 경험하게 될 거라는 "공포의 희생자"가 되고, 이에 사회적 행동의 반경이 좁아진다는 점에서 "사회적 통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죠. 끝으로 혐오범죄는 "전체 사회"에도 영향을 줍니다. 피해-가해 집단간 사회적 위계를 재확인 그리고 강화함으로써 공동체 내 갈등과 긴장을 유발하고, 결국 공동체의 통합을 지연시키게 되죠. 어렵사리 이룬 진보를 무력화하고, 사회를 퇴행시킴으로써 과거로 회귀하게 만들고요. |
|
|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은행나무)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불리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여성 혐오' 교과서로 활용되는 작품입니다. 이 책에서 우에노 지즈코는 남성 연대를 통해 구축되고 완성되는 여성 혐오를 짚어냅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남성들끼리 공유함으로써 남성과 여성을 이성과 감정, 책임감의 유/무, 의존적/독립적 등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묘사하며 남성간 유대를 강화한다고 봤죠. 이러한 우에노 지즈코의 설명은 남초 커뮤니티의 양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유용합니다. 여성을 멸시하고, 타자화하며 낙인 찍는 그들의 행위는 인셀이 공유하는 정서와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성 혐오를 종식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 책에서 "여성 혐오의 발생 원인과 매커니즘을 밝히고, 그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가며 (...) 여성 혐오로부터의 '탈세뇌'를 이뤄나간다면 여성 혐오 너머의 세상을 그려나갈 수 있다"고 말하는데요. 우리는 과연 여성 혐오 너머의 세상을 그려나갈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어떤 질문 먼저 던져야 할까요? |
|
|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기선, 랑희, 슬기, 이호연, 타리, 희정, 전주희 글, 치명타 그림 (한겨레출판)
'들불'이라는 이름은 투쟁이나 혁명과 연결하여 자주 활용되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들불레터 역시 여성주의적 혁명을 위해 '들불'이란 단어를 활용했죠. 들불을 활용하여 혁명의 기치를 부각시킨 또 다른 사례로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가 있습니다. 들불열사기념사업회는 들불야학을 설립·운영했고, 5.18민주항쟁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7인 들불열사의 삶과 정신을 기념, 계승하기 위해 각종 사업을 수행하고 있는 비영리 사단법인인데요. 이 사업회에서는 '들불상'이라는 이름으로, 매년 민주·인권·평등·평화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2020년 제15회 들불상을 수상한 톨게이트 노동조합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
|
왼쪽: "저곳에 여성 해고 노동자들이 있다", 시사IN 오른쪽: "톨게이트 투쟁 2년후, 한국도로공사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다 |
|
|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지붕(캐노피) 위로 올라가야했던 배경과 과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과 관련한 언론 기사 및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의 해제, 〈과잉착취가 만드는 취약한 삶, 취약한 삶들이 만드는 여정〉(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의 내용을 토대로 간략하게 설명해 볼게요.
- 2019년 6월~7월: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 1,500명을 해고하다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도로공사의 지시를 받아 일하고 있었지만, 실제 고용형태는 용역업체 소속이었는데요. 대법원은 이러한 고용 형태가 불법이므로, 한국도로공사에 불법파견의 책임을 물어 톨게이트 노동자를 직접고용할 것을 판결합니다. 이에 한국도로공사는 '한국도로공사서비스'라는 자회사를 설립하며 노동자들을 자회사 정규직으로 채용하려는 꼼수를 부립니다. 노동자들은 자회사 고용을 거부했고, 한국도로공사는 이들을 해고하는 것으로 응답합니다.
2017년 정부가 발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은 문재인 정부의 대표적인 노동정책입니다. 이를 기반으로 진행된 정규직 전환 절차에 따라 정부는 2년간 중앙부처 및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등 총 19만 명 이상의 기간제·파견용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러한 결과만 놓고 본다면 분명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파견·용역 노동자를 자회사에 고용하는 꼼수가 성행하게 되면서 부정적인 평가 역시 따라왔습니다.
능력주의 담론을 불러 일으켰던 "인천국제공항공사(이하 인국공)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과정을 살펴보면 '자회사' 전환 고용의 배경에 대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요. 인국공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들이 '무임승차'하고 있으며 자신들은 '시험'을 보고 들어왔으니 그들 역시 시험을 치러야 한다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이러한 논리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 담론과 긴밀하게 맞닿아있죠). 또, 공공기관이 '총액인건비제'*로 운영되는 상황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이들의 임금이 오르면, 기존 정규직들의 임금에 불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죠. 기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던 업무가 청소·시설관리 등 평가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들이 교섭력을 가지고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경우 기존 정규직들이 불리해질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자회사'였습니다. 자회사를 설립하여 기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별도로 관리하면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발을 피할 수 있고, 모회사가 여러 결정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건 원청·하청 구조와 마찬가지로, 원청이 하청에 대한 강력한 지배력을 갖고 하청은 독립적인 권한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 모회사-자회사 간에는 격차와 차별이 발생하게 되고요. 그러니까 이전의 간접고용(또는 불법파견)의 형태와 크게 다를 바 없게 되는 겁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용역업체를 한곳에 모아 만든 것이 자회사라고 지적하며, 자회사가 오직 인력공급용으로만 활용되기 때문에 노동자를 수단화하게 되는 문제를 가지는 것, 또, (자회사 전환 시) 임금이 하락된 사례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한편, 정규직 전환으로 예산 절감의 효과를 어필했던 정부의 취지와 달리, 자회사 전환은 자회사 운영을 위한 모회사의 추가 지출이 발생하는 결과를 낳는 문제를 가집니다.
* 총액인건비제도: 정부의 각 기관이 총액인건비내에서 조직ㆍ정원, 보수, 예산을 각 기관특성에 맞게 자율적으로 운영하되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제도. 총액인건비내에서 조직ㆍ보수 제도를 성과향상을 위한 효율적 인센티브로 활용, 성과중심의 정부조직 운영을 위해 도입된 것으로 2007년 1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한경 경제용어사전)
- 고공농성: 서울 톨게이트 캐노피에 42인의 노동자들이 '기만적인 자회사 전환 거부, 직접고용 쟁취'를 외치다!
이러한 배경에 의해 톨게이트 비정규직 노동자 1,500여 명은 국가를 향한 직접고용 요구 투쟁을 전개합니다. "19년 7월 1일의 500인 청와대 집단농성, 9월 9일의 500인 본사 점거농성, 11월 광화문과 민주당 의원실 점거농성 돌입과 2020년 1월 무기한 단식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물러서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죠. |
|
|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에는 '치명타' 작가님의 아름다운 그림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
|
|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 13명의 목소리를 담은 구술기록집으로, 총 11장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에서 노동자들은 각자의 사정과 공동체의 상황을 연결하며, "불온한 순간들을 마주하고 견뎌 온" 시간을 떠올립니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뒤섞이고 교차하기보다 경계에서 불안정하게 머물러 왔는데요. 이들은 고된 투쟁의 과정에서 함께 살아가는 일을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누군가의 다름을 나와는 다른 생활 조건과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서로 의지하면서 사는 것은 당연하니 일상의 불편과 부족을 개인의 능력과 책임보다는 이를 집단에서 어떻게 바꾸고 채울 것인가를 먼저 묻는 감각"(p.12)을 점차 갖춰 나가죠. 노동자로서 투쟁을 시작한 이들이 더불어 사는 시민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책에서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그간 한국사회에서 활용되어 온 단어가 이들에게 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순간입니다. 예컨대, '성장'이라는 단어는 줄곧 신자유주의적 명령과 맞물리면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자기계발의 목표로 정의되곤 하는데요. 이 책에서 '성장'은 투쟁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연대의 감각으로 정의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 있게 옳다고 말할 수 있는 태도, 부당한 것에 대해 시정 요청을 하는 당당함을 갖출 수 있는 과정이 바로 '성장'인 것이죠.
"다시 투쟁하라면 하겠냐 그래서 나는 당연히 한다 그랬어. 투쟁하면서 우리도 배우고 성장하고 더 나아가고. 나중에는 투쟁하는 곳에 우리가 연대 가는 것에 대해서 뿌듯한 거예요. (...) 내가 더 성장하고 나니까, 지사장 앞에서 당당하게 부당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신감, 당당함 이런 것이 재산이 되더라고." (p.43) |
|
|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책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들은 다양한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공통점을 가진 이들은 여성, 중년, 장애인, 북한이탈주민, 한부모 가족 등 여러 형태의 삶의 모양을 가지고 있죠. 우리는 끝으로 장애를 가진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려고 합니다.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은 기업이 장애인을 고용할 의무를 가짐을 밝히며 의무고용률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업주가 이를 초과하여 장애인을 고용하면, 사업주에게는 '장애인 고용장려금'이 지급되죠. 톨게이트 영업소에서는 이를 악용합니다. 고용장려금을 받기 위해 장애인을 고용한 후, 고용장려금 기간이 끝나면 다른 영업소와 인력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수단화했죠. 장애여성노동자의 경우 지원금을 우대하여 지급*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손쉽게 착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한국도로공사를 비롯한 기업, 사업체, 공공기관들은 장애인 노동자의 비율을 부담이 없을 정도로만 유지하고, 여성노동자 비율을 늘리고, 3년이 지나면 각각의 영업소가 이미 숙련된 여성노동자를 돌려가며 해고와 재고용하여 고용장려금을 수령했다. (...) 장애여성 노동자들은 3년마다 사장의 이익을 위해서 영업소를 옮겨 다니면서 자신들의 존재가 지원금으로 환원되는 느낌을 받았다." (p.183)
- 여성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젠더/섹슈얼리티 폭력의 형태
고용장려금 지급 대상이 아니었던 경증 장애여성과 비장애여성의 일자리는 나빠졌습니다. 이에 일부 비장애여성은 갈수록 절박하고 취약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죠. 사장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이들에게 비공식적인 업무, 사적인 요구를 수행하도록 강요합니다. 이들은 회사에서 '애인'으로 불리며, 사측에도, 노동자 측에도 속하지 못한 채 철저히 고립되어 갔는데요. 이른바 '애인만들기'는 상급자에 의한 성적 괴롭힘의 패턴과 유사합니다. 여성의 취약성을 이용해 착취하고, 그를 다른 노동자 그룹으로부터 고립시키면서 문제가 드러나는 것을 막게 됐죠.
*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 제30조(장애인 고용장려금의 지급): 고용장려금의 지급단가 및 지급기간은 고용노동부장관이 「최저임금법」에 따라 월 단위로 환산한 최저임금액의 범위에서 제33조 제3항에 따른 부담기초액, 장애인 고용부담금 납부 의무의 적용 여부, 그 장애인 근로자에게 지급하는 임금, 고용기간 및 장애정도 등을 고려하여 다르게 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중증장애인과 여성장애인에 대하여는 우대하여 정하여야 한다. |
|
|
오늘 '들불이 만난 이야기'에서는 톨게이트여성노동자 구술기록팀의 책,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투쟁은 단기간에 목표를 실현하기 어려운 고된 투쟁입니다.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특히 가정과 사회의 지지를 얻기 어렵고, 폄하되기 일쑤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투쟁의 모습을 엄숙하고, 슬프고, 분노에 가득찬 모습으로 상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우리가 흔히 '피해자'라고 상정하는 편견이 담긴 이미지일 뿐입니다. 사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분노와 절망보다는 희망에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희망을 품고 있기에 계속 싸울 수 있죠. 그들의 투쟁에는 춤이 있고, 노래가 있으며 서로를 연결하는 우정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정을 토대로 현장에서 다른 몸들과 공존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합니다. 이들은 연대의 정치를 향해 뚝심있게 나아갑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갖춰야 할 시민성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정체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태도일 텐데요.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장'은 개개인이 배불리 먹고 사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일로 나아가는 것임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 이 책을 읽고 진정한 성장과 연대의 정치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
|
|
싸우는 여자들의 기록이 담긴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언제나 제일 먼저 언급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폐업과 해고에 맞서 투쟁했던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폄하하고, 저임금으로 착취하며, 갖은 방법을 동원해 쫓아내려했던 기업들의 전략에 맞서 싸우는데요. 절망적으로만 보이는 상황 속에서 이들은 행동을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새로운 경험을 하며 보람을 느낍니다. 이들의 모습은 꼭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 속 여성노동자들의 모습과 닮아 있어요. |
|
|
이 책은 미등록이주민들의 역사를 기록한 르포소설로, 제2의 『전태일 평전』이라고 평가받은 『말해요, 찬드라』의 저자 이란주의 장편작입니다. 이 작품은 체류자격이 불안정한 이주민으로서 차별을 겪어야 했던 로지나 가족과 '행복동'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윤석열 정부의 '이주노동자' 관련 정책이 오직 인력을 확대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주민을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받아 들이기 위해 우리 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지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양한 몸', '공동체'를 키워드로 《캐노피에 매달린 말들》과 함께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
|
|
들불레터, 어떠셨나요?
들불은 여러분의 의견과 이야기가 궁금해요.
아래 버튼을 클릭하시면 익명으로 의견을 남기실 수 있답니다! |
|
|
들불레터 지난화 다시 보기
💌 링크
🎧 지난 들불레터를 오디오로 들으려면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친구에게 들불레터 추천하기 아래의 링크를 주변에 공유해주시면, 들불의 내일에 큰 보탬이 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