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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들불레터에서는 『미친존재감』을 통해 '전문성'이라는 개념에 질문을 던져봅니다. 또, '유령'이라는 존재, 그 미지의 타자와 얽히는 경험을 통해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시도했던 그레이스 M. 조의 『유령 연구』를 소개하였습니다. 왠지 마음이 분주해지는 연말, 두 권의 책으로 느린 사유의 시간을 가지실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들불레터 시작해보겠습니다.
👀 들불의 PICK!
- 『미친존재감』, 손성연 (화이트리버)
- 『해석에 반하여』 도서 증정 이벤트
📚 들불이 만난 이야기
- 『유령 연구』, 그레이스 M. 조 지음, 성원 옮김, 김은주 해제 (동녘)
-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 장혜령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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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되자마자 한 해를 돌아보는 회고에 돌입했습니다. 올해는 새로운 조직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그래서 기존에 하던 일들을 많이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잘하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들불의 프로그램을 기다리고 있다는 분들께도 미안할 따름입니다. 이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우울해집니다. 제가 하는 일들을 모두 잘 할 순 없는데도, 우울감이 좀처럼 가시질 않습니다.
특히 올해는 콘서타(ADHD 치료제)를 휴약·단약하면서 자주 절망에 빠졌습니다. 콘서타를 먹는 날과 아닌 날의 낙차를 견디기 힘들었고, 그때마다 콘서타를 복용한 나 자신만을 '나'로 규정했습니다. 콘서타를 복용한 때의 내가 발휘하는 능력이야말로 온전히 나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약물의 효과가 떨어지거나 효과를 볼 수 없는 시기에는 스스로를 믿기가 어려웠어요. 오남용 문제로 단약을 하게되자, 뇌가 풀어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평소 또렷하게 읽히던 책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단번에 이해했던 동료들의 말도 여러 차례 곱씹어야만 이해가 가능했죠. 이때 나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다시 약을 먹으면 괜찮아질거야. 나는 원래(정확히는 약을 먹을 때)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야."였습니다. 다행히 병행하던 인지행동치료가 도움이 되어 현재는 어느 정도 제 자신을 신뢰하게 되었지만, 두려운 마음은 여전합니다. '비정상'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정상적인' 내가 되어 동료들과 무리 없이 잘 지내고 싶은 마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 그 마음들이 까딱하면 산산조각나게 될까봐서요.
그때 만난 책이 공연예술 독립기획자 손성연의 《미친존재감》입니다. '미친존재감'은 예술창작 집단으로, 정신의학적 관점을 거부하는 대신 미친존재의 삶에서 고통과 재미를 발견하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이 책의 「미친 자아 정신건강 자아」에서 그는 저와 비슷한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10년 동안 ADHD 증상을 교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쳐도 고쳐도 끊임없이 고쳐야 할 점이 보인다. 나를 믿을 수가 없다. 가치관, 태도, 감정, 정서 등 이 모든 게 비합리적인 것 같다. 어쩔 때는 약물이 가치관, 태도, 감정, 정서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혼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상황이 두렵다. 나를 신뢰할 수가 없다." (p.17-18)
그리고 그는 약물을 복용한 자아, 이른바 '정신건강 자아'가 미친 자아의 입을 틀어막는다며, 합리적이고 명료하다고 여겨지는 "의료적 언어"로 말하기가 어떻게 미친존재의 말할 권리를 빼앗는지 이야기합니다.
아마 약물 복용을 이어가며 살고 계시는 다른 '미친존재'분들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약물로 나의 자아가 정신건강/비건강으로 쪼개진 상태에 스트레스 받고 계신 분들도 많을 테고요. 또, 약물을 복용하고 있지 않지만 주변에서 '정신과 좀 가보'라거나 '그냥 좀 쉬어'라는 제안을 받은 분들이라면 더더욱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실 테지요. 그런 분들께 《미친존재감》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잘' 한다는 기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전문성'이라 정의하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과 의문이 곧 나를 둘러싼 세계를 조금 달라지게 만들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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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윌북)
윌북에서 감사하게도 『해석에 반하여』 를 들불레터 구독자 중 다섯 분께 증정해주신다고 합니다. 수전 손택과 그의 대표작이 궁금하신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들불레터 132화를 읽어 보시면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자세하게 확인하실 수 있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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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어딘가 수상하고 으스스한 공기, 과거의 시간을 담은 채 도달한 흐린 것, 사람들의 신체를 통과하며 타인의 영혼과 교차되며 영향을 주는 잠재력, 그러나 투명해서 무엇이 담겨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야기.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존재인 유령은 종종 사회의 요구대로 수정되거나 무시 당합니다. 아니면 그것이 우리에게 미칠 가시적인 영향이 두려운 나머지 유령에게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서사를 부여해 독해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죠. 우리의 주변을 배회하는 존재, 정체를 알 수 없어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존재에 대한 서사화는 과거의 시간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 경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지금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복잡한 현실을 간편하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에 머무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유령을 상실했다는 그 자체, 유령이 담고 있는 시간과 목소리를 소거시켜버린 상실 그 자체를 상실하게 되는 과정에는 권력이 만들어낸 서사가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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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라는 존재는 과연 서사화가 가능한 대상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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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M. 조의 《Haunting the Korean Diaspora: Shame, Secrecy, and the Forgotten War》 표지. 앞이 보이지 않는 부상당한 한국 소녀가 미군의 부축을 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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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그레이스 M. 조의 《유령 연구》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유령’과 글과 말을 통해 전달되는 서사가 아닌 배회하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정동’을 탐구한 작품입니다. 이 책에서 그가 던지는 질문은 유령이라는 존재가 과연 서사화가 가능한 대상인가, 유령이 삭제된 역사에 의해 상실된 존재라면, 우리는 그의 상실에 ‘관해’ 서사화하는 작업 말고 “상실의 상실”을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유령이 경험적인 현실을 구축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은 채로요.
"어딘가에서, 언제쯤에, 무언가가 상실되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다. 그 어떤 기억도 그것을 복원하지 못한다." (p.27, 주디스 버틀러 《상실 이후, 그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재인용)
"(...) 양공주는 손쉬운 서사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미 관계의 역사에서 너무나도 큰 존재감을 갖지만 동시에 종종 감춰진 여성의 이야기를, 그것도 특히나 그 인물이 기억되기를 거부하는 트라우마를 구현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꺼낸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불확실한 발화는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까?" (p.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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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M. 조의 《전쟁 같은 맛》 미국판 표지(좌) / 한국어판 표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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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M. 조는 젊은 시절 부산의 기지촌에서 일하다 상선 선원이던 백인 미국 남성을 만나 미국으로 이주한 저자의 어머니 ‘군자’의 이야기를 담은 《전쟁 같은 맛》(Tastes Like War: A Memoir, 2021)의 저자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한인 이민 1세대로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했던 군자의 이야기를 그가 만들었거나 원했던 음식을 통해 환기 시킵니다. 또, 저자는 그에게 발병한 조현병이 그를 얼마나 위태롭게 만들었는지, 어째서 그의 상황이 이러한 광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명하며 그의 비밀에 조금씩 가까워집니다.
《유령 연구》(Haunting the Korean Diaspora: Shame, Secrecy, and the Forgotten War, 2008) 는 《전쟁 같은 맛》이 출간되기 13년 전 출간된 그레이스 M. 조의 첫 책입니다. 저자는 어머니의 존재가 마치 유령처럼 가족 안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이에 대한 탐구를 평생의 과제로 받아 들입니다. 그는 어머니의 위치를 설명해 주는 ‘양공주’ ‘전쟁 신부’라는 단어와 어머니가 겪은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이 가족, 사회, 정신적, 인식론적 폭력이 교차하는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만, 발견 이후의 작업은 녹록지 않습니다. 기지촌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숨기거나 속였고, 정신질환으로 그것을 언어로 전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승된 트라우마를 가진 자녀들이 부모가 품었던 (유령이라는) 비밀에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는 방식으로 유령 연구를 진행합니다.
"트라우마를 말하기는 잃어버린 것을 말하기가 아니라, 쳉의 표현을 빌리면 "문화적 트라우마가 (...) 근원적으로 장소를 파악할 수 없는 사건의 형태로 재발"하는 방식들에 관한 명상이다. 나는 미군이 개입한 역사적 기간 동안 한국 여성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진실을 밝힌다거나 이런 여성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다고 주장하는 대신 이 작업이 우리 주변에 있는 배회의 흔적들을 찾아내기를 희망한다. 트라우마의 자국이 새겨진 배회의 장소들에 형체를 부여하는 것은 트라우마의 생산적 가능성에 물꼬를 틔운다." (p.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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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스페셜 '전쟁과 여성 3부-그녀의 꿈'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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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저자에게 중요한 작업은 주류 사회과학이 승인하는 경계를 넘어서서, 그저 통과할 뿐이라 여겨졌던 ‘유령’이라는 부재가 현실에 존재감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일입니다. 이는 곧 잊혀진 폭력의 역사 속에 희생당한 유령의 ‘상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과정과 이어집니다. 그는 폭력을 겪은 사람이 강제로 침묵 당할 때 생성되는 것을 곧 유령으로 정의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기에 자기 대신 말해줄 몸을 찾아 배회합니다. 이때 그는 자신과 “정동적으로 연결된” 몸 주변을 떠돕니다. ‘배회’는 트라우마의 전승, 이전, 확산을 불러 옵니다. 이는 전쟁과 국가폭력에 희생된 모든 이들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유령의 배회를 감각하게 만듭니다. 시간을 품은, 부재로서 존재하고 있는 영혼들이 바로 연대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셈이죠.
그러면 저자는 “상실에 ‘관해’ 서사화하는 작업 말고 “상실의 상실”을 “알아차리는”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요? 저자는 《유령 연구》에서 ”유령을 기록하는 글쓰기“를 시도합니다. 비선형적이고, 회귀적이며 다층적인 형식의 글쓰기는 문학적 작업물인 삽화를 통해 실현합니다. 흩어져 있는 여러 매체와 형식의 목소리들을 그러모아 선택적으로 인용하고 연구의 틀에 맞추어 활용하는 방식, 그러니까 ‘훼손’의 방식이 아닌 실제와 허구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상태로 엮거나 중첩을 통해 자의적으로 ‘선택’이라는 과정을 생략하는 방식을 채택하죠. 글 중간중간 검은색 바탕으로 들어간 글을 읽고, 다시 역사적 맥락 안에서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는 작업은 시공간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며 우리 또한 유령과 영혼을 겹치고 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이 책의 글쓰기는 과거가 종료되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적극적으로 유령을 호출하는 정치적 행위를 실천한다. 이러한 글쓰기는 트라우마에 얽힌 자의 몸을 빌려 유령이 말하게 함으로써 "회복 불가능한 것을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성의 조건으로 만드는" 것, 새로운 몸이 생성되기를 희망하는 것, 그것을 향해 있는 것이다." (p.355-356, 해제)
얼마 전 올해의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는데요. 저는 올해가 가기 전 읽은 《유령 연구》를 올해의 책으로 꼽고 싶습니다. 국가에 의해 삭제된 폭력의 역사를 사회적 존재로서의 ‘유령’이 재사유하는 작업에서 의미를 탐색해내는 과정도 가치 있고, 이 책의 새로운 글쓰기 방식이 선사하는 경험도 풍성합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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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령 지음 (은행나무)
《유령 연구》는 유령을 통해 디아스포라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업인데요. 그 과정에서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텍스트, 《딕테》를 인용합니다.
"당신은 돌아가지만 그들 중의 하나가 아니고 (...) 열 걸음을 뗄 때마다 그들은 알고자 합니다. (...) 당신은 언제, 이 나라를 떠났고 당신은 왜 이 나라를 떠났으며 왜 다시 이 나라로 돌아왔는가 묻습니다." (p.173, 차학경 《딕테》 재인용)
차학경이 《딕테》에서 빌려온 목소리들은 "한 번도 정당성을 얻어보지 못한" 목소리들입니다. 저자는 과거의 이야기 속에서 한인 디아스포라에 관한 이야기를 발견하고, 과거의 그것에 균열을 내려면 하나 이상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을 배회하는 유령이라는 존재가 바로 이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든다고 주장하죠. 인쇄물로써 세상에 보여졌던 이야기가 아닌, 권위나 완결성과는 거리가 먼, 다중적인 방식으로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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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령의 《여자는 왜 모래로 쓰는가》는 여자의 말하기—쓰기의 특성 중 하나를 '음성성'으로 꼽습니다. "역사로 기록되지 않는 목소리로 된 기억을 대신 말"한다는 거죠. 또, 다른 특성으로는 '유령성'을 꼽습니다. 죽어서도 우리에게 말하려는 존재가 여자라는, 유령성을 가진 존재라는 겁니다. 이 책에서는 차학경을 포함해 다와다 요코, 한강, 아니 에르노, 김혜순 등의 여성 작가들의 텍스트를 통해 그들을 살리고, 자기 자신을 살리는 작업을 거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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