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들불레터에서는 들불이 읽고 있는 신간 두 권을 소개하고, 무라타 사야카의 신작 《신앙》을 소개합니다.
💬 들불의 PICK!
- 『타이틀 나인』, 셰리 보셔트 (위즈덤하우스)
- 『있었던 존재들』, 원도 (세미콜론)
💬 (광고) 들불이 만난 이야기
- 『헌치백』, 이치카와 사오 (허블)
- 『멀리 갈 수 있는 배』, 무라타 사야카 (살림)
|
|
|
셰리 보셔트 지음, 노시내 옮김 (위즈덤하우스)
타이틀 나인은 1972년 제정된 성별교육평등법으로, "미국에서 그 누구도 성별을 이유로 연방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 또는 활동에서 제외되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차별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명시한 연방 법안입니다. 여성 입학과 채용의 기회는 물론 스포츠 활동의 기회 확대, 소수자 권리 보호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며 현재까지도 혁명적인 법안으로 평가받고 있죠.
셰리 보셔트의 《타이틀 나인》은 이러한 '타이틀 나인'을 둘러싼 이슈와 갈등, 이를 지키기 위해 싸워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방대한 분량에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 책은 '법'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성차별적 억압에 맞선 사람들의 투쟁 서사를 담은 작품으로, 법에 관해 잘 모르거나 따분하다고 느끼시는 분들 또한 술술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또, 반대에 부딪혀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교육계의 성차별 금지법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타이틀 나인의 한계를 짚어보며 우리에게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를 다시금 상기 시키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
|
|
"이 책의 결말은 간단히 말해서 이 이야기에 결말이 없다는 것이다. 문화의 변화가 법의 변화보다 뒤처질 수 있고,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민권의 근본적인 공정함을 인정하는 흐름을 없던 일로 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문제에 이름을 붙이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수 있다. 눈가리개를 벗은 사람은 본 것을 안 본 것으로 되돌릴 수 없다. 미처 몰랐던 것을 발견하고 흥분해서 지른 소리 하나가 무수한 함성으로 바뀔 수 있다. 그땐 이미 돌이킬 수 없다." (p.508) |
|
|
《있었던 존재들》은 《경찰관속으로》를 쓴 원도 작가의 첫 칼럼집입니다. 2022년 한국에서 자살로 처리된 변사자의 수는 1만 2,727명이라고 해요. 즉 하루에 34.8명꼴로 자살한다는 것이죠.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음을 원한다는 사실에 놀라며, 자신의 직업적 위치를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데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는 과학수사과에서 현장감식 업무를 담당하며 수백 명의 변사자를 본 경험을 토대로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유를 살피고, 사회적 논의로 이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데요. 죽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의 목소리를 발신할 수 있게 된 그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우리가 외면해온 얼굴들을 다시금 떠올리며 어떠한 사회적 논의로 나아가야 할 지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작품입니다. |
|
|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22년 자살로 처리된 변사자의 수는 1만 2,727명이다. 하루에 34.8명꼴로 자살한다는 말이다. 믿을 수 없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죽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음을 원하다니.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사회적으로 논의가 부족하다니. 특정 종류의 동물이 집단 폐사할 경우 전국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는데, 단일한 종류의 동물이 타의도 아닌 자의로 우후죽순 죽어나가는데 비상사태가 아니라니. 우리나라는 전쟁 중인지도 모른다. 매일매일을 사는 게 전쟁이다. 이들을 ‘변사자’ 대신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지 못한 ‘전사자’로 부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p.174) |
|
|
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신앙》구매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
『신앙』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재원 옮김 (은행나무)
정상성 이데올로기의 해체는 이제 우리에게 당연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예컨대 최근 자주 거론되고 있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해체가 그렇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상'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이성애자 남녀가 결합하여 가정 내에서 젠더화된 성역할을 부여받고, 그를 통해 위계를 설정하는 정상가족은 가부장제 격파를 위해서 해체되어야 마땅하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죠.
정상성의 해체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으로 정상인 모습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을 기준으로 간단하게 나열해보자면 초·중·고 교육을 모두 이수하고 대학에 진학한 자, 이성애자, 대학 졸업 후 회사에 취직해 세대별로 부과된 생애주기 기준에 맞춰 결혼하여 핵가족을 꾸린 자, 질병과 손상이 없는 자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이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은 한국 사회에서 '정상이 아닌 사람' 혹은 '이상한 사람'으로 분류되죠.
정상 세계는 강제적입니다. 정상성이라는 갑옷을 두른 인간들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비정상'을 규정 짓고, (그들의 기준에서) 정상적이지 않은 타인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강제력을 행사합니다. 정상성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그들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경멸하고, 착취하고, 사회 바깥으로 내몬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몰리지 않기 위해, 비뚤어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생존전략으로써 '정상-되기'를 택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상'은 모두에게 당연한 현실이 됩니다.
이토록 강제적인 정상 세계를 뒤집기 위해서는 당연한 현실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과 비정상,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뤄져야만, '정상성'이라는 믿음 너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죠. 다행스럽게도 이미 그 너머에서 '정상'이라는 가치체계를 교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오늘은 그 중에서도 파격적인 설정으로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작가, 무라타 사야카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
|
|
국내에 번역된 무라타 사야카의 작품들. 그는 대표작인 《편의점 인간》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통해 '정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
|
|
무라타 사야카는 《편의점 인간》을 통해 신드롬을 일으키며 일본 문학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한 작가입니다. 그는 대표작 《편의점 인간》에서 취업 활동이나 결혼을 하지 않은 채 18년 동안 편의점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립니다. 주인공은 평범치 않은 모습으로 주변의 걱정과 경멸을 불러 일으키는 이질적인 존재지만, 편의점 안에서 정체성을 찾으며 스스로를 '편의점 인간'이라고 규정하곤 편안함을 느끼죠.
이처럼 무라타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의 틀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끝내 자신의 이상함을 정상으로 여기기로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씁니다. 무라타는 이들의 이야기를 파격적인 설정 안에 녹여내며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정상성이라는 믿음을 우습게 만들어 버립니다. 오늘 소개할 《신앙》 역시 이러한 무라타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현실을 지루할 틈 없이 뒤흔드는데요. 짧은 단편으로 구성된 이번 작품집은 무라타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아요. 또, 무라타의 에세이도 함께 실려 있어 그를 좋아했던 독자들의 마음도 사로 잡을 수 있을 테고요. 오늘은 《신앙》에 수록된 6편의 단편소설과 2편의 에세이 중 제가 믿고 있던 세계를 강력하게 붕괴시킨 몇 편의 작품을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
|
사진: 무라타 사야카 (한국문학번역원) 이 사진이 실린 기사에서도 무라타를 '크레이지(미친) 사야카'로 소개합니다. |
|
|
제일 먼저 소개할 작품은 「기분 좋음이라는 죄」라는 무라타의 에세이입니다. 무라타는 일본 독자들 사이에서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그야말로 '미친듯이' 파격적이기 때문에 붙은 별명인데요. 무라타는 이 별명에 얽힌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에 앞서 평범하지 않은 자신이 속할 자리가 없을까 전전긍긍해하며 공포에 가까울 정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유년 시절을 떠올립니다. 특히 무라타가 공포스러워했던 단어는 '개성'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줄곧 아이들에게 '개성을 마음껏 표출하라!'고 말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개성이란 '어른들의 기분을 해치지 않을, 상상 가능한 범위 안의, 딱 적당하고 멋진 특징'(p.120)일 뿐이었습니다. 정말로 이상한 아이는 배제당했기 때문에, 그는 평범함을 연기하기로 합니다.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진짜' 개성을 갖춘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분투했죠.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된 이후 '다양성', '미쳤다'(상대의 이상함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와 같은 말들을 접한 무라타가 뛸 듯이 기뻐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인 채로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감각은 무라타에게 안도감과 기쁨을 선사했어요. 그렇게 그는 '미쳤다'는 표현을 '수용의 말'로 받아들이며,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 역시 기쁜 호칭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크레이지 사야카'라는 별명이 점차 널리 쓰이게 되면서, 그는 점차 인간이 아닌 일종의 캐릭터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크레이지'라는 별명에 상처를 입게 되죠. 한 독자는 무라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라타 씨와 스스로가 닮았다고 느끼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런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p.125).
무라타는 '다양성'이라는 말을 처음 만나게 됐을 때와 달리, 이제는 이 말을 거의 입에 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무라타 자신이 사실 스스로를 기분 좋게 만드는 다양성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기분 나쁜 다양성은 밀어냄으로써 '다양성'이라는 말을 무기 삼아 누군가로 하여금 유년시절의 자신이 겪은 일을 그대로 겪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한 결과였죠. 무라타는 '다양성'에 관한 자신의 고민을 '크레이지'라는 별명에 대입해봅니다. 그리곤 이 역시 "안전한 장소에서 별종을 캐릭터화한 다음 안심하려는 형태의, 수용을 가장한 라벨링이자 배제라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그것을 다양성과 착각해 퍼뜨렸다는 사실"(p.126)을 깨닫습니다.
'다양성'이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단어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다양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죠. 그런데 무라타의 고백을 듣고 나면, 우리 각자가 품고 있는 다양성의 모습은 제각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는 다양성을 구체적으로 맞닥뜨린 경험이 없거나 적기 때문에, 나 자신과 근접한 바운더리 내에서만 다양성을 상상할 뿐인지도 몰라요. 어쩌면 내가 갖고 있는 '다양성'에 대한 이미지는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모습, 내가 받아들여지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그려지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니 우리도 무라타의 깨달음을 통해 내게 '기분 좋은 다양성'이 아닌 '기분 나쁜 다양성'에 대해, 그것은 왜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지 한번쯤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말. 저는 이 에세이를 읽으며 이치카와 사오의 《헌치백》을 떠올렸는데요. 두 작품이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레터 하단의 '《신앙》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코너를 이어 읽어 주세요!
"모쪼록 내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극심한 불쾌함에 구역질이 치밀 정도로 이 세계가 다양성으로 넘쳐나기를. 지금 나는 그렇게 바라고 있다. 몇 번이고 구토를 반복하며 거듭 생각해서 스스로를 계속 재판할 수 있기를. 지금의 내게 '다양성'은 그런 기도를 품은 말이 되었다." (p.127) |
|
|
표제작인 「신앙」은 새로운 사이비 종교를 시작해보자는 이시게와 사이카와의 권유로 시작됩니다. 그의 권유를 받은 쪽은 주인공인 '나'(나가오카)로, '현실'이라는 세계가 가장 진실된 장소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나'는 현실이라는 견고한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 타인의 상상력이나 불확실성, 가능성 등을 무시하며 이를 교정하고자 애씁니다. 친구가 산 물건이나 경험의 원가를 따져 물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지적하고, 창업 세미나에 다니는 동생에게 하루종일 세미나 사기를 다룬 뉴스를 틀어주며 그것이 사기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자 노력합니다. 이 때문에 '나'는 동생에게 "언니의 '현실'이라는 거, 거의 사이비 종교 수준이네."(p.37)와 같은 말을 듣게 됩니다. 이때 '나'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믿지 않는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나'는 이시게의 권유를 비웃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모든 사람이 떠났던 경험을 떠올리며 어쩌면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은 '속는 재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속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구하려고 하는 환상, 그것에 눈을 뜨기 위해 자신에게 없는 재능을 다른 곳에서 구해야한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나'는 사이카와에게 자신을 세뇌시켜줄 것을 부탁합니다.
「신앙」에서 저는 '나'와 동창들의 대화가 특히 흥미로웠어요. 다단계 사기를 당했던 사이카와를 '바보'라고 조롱하며 비웃던 동창들이 '론바바론틱'이라는 고가의 접시를 갖고 싶어하고, 그 접시를 가진 사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부러워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요. '나'는 동창들의 기묘한 모습에서 사이카와가 다단계 업체에서 정수기를 팔 때 그것이 정말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거라고 믿었던 것과 동창들이 고액의 접시에 '행복'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믿음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의문을 품게 됩니다.
타인의 믿음을 비현실적이고 어리숙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자신의 믿음은 완전하고 당연한 현실이라고 믿는 인물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익숙한 단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무언가를 믿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이카와에게는 정수기가, 동생에게는 고액의 창업 세미나가, 동창들에게는 론바바론틱이라는 물건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이상화한 믿음에 갇혀 타인의 믿음을 쉽게 재단하고 부정합니다. 나의 믿음 이외에는 가짜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나'가 현실만이 '진짜'라고 믿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우리의 믿음만을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것 아닐까요? 무라타의 단편 「신앙」을 통해 내가 의심 없이 믿고 있는 '현실'의 모습이란 과연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난 정말로 정수기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 했어. 모두를 위해서. 이번에야말로 진짜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시작은 사이비 종교라 해도 그걸로 전 세계 사람이 구원받는다면 그건 진실이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p.45) |
|
|
「쓰지 않은 소설」은 친구의 권유에 클론을 사기로 한 나쓰코의 결심을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나쓰코는 노동, 집안일, 출산 등 클론의 다양한 쓸모를 어필하는 가전매장 직원의 추천에 따라 클론 네 대를 구입합니다. 나쓰코는 스스로를 나쓰코A로, 클론들을 나쓰코 B, C, D, E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쓰코C가 스트레스에 의한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앓다가 죽는 일이 발생합니다. 나쓰코A는 C의 죽음을 성가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무언가를 고발하려고 했음을 의식합니다. 어쩌면 클론에게 일과 임신까지 시키려고 하는 자신을 신뢰하지 못했던 것 아닐까 하고요. 이후 나쓰코A는 어쩐지 자꾸 신경 쓰이고 애를 태우는 존재인 나쓰코D의 지시로 나쓰코C가 다니던 회사를 대신 나가게 되는데요. 나쓰코A에게 클론으로서 일을 한다는 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판단과 평가로부터 어느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나쓰코A는 나쓰코C가 회사에서 느낀 절망감을 전혀 모른 채로 계속 회사에 다닙니다.
이 작품은 앞서 소개한 「신앙」과 마찬가지로 '진짜'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는 작품입니다. A, B, C, D, E라는 이름과 이들의 행동이 어지럽게 얽히면서 '진짜 인간'의 모습은 점차 희미해져가는데요. [장면 14], [장면 28], [장면 53]으로 띄엄띄엄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쓰여지지 않은 무수히 많은 장면들에 숨겨진 '진짜'와 '가짜'의 불분명한 경계를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마치 뚫어져라 쳐다보다 보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 짓는 숨겨진 선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죠. 그 선은 오직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데도 말이에요. |
|
|
《헌치백》은 중증 장애를 가진 이치카와 사오의 작품으로, 중증 척추 장애인 샤카가 품는 욕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샤카는 "평범한 여자 사람처럼 아이를 임신하고 중절해 보는 게 자신의 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다양성의 모습은 '어떤 몸을 가졌든 아이를 낳을 수 있다'겠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중절'까지 해 보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 보인 것이죠. 샤카의 욕망은 여러분에게 '기분 좋은 다양성' 인가요, 아니면 '기분 나쁜 다양성'인가요?
* 이 책의 제목인 '헌치백'은 '척추 장애인'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 이 책의 뒷표지에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 작가의 추천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지아 작가는 이렇게 씁니다. "(...) 비장애 여성처럼 임신과 중절을 꼭 해보고 싶다는, 사오를 꼭 닮은 주인공 샤카의 고백 앞에서 나는 차마 울지 못했다. 빨치산의 딸이었던 사춘기의 나도 그러했다. 타락이든 무엇이든 우리에게는 꿈꿀 자유가 있다. 우리도 인간이니까! (...) 연민에 맞서는 그녀의 위악에, 타락을 꿈꾸는 발칙한 상상력에 박수를 보낸다. 어떻게든 살아내기를. 사오, 파이팅! 적어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신의 모든 행보를 지지할 테니." 이 추천사에서 '우리'로 지칭되는 존재가 누구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욕망이 실현되는 데에 있어 '우리'라는 손쉬운 포개짐은 어떠한 효과와 부작용을 낳게 될까요. 그에게 응원을 보내는 정지아 작가의 마음은 애틋해 보이지만, 사오가 '비장애 여성처럼'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는 표현이나 박수를 보내고 파이팅을 외치는 표현에서 왠지 '우리'라는 표현과는 괴리가 있는 타자화의 태도가 엿보이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
|
|
《멀리 갈 수 있는 배》는 2011년 출간된 무라타의 또 다른 작품입니다. 무라타는 책에서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뒤흔드며 우리의 고정관념을 파괴하는데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그는 정확히 어느 쪽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줄곧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성별이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성별을 벗고 서로 사랑하고 싶었다. 상대의 성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두텁게 ‘성별’을 입고 있는 사람일수록 갑옷처럼 첩첩의 껍데기 안의 성별 없는 존재를 연상시켜서, 사실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 아닐까, 자신과 함께 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p.143) |
|
|
들불레터, 어떠셨나요?
들불은 여러분의 의견과 이야기가 궁금해요.
아래 버튼을 클릭하시면 익명으로 의견을 남기실 수 있답니다! |
|
|
들불레터 지난화 다시 보기
💌 링크
🎧 지난 들불레터를 오디오로 들으려면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친구에게 들불레터 추천하기 아래의 링크를 주변에 공유해주시면, 들불의 내일에 큰 보탬이 됩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